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브라이언의 아버지, 체르시스 백작은 헤르윈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유분방한 브라이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한 번 마음 먹으면 그 의지를 잘 꺾지 않았다. 지금의 요한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헤르윈이 침을 꿀꺽 삼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그 눈빛은.”
“브라이언.”
“왜.”
“어떻게 하다가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았는지 그 비법을 알려줘.”
“뭐어?”
브라이언은 당연히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떨떠름했지만, 헤르윈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음, 별로 너한테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괜찮아! 그냥 요령이라도 알고 싶은 거니까!”
“그렇다면야…….”
결국 브라이언은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일단 크리스틴이 맞선을 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집에 가자마자 아버지를 만났어.”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라고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대화를 나눌까 말까 할 정도로 내외하던 사이였다.
게다가 브라이언이 먼저 말을 건넨 건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라 체르시스 백작 부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꼭 그 여인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늘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던 자식 놈이 진지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밝히니 체르시스 백작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브라이언은 침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과 크리스틴과 맞선을 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무래도 맞선이라는 것은 주로 가주의 주도하에 성사되는 것이니 말이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찬성하시는 건 아니었어. 크리스틴이 싫어서가 아니라 미리 생각해놓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만약 제가 크리스틴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바람대로 그 여성분과 맞선을 봤겠지요. 하지만, 아버지. 저는 이제 크리스틴이 아니면 싫습니다.’
브라이언은 확고했다. 한번 의지를 관철한 이상 그것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체르시스 백작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브라이언은 아예 못을 박았다.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단 한 번도 아버지께 부탁드린 적 없잖아요.’
아예 허리를 굽혀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자 체르시스 백작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냉혈한 아버지에게 뻔한 감정호소가 통할까 싶었지만, 다행히 넘어갔다.
‘……그래. 네가 나한테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구나.’
오히려 독기 빠진 듯한 목소리를 듣고 브라이언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브라이언은 어질고 무섭기만 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체르시스 백작은 묵묵히 브라이언의 말대로 디오레스 가문에 서신을 넣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그 이후의 일들은 네게 달려있다. 알고 있겠지?’
그의 말대로 이후의 일은 전부 브라이언의 몫이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어떻게든 크리스틴의 첫 번째 맞선 상대를 찾아가, 잘 구슬려서(?) 약속을 취소시켰고, 그다음에는 크리스틴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물론, 아직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이게 다야. 정말 별거 없지? 네게 도움이 될만한 건 없다고 했잖아.”
“……그렇네.”
얘기는 재밌긴 했지만, 요령이나 비법 같은 것을 찾기에는 어려웠다. 헤르윈이 다시 시들시들 거리자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가 정말 백작님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면 방법은 있어.”
“그게 뭔데?”
“진심.”
뻔하지만,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무작정 감정을 호소하라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루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결혼을 하고 싶은 건지 진심을 다해 백작님께 보여주면 돼.”
“……진심.”
헤르윈은 진심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다가 드디어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네 말이 맞다. 고마워.”
“이 정도야 뭘.”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이고 있을 때, 지척에서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루시아가 크리스틴의 손을 붙잡고 이곳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뒤로는 크리스틴이 어떻게든 이곳으로 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일단 얘기라도 나눠봐야 할 거 아니야.”
“하, 하지만 지금은 조금 이른 것 같… 아아아! 저 그냥 오늘은 갈게요! 제발 놔주세요!”
상황을 보니 루시아가 억지로 끌고 온 듯싶었다. 크리스틴이 아예 드러누울 기세로 주저앉자 힘이 부족한 루시아는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브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다 같이 얘기하기 힘들겠네. 내가 크리스틴 데려갈게. 오늘은 루시아랑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해.”
“그래, 알겠다. 힘내라. 난 너 응원하니까.”
무덤덤하지만 진심 가득한 말에 브라이언이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는 크리스틴과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크리스틴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브라이언이 더 빨랐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이 떠나고 만신창이가 된 루시아만이 돌아왔다.
“에휴.”
“고생 많았어.”
헤르윈은 하인에게 미리 부탁해둔 시원한 음료를 그녀에게 건넸다. 루시아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켜 마시며 한숨을 돌렸다.
“크리스틴도 참,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피하려고 하는 건지.”
“오호, 크리스틴도 마음이 있어?”
“내가 봤을 때는 그래. 방금 전에 화장실 갔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계속 브라이언 이름을 꺼내고, 은근슬쩍 나보고 브라이언 어떠냐고 떠보더라고.”
“그래? 너한테 둘이 맞선 봤다는 얘기는 안 했고?”
“했지. 들어보니까 맞선 봤던 날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더라. 그래도 착실히 데이트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 같던데.”
“이미 넘어갔네.”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갑자기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혼란스러운 거겠지. 저러다가 나중에 결혼한다고 찾아오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그러면 좋겠다! 둘이 잘 어울리는데.”
“게다가 크리스틴 아니면 브라이언을 휘어잡을 사람도 없고.”
두 사람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의 연애담을 즐길 뿐이었다.
“그래도 결혼은 우리가 제일 먼저 할 거야. 그건 누구한테도 뺏길 순 없어.”
그리고는 자극을 받았는지 헤르윈이 다시금 의지를 불태웠다. 그간 헤르윈의 노력을 지켜봐 온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팔을 꼭 껴안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거야. 아버지께서도 조금씩 마음을 여시는 것 같으니까.”
