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끄응…….”
머리가 미친 듯이 지끈거리고, 골이 웅웅 울렸다. 끙끙 신음을 내리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초췌한 낯으로 주위를 훑어봤다.
익숙한 제 방이었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언제 들어오긴, 언제 들어와요. 어제 아들내미한테 업혀서 들어온 거 기억 안 나요?”
마침 물을 가져온 줄리안이 혀를 차며 요한을 타박했다.
어제 하일과 얘기를 나눈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희미했다.
오랜만에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 것 같아 요한은 최대한 몸을 사렸다.
아무리 온화한 아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술에 취한 모습을 좋아하진 않으니까.
“자, 여기요.”
“크흠, 고맙소.”
괜히 민망해져 목을 가다듬은 요한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지끈거림이 조금이나마 가신 것 같았다.
“그나마 오늘이 주말이라 다행이네요. 얼른 나오세요. 당신만 식사하면 돼요.”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이 평일이었다면 정신을 못 차리거나 지각했을 것이 뻔했다.
요한은 묵묵히 줄리안의 잔소리를 들으며 침대를 벗어났다. 하루 종일 잔소리가 계속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홀로 늦은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아 넋을 놓았다. 아직도 숙취가 남아있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루카스가 다가왔다. 슬쩍 눈을 뜬 요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몸을 많이 못 가누시더니… 많이 드시긴 했나 보네요. 공작님이랑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신 거예요?”
“……비밀이다.”
“에이.”
루카스가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한편 요한은 어제 하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와 별다른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얘기했던 것 외에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또 있는지 물어봤었고. 그 외의 것은 없다고 대답하자 하일이 자신을 열심히 설득했을 뿐이다.
‘백작의 마음 다 이해합니다. 저도 루시아를 제 딸아이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주시오. 헤르윈도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청혼을 한 건 아닐 겁니다.’
‘그거 아십니까? 제가 여태까지 살면서 아들에게 부탁을 받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헤르윈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날아오더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루시아랑 결혼하고 싶다고. 만약 우리가 반대한다면 공작위를 물려받지 않겠다고도 말했습니다.’
‘헨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헤르윈은 차기 공작으로 내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르윈에게 있어 공작위는 평생을 생각해온 미래이자, 그의 목표나 다름없죠. 그걸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하일은 여러 말을 꺼내며 헤르윈의 진심과 그의 각오를 전해주었다.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신 것일지도 모른다.
괜히 헤르윈을 떠올려서는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요한은 눈앞을 가리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루시아는 지금 어딨니?”
“루시아요? 글쎄요, 아침부터 어딜 가던데.”
“……페네우스 공자를 만나러 간 건 아니겠지.”
“저야 모르죠. 그런데 아버지, 헤르윈을 꼭 페네우스 공자라고 불러야겠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셨다고…….”
아주 먼 옛날, 헤르윈과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 의탁했을 때부터 요한은 헤르윈을 이름으로 부르며 제 자식처럼 친근하게 대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루시아 일로 곧바로 칼같이 헤르윈이 아닌 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루카스가 이제 와서 내외하냐고 툴툴거리자 요한이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제야 루카스는 입술을 꾹 말았다.
“……시끄럽다. 부모랑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약혼한 놈의 말 따위 듣기 싫구나.”
“와, 쪼잔해. 제가 그건 사정이 있다고 말했잖아요.”
“흥, 난 들은 적 없다.”
유치하게 나오는 아버지를 보고 루카스는 기가 찼다. 순간 몇 달 전의 자신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싶어 루카스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그때, 아론이 루시아를 반기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와 요한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정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 왔어?”
“대체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갔다 온 게…….”
요한은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눈앞에 루시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160cm도 안 되는 작은 키가 자신의 눈높이보다 커져 있었다. 그 주인은 바로 헤르윈이었다.
예상치 못한 얼굴에 당황한 요한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헤르윈이 어색하게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백작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나요?”
“큼, 크흠…….”
