<115화>
“후우, 나 어디 이상하지는 않아?”
“응, 괜찮아. 멋있어.”
멋있다는 말에 헤르윈의 얼굴이 헤실거리며 풀렸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얼굴을 굳혔다.
오늘 갑자기 요한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업무를 마치자마자 바로 단장을 하고 아그네스에 찾아왔다.
자신과 루시아를 동시에 부르신 것을 보면 분명 큰일임이 틀림없었다.
오늘 오전에 요한을 몬스터로부터 구해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간 단호했던 요한의 모습이 떠올라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요한의 결정에 따라 제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그건 루시아도 마찬가지인지 그녀의 손도 잘게 떨렸다.
헤르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루시아는 헤르윈이 잔뜩 경직되어있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주는 그의 마음씨에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떨림이 잦아들고 루시아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응, 다 잘 될 거야.”
그들은 서로를 쳐다본 다음 앞에 굳게 닫힌 문에 다가갔다. 헤르윈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선 집무실에서 요한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모습에 헤르윈은 더더욱 긴장됐다.
헤르윈은 떨림을 애써 감추기 위해 루시아와 맞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여기 앉거라.”
요한이 소파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조용히 그의 말에 따랐다.
무거운 적막 속에 초침 소리만이 째깍째깍 들렸다. 요한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드디어 그가 운을 뗐다.
“헤르윈.”
“네, 넵!”
너무 긴장한 나머지 헤르윈은 요한이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루시아를 어떻게 생각하지?”
“루시아는 제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제 곁에 그녀가 없는 상상은 할 수 없습니다.”
꾸며낸 말이 아닌 진솔한 진심이었다. 그 마음을 루시아도 요한도 고스란히 느꼈다.
“그렇다면 나중에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내 딸을 구해낼 수 있는가?”
“당연히 구해낼 것입니다. 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루시아만큼은 꼭 구해내겠습니다.”
결의가 느껴지는 답에 요한은 오늘 오전, 기사들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잠시 눈을 감았던 요한은 이번엔 루시아를 쳐다봤다.
“루시아.”
“네, 아버지.”
“추후 시간이 흘러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오를 때면 헤르윈이 미워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헤르윈과 결혼해야겠느냐.”
“……저도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에요. 실제로 과거에 사로잡혀 헤르윈을 받아들이지 못했었고요.”
말을 고른 루시아는 헤르윈을 쳐다봤다. 강직한 형태를 띠는 붉은 눈을 보며 루시아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영영 헤르윈과 멀어져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것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이 제가 바라왔던 미래니까요.”
“……행복하니?”
“네,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루시아의 대답에 헤르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맞잡은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서로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을 보며 요한은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하거라.”
“……!”
루시아와 헤르윈이 퍼뜩 고개를 돌리며 요한을 쳐다봤다. 떨리는 두 쌍의 눈을 보고 요한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그렇게 죽고 못 산다는데 아비가 그 앞을 막아설 수는 없겠지.”
“……아버지.”
“백작님, 그 말씀은…….”
“결혼식은 언제 올리는 게 좋겠느냐?”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요한이 드디어 헤르윈을 인정하고, 결혼을 허락해주었다.
헤르윈과 루시아는 너무나도 벅찬 나머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으며 지금의 기쁨을 양껏 누렸다. 헤르윈의 목에 매달려있던 루시아가 요한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안겨오는 딸에게 요한은 잠시 당황했지만, 어느새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새겨졌다.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 정말,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제가 꼭 루시아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백작님 말고 앞으로는 아버님으로 부르거라.”
“……네! 아버님!”
발을 동동 굴리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두 사람에게서 어릴 적 천방지축이었던 5살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어리던 것들이 언제 저렇게 커서 결혼을 하게 된 걸까.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흘렀다.
“아버지! 이 소식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도 돼요?”
루시아가 자리를 서성이며 다급하게 말하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벽안에 이채가 돈 루시아는 이 희소식을 얼른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며 밖으로 나섰다.
헤르윈이 다친다며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하자 요한이 그를 불렀다.
“헤르윈.”
헤르윈이 뒤를 돌아보자 요한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저번에도 나와 내 딸을 구해주어 고맙다. 그리고, 앞으로 루시아를 잘 부탁하마.”
헤르윈은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저야말로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헤르윈이 꾸벅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머지않아 저 멀리서 루카스와 줄리안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소파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래, 이것으로 된 거겠지.”
저도 모르게 불편했던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앞으로는 행복한 나날만 계속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여름의 미적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요한은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 * *
여름이 끝물에 다다르고, 한 달여간의 논쟁 끝에 드디어 요한이 결혼을 승낙하였다.
헤르윈과 루시아는 서둘러 이 소식을 양 가족에게 알렸다.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던 결혼이 허락을 받자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기뻐했다.
특히 쌍수 들고 반긴 페네우스 측에서 어찌 손 쓸 새 없이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사교계에 알리고 말았다.
베른과 셀린느의 결혼 스캔들이 서서히 잠잠해질 때쯤의 일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베른과 루시아가 합의 하에 헤어지고, 각자의 사랑을 찾아간 것을 알게 되었지만, 베른의 결혼 스캔들 못지않게 루시아와 헤르윈의 결혼 소식이 다시 한번 사교계를 뒤집었다.