“정말? 요즘 내가 너무 자주 찾아가서 싫어하시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확실히 자주 찾아오긴 했지. 그래도 네가 갑자기 발길을 뚝 끊어버리면 언제 오나 은근슬쩍 신경 쓰실걸?”
딸인 루시아가 하는 말이니 신비성이 있었다. 희망을 얻은 헤르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을 보고 해실 웃는 루시아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헤르윈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볼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잠깐 움찔 떨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곧바로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달콤하고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끝나고 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진짜 안 되겠어.”
“뭐가?”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내 여자라는 걸 얼른 온 세상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데…….”
방금 전 입맞춤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헤르윈의 눈이 조금씩 욕망으로 깃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그의 이성의 끈이 끊길 것 같아 루시아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밖에 나가면 너를 보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불안해할 사람은 나지.”
헤르윈이 안심할 수 있게 한 말이었지만, 헤르윈 눈에는 도리어 그녀가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헤르윈이 참지 못하고 루시아를 옭아매며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루시아는 당황하면서도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루시아는 창문에 비친 퉁퉁 부은 입술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몬스터가 또 나타났다고?”
“네, 이번엔 오크보다는 낮은 등급의 몬스터인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수가 저번보다 많습니다.”
“크흠, 이것 참 골치 아프군. 겨우 몬스터 소동을 잠재웠는데 이번에 또…….”
황실에서 근무하던 요한은 새로운 골칫거리가 발생하자 골머리를 앓았다.
아직까지 인명피해는 없지만 사냥제처럼 일이 커지기 전에 소탕해야만 했다.
“마침 페네우스 공작님께서 수도로 내려와 계시니 자문을 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껄끄러운 상대를 봐야 한다는 말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장소로 이동했다.
지금은 일이 우선이었다.
수도 외벽에서 조금 동떨어진 숲에 도착했다. 마침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모인 병력들이 있었다.
“아그네스 백작님, 오셨습니까.”
“현재 상황은 어떻죠?”
“지금 병력도 다 모였고, 지휘관만 오면 바로 토벌에 들어갈 겁니다.”
“그렇군요. 지휘관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네, 지금 오고 계시다고…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말발굽 소리와 땅 울림을 느낀 요한은 기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말 위에 앉아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엔 하일이라 생각했던 요한은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을 보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지휘관을 맡게 된 헤르윈 페네우스 입니다.”
“페네우스 공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기사가 먼저 헤르윈에게 인사를 건네고 헤르윈도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헤르윈의 시선이 요한에게 돌아갔다.
헤르윈은 곧바로 싱긋 웃으며 요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르윈 페네우스 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사적으로 잘 아는 사이임에도 공적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헤르윈은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공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헤르윈의 모습은 처음이라 낯설기만 했다.
며칠 전에 집으로 찾아와, 제 눈에 들려고 안절부절못하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오면서 대략적인 상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자세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일단 이리로 오시면…….”
헤르윈은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몬스터의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는 고블린으로, 어린이보다 조금 큰 체형의 인간형 몬스터였다. 주로 무리를 이뤄 다니는 것이 특징이다.
헤르윈은 기사단에서 수집한 정보와 현장에 찍혀있는 발자국이나 자취들을 보며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다.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가 어느덧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해내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게다가 주변을 통솔하는 능력이나 뛰어난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제 나이대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주 북부로 올라가 몬스터 토벌을 도왔다고 했던가.’
루시아가 헤르윈의 얘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전해줄 때가 있었다.
아무리 검술의 귀재라고 해도 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본 헤르윈은 제 편견을 깰 정도로 훌륭했다.
요한은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기우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헤르윈을 관찰했다.
“그러면 일단 구역을 나누죠. 안 그래도 저희 가문에서 몬스터 토벌을 경험한 기사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우선 팀을 다섯으로 나누어서 주변을 포위하듯 진영을 펼치고…….”
상황파악을 끝낸 헤르윈은 속전속결로 파훼법을 제시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명령 덕에 기사들은 순식간에 팀을 짜고, 흩어졌다.
“그러면 저도 대열에 합류하겠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신호탄을 쏘아 올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기사단장마저 떠나고 현장엔 헤르윈과 몇몇 기사만이 남게 되었다. 어느새 썰렁해진 주위를 보던 요한은 주변에서 헤르윈에 대해 속닥거리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대단하시다. 나는 저 나이 때 어땠지?”
“게다가 이번에 소드 마스터까지 되셨다잖아. 가문 좋지, 얼굴 좋지, 실력 좋지. 이야 다 가지셨네.”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감히 질투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고. 이곳에 남은 사람들 모두가 헤르윈을 선망 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요한은 이제 인정해야 했다. 헤르윈은 다른 누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그동안 색안경만 끼고 그를 본 것만 같아 괜히 머쓱해졌다. 요한은 쭈뼛쭈뼛 헤르윈에게 다가갔다.
“아, 백작님.”
진지하게 지도를 살피던 헤르윈은 기척을 느끼자마자 부드럽게 웃었다.
요한은 문득 깨달았다. 헤르윈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웃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냉정한 헤르윈의 표정은 요한에게 있어 낯설기만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는 루시아를 볼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고는 했다. 늘 루시아와 함께 있는 모습만 보았기에, 그의 웃는 모습이 익숙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