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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29)

<114화>

잠시 생각이 많아졌던 요한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헤르윈의 등을 토닥였다.

“……고생 많네.”

헤르윈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헤르윈은 고운 치열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루시아의 사이를 인정해준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기쁜 건지 헤르윈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 모습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지만 말고, 내게도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넵! 당연하죠. 일단 여기를 보시면…….”

곧바로 흐트러진 표정을 고친 헤르윈은 각 잡힌 자세로 요한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도 다행히 생각했던 것처럼 피해 규모가 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고블린이라서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일반 기사들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고요.”

“그건 다행이지만, 요즘 조금씩 수도에 몬스터가 나타나서 불안하군. 혹시 몬스터가 발생한 원인을 알고 있나?”

“죄송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수도로 내려오시면서 중간중간 저희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곳에서 몬스터의 흔적이 소량 발견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북부에서 조금씩 유입된 게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 어쩌면 초기 단계일지도 몰라.”

“네, 맞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수도도 몬스터에 대한 방비를 세우고 군사력을 키워놔야…….”

바스락-

귀에 희미하게 무언가가 잡혔다. 헤르윈은 말을 하다 말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는…….”

요한의 질문에 헤르윈이 손바닥을 보이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긴급 상황임을 눈치챈 요한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내 헤르윈은 주위에 있던 기사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각자 창과 검을 챙기고는 조심스레 헤르윈이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무언가가 도망칠 새도 없이 단번에 공격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숲을 해치니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잘 살펴보도록. 몬스터일 수도 있다.”

“예!”

기사들이 하나둘 풀숲 근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헤르윈은 어느새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갑자기 목덜미가 싸늘해진 것을 느꼈다.

헤르윈은 다급히 뒤를 돌며 요한에게 손을 뻗었다.

“백작님!”

”키에엑!”

고블린 한 마리가 요한의 뒤를 덮치고 있었다. 요한이 미처 당황하며 움직이지도 못한 새에 헤르윈은 서둘러 그를 끌어당기며 검을 휘둘렀다.

“키익! 키이익! 키에에엑!”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 고블린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다가 축 늘어졌다.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 뻔한 요한은 떨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헤르윈이 뒤를 돌아보며 요한을 살폈다. 이미 사체가 된 고블린을 멍하니 보던 요한은 고개를 돌렸다. 

헤르윈이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네.”

“하아, 다행입니다.”

헤르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자신 못지않게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공작님!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고블린을 잡으러 숲 안쪽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이 소란스러움을 듣고 돌아왔다.

헤르윈은 빠르게 현재 상황을 전달하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백작님께서는 이만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몬스터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어요.”

“……그래, 그리하마.”

헤르윈은 다정한 표정으로 요한을 안심시킨 뒤, 기사 두 명을 대동시켰다. 요한은 기사와 함께 말에 올라타며 황궁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가던 그는 뒤를 돌아 헤르윈을 응시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헤르윈이 진지한 얼굴로 방책을 세우고 있었다.

“공자님,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죠. 요즘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 아닙니까.”

두 기사의 대화를 듣고 요한은 귀를 세웠다. 기사들은 요한이 헤르윈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솔직히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맞아요. 소드 마스터도 소드 마스터이시지만, 민첩한 반응과 날카로운 신경이 어찌나 대단하시던지! 아무도 공자님처럼 그리 빨리 대처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선망의 대상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고양감이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저번에 나타난 오크도 전부 공자님께서 해치우셨잖아요.”

“맞아요, 저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웬 영애가 오크에게 붙잡혀서 모두 발을 동동 굴리고만 있을 때 용사처럼 나타났거든요. 그날의 광경을 보고 저는 평생 공자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이, 황실 기사단이 그런 말을 해도 됩니까?”

“하하, 저희들끼리만 있으니 하는 얘기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농담이 오갔다. 하지만, 그 중간에 들어있던 말을 듣고 요한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모두 발을 동동 굴렀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네? 어느 부분 말씀이신가요?”

“방금 자네가 웬 영애가 오크에게 붙잡혀서 모두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아무도 영애를 구하지 못했다는 건가?”

“아아, 사냥제 때 일 말씀하시는 거군요.”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루시아가 오크에게 붙잡혔다는 소식과 헤르윈 덕에 무사히 구출됐다는 것만 대략적으로 전해 들었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헤르윈이 구해줬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랑 힘을 합쳐서 구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사냥제를 나선 참가자들이 슬슬 돌아올 때쯤 오크가 갑자기 나타났었습니다. 덕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었고, 오크는 당시 철창에 갇혀있는 새끼한테 다가갔었죠. 그런데 그 철창 옆에 하필이면 영애 한 분이 있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말이었다. 제 딸이 그런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영애를 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새끼 오크를 구하고 나서는 갑자기 영애를 데려가더군요. 아마도 인질로 쓸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습니다.”