특히나 난공불락의 대상으로 여겼던 헤르윈이 루시아와 결혼한다고 하자 많은 영애가 눈물을 흘렸고, 루시아가 그간 헤르윈을 좋아했던 소문이 재조명을 받으면서 사교계는 시끌벅적해졌다.
이따금씩 루시아에게 헤르윈과 헤어지라는 협박 아닌 협박 편지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안 헤르윈이 무슨 조치를 취하고 나서는 잠잠해졌다.
그렇게 차근차근 루시아는 양 가문을 오가며 결혼을 준비해나갔다.
수도로 잠시 내려왔던 하일은 결혼이 결정되자마자 곧바로 북부로 올라갔다.
한 달 동안 수도에 있는 것도 오래 머무른 것이었다.
하일이 북부로 가기 전, 루시아에게 한 말이 있었다.
‘아가, 결혼식은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부인이나 헤르윈에게 말만 하면 모든 들어줄 거야.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 알겠지?’
스칼렛도 루시아를 예뻐하는 편이었지만, 하일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녀를 편애했다.
특히 세간의 소문을 신경 쓴 하일은 제국에서 제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며 무엇이든 지원해준다고 말하였다.
결혼식의 당사자인 루시아는 페네우스 일가의 사랑이 기쁘면서도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눈곱 뗄 새 없이 바쁘게 결혼 준비를 하던 도중, ‘그날’이 찾아왔다.
루시아는 헤르윈이 줬던 분홍색 드레스에 숄을 걸치고, 보물 1호가 된 아쿠아마린 귀걸이를 착용했다. 그리고는 단정한 차림새의 헤르윈의 손을 붙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수도의 신전 안에 있는 결혼식장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이 식을 올릴 때 이용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오늘, 베른과 셀린느의 결혼식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하루빨리 결혼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인 지 3달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저 멀리, 손님들을 맞이하는 베른이 보였다. 루시아와 헤르윈은 그에게 다가갔다.
“결혼 축하드려요. 베른.”
베른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짝 웃으며 루시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조금 뚱한 표정의 헤르윈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렇게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와야죠. 오기로 약속했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죠. 아, 저도 그 얘기 들었습니다. 두 분도 올해 안에 결혼하신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초겨울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초대하신다면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초대를 할지, 안 할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군요.”
“헤르윈.”
헤르윈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루시아는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헤르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경계하는 헤르윈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얼마나 루시아를 좋아하는지 여실히 보였다.
참 좋을 때라고 생각하며 베른은 헤르윈의 팔을 두드렸다.
“루시아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질투가 과한 건 좋지 않아요.”
헤르윈의 인상이 구겨지자 루시아와 베른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윈은 심통 난 표정으로 루시아를 끌어당겼다.
“가자. 웬 이상한 놈이 다 있네.”
“헤르윈도 참… 베른, 나중에 봐요.”
베른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베른을 쳐다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루시아는 헤르윈을 흘겨봤다.
베른의 놀림이 기분 나빴는지 그의 미간이 아직도 찌푸려져 있었다.
루시아는 손가락을 쭉 내밀곤 그의 미간을 문질렀다.
“고운 이마에 주름질라. 네가 자기를 싫어하는 걸 아니까 베른이 장난친 거야.”
“흥, 어차피 앞으로 볼일도 별로 없을 텐데 장난은 웬 장난.”
“그래도 이 김에 친해지면 나쁠 건 없잖아.”
“루시아. 난 아직 잊지 않았어.”
“응? 뭐를?”
“저 녀석이 네 첫 키스를 가져갔다는 걸.”
루시아는 곧바로 입을 합 다물었다. 헤르윈이 뾰족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잠시 눈치를 보던 루시아는 그의 팔에 착 달라붙었다.
“그래도 이제 나도 너랑 결혼하고, 베른도 제인슨 영애와 결혼하잖아. 다 지난 일 가지고 왜 그래.”
“지난 일이라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을 뺏겼으니까 그렇지. 너랑 인생의 반절을 함께 보내면서 네 첫 순간들을 지켜본 건 난데,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니고 첫 키스를……!”
“아앗! 저기 크리스틴이다! 우리 저기로 가자!”
헤르윈이 짜증을 넘어, 분노하려던 찰나 루시아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대충 화제를 돌리려던 심산이었는데, 실제로 저 멀리 크리스틴이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의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루시아는 서둘러 헤르윈을 끌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의 머리통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루시아와 헤르윈을 발견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결혼 준비로 최근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던 루시아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크리스틴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왜 그래?”
헤르윈도 그걸 느꼈는지 의아한 투로 물어보자 크리스틴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 오랜만이네요! 그, 그간 잘들 지내셨나요?”
누가 듣더라도 부자연스러운 말투였다. 루시아와 헤르윈 모두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크리스틴은 더더욱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크리스틴, 잠깐 아는 사람 만나서 얘기 좀 나누는 바람에…….”
익숙한 목소리가 크리스틴을 친근하게 불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아의 입이 떡 벌어지고 헤르윈이 어이없는 웃음을 보였다.
“결국 이렇게 됐네.”
“……브라이언.”
브라이언. 그는 크리스틴의 연인이라도 된 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루시아와 헤르윈을 보고 잠시 당황하던 그는 이내 씩 웃었다.
“오, 모두 간만이네. 요즘 결혼 준비로 바쁘지?”
번지르르한 낯짝으로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상당히 얄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