요한은 어느새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저 그가 당시의 현장을 무서워하는 거라고 생각한 기사는 마저 말을 이었다.

“오크의 바람대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영애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찰나에 페네우스 공자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요한에게는 끔찍하기만 한 상황이었으나 두 사람에게는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오크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공자님께서 영애를 붙잡은 손을 단칼에 베고! 영애를 한숨에 구해냈지 말입니다!”

“듣기로는 사체가 훼손될 정도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훼손되다마다요. 아예 모든 부위를 잘라내셨어요. 솔직히 지금은 이리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만 해도 엄청 살벌하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어요. 일반인은 물론이고 기사들 중에서 기절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말 그대로 온전히 헤르윈 혼자서 루시아를 구한 것이다. 

자신을 구했던 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마저 구해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먹먹해지는 가슴에 요한은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아직 흥분에 차 있던 기사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공자께서 구해낸 영애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곁을 지켰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일까요?”

“글쎄, 그건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이러다가 공자께서 그 영애랑 결혼이라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 그럴 수도 있겠군. 지금 공자께서 사귀는 사람은 없잖아?”

“그때, 그 영애의 이름이 분명…….”

루시아의 이름을 겨우 떠올리던 기사는 아는 체를 하려다가 그녀의 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순식간에 낯이 창백해졌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기사가 이름을 말해달라 했지만, 기사는 그 기사의 입을 틀어막으며 요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영애의 가족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으니 후환이 두려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요한은 생각에 잠겨있느라 두 사람이 제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기사들은 이대로 황실에 도착하고 나서도 요한이 이번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 * *

“아버지, 오셨어요?”

황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온 요한은 저를 반기는 루카스를 말없이 응시했다.

루카스는 최근에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루카스.”

급기야 요한이 제 이름을 부르자 루카스는 긴장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머릿속에서 적색 신호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요즘 너무 깐족거린 것이 근원인 것 같았다.

루카스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처럼 요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문이 닫히고 요한이 자리에 앉자, 루카스는 서둘러 먼저 선수를 쳤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요즘 건방……!”

“페네우스 공자, 말이다.”

“음?”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걸 깨닫고 상대방을 쳐다봤다. 

제 착각이었던 걸 깨달은 루카스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내게 왜 사과를 하니? 사고라도 친 거냐?”

“아,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갑자기 무게를 잡으시니까…….”

요한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대충 까닥였다. 루카스는 곧바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데려왔다.”

“……헤르윈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헤르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건가 싶어 루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생각했을 때는 페네우스 공자가 루시아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으냐?”

그러니 튀어나온 말은 제 예상과는 달랐다. 잠시 당황하던 루카스는 금세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음, 그렇죠. 걔만큼 루시아를 아껴줄 놈은 없을걸요?”

“하지만 한때 루시아의 고백을 거절했던 놈 아니냐. 지금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거라면 언제든 마음이 바뀌지 않겠어?”

“아버지께서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헤르윈이 그럴 놈은 아니에요.”

루카스가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라며 요한의 말을 일축했다.

“솔직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헤르윈이 왜 그간 루시아를 거절해왔는지는 모르지만 제 눈에는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마 헤르윈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동안 루시아를 거절했던 거겠죠.”

“……….”

“그리고 아버지. 루시아가 행복하다잖아요.”

요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루시아가 캐스퍼 후작이랑 만나고 있을 때, 잠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어요. 그때 루시아게 제게 그러더라고요.”

‘나는 비록 좋아하는 사람이랑 이어지지 못했지만, 오빠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

그 말은 즉,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뒤에 행복해지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저도 처음에는 헤르윈이 미웠어요. 한 번은 여기로 찾아온 그 녀석을 내쫓은 적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헤르윈의 진심을 아니까, 그 녀석이 루시아를 행복하게 해 줄 녀석이라는 걸 잘 아니까 인정해준 거예요.”

“……….”

요한이 낯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가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카스가 요한의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 이제 그만 받아주세요. 헤르윈이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요한은 눈을 감았다. 헤르윈과 함께 있을 때의 루시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베른과 만나던 시절, 애써 웃던 얼굴과는 달랐다. 

어떤 답을 내려야 할지 명백했다.

“……루시아와 헤르윈을 불러오거라.”

덤덤하게 내뱉는 어조에 루카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요한이 헤르윈을 페네우스 공자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혹시 그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루카스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 루시아!”

이 희소식을 당장 두 사람에게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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