요한이 헛기침을 하며 헤르윈을 못 본 척 지나쳤다. 헤르윈은 잠시 당황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헤르윈 옆에 있던 루시아가 요한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야 그녀를 발견한 요한은 몸을 흠칫 떨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의사가 전달됐다.
헤르윈 무시하지 마.
마치 어제는 잠자코 있었지만 오늘은 봐주지 않겠다는 눈빛 같았다.
괜히 양심에 찔린 요한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헤르윈 만나고 온 거였구나? 그런데 지금 온 걸 보니 데이트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루시아가 아침 일찍 찾아왔더라고요. 아버지께 숙취해소에 좋은 음식을 가져다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걸 가지고 왔어요.”
헤르윈이 가방 하나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루카스는 대수롭지 않게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순간 그가 숨을 들이켜 마셨다.
“흡-! 이, 이건…….”
“숙취가 좀 있으실 것 같아서 약을 좀 가져왔고요. 그 옆에 있는 건 ‘르부르 50년’입니다.”
제국을 넘어 세계에서 유명하다 정평이 나 있는 르부르 양주였다. 20년도 아니고 50년이라는 말에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내 그는 허겁지겁 루카스 손에 들린 것을 확인했다. 르부르 양주가 확실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웬만큼 비싸기도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블랙라벨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구한 거야? 아니, 아니 설마 이걸 선물로 갖고 온 거야?”
헤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다른 스케일에 루카스는 물론이고 요한의 입도 벌어졌다.
“가끔 제 앞으로 이런 선물들이 종종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저는 술을 잘 안 마시는 편이라 갖고 왔습니다. 한 번도 개봉하지 않은 거긴 한데 혹시 찜찜하시다면 꼭 말씀해주세요. 새로운 걸로 구해 드리겠습니다.”
“큼! 그럴 필요는 없다…….”
요한이 처음으로 헤르윈 말에 대답했다. 헤르윈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지만, 무작정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헤르윈은 애써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정돈했다.
“그런데 숙취가 있는 사람에게 술 선물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무리 좋은 선물을 받았다 해도, 무작정 넘어갈 생각은 없는지 요한이 꼬투리를 잡았다.
받고 좋아했으면서. 루시아가 옆에서 짜게 식은 눈으로 요한을 쳐다봤다.
헤르윈은 익히 예상했는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제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신 거라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과하게 드시지 않는다고요. 가끔 마셔주는 것이 몸에 좋다고도 하니 생각나실 때마다 드시면 좋을 것 같아 가지고 온 것뿐입니다.”
“……그렇군.”
요한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뚱해 보이는 아버지를 보고 루카스가 눈치를 봤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들린 르부르 양주를 가져왔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제가 마실게요.”
눈이 휘둥그레 커진 요한이 순식간에 양주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그것을 뒤로 숨겼다.
“크흠! 내가 언제 안 먹는다고 했지?”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며 요한이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양주를 들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계단 끝까지 올라간 아버지를 보고 루카스와 루시아가 키득거렸다.
“잘했다, 헤르윈. 아버지가 지금은 저리 시큰둥해 보이셔도, 엄청 좋아하시는 거야.”
“그래?”
“괜히 자존심 세우시는 것뿐이야. 그나마 통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응, 조금은 마음에 차셨으면 좋겠는데.”
“르부르 50년이면 마음을 바꾸고도 남지.”
루카스가 별걸 다 걱정한다며 킬킬 웃었다. 일단은 어제에 비해 요한의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같이 노력하자.”
작은 체구이지만 보기만 해도 든든하기만 했다. 헤르윈은 루시아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의 애정을 즐겼다.
* * *
그날을 시작으로 헤르윈은 요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제 것을 사는 김에 같이 샀다는 핑계로 종종 선물 공세를 했고, 눈도장을 찍기 위해 자주 아그네스 가에 드나들었다.
요한 외의 사람들은 헤르윈을 반겼기에 아그네스에 들어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온 가족이 헤르윈을 물심양면 도와주며 요한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점이 역효과였는지 초반에 양주로 흐트러졌던 그의 마음이 어느새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엊그제 아그네스에 방문했을 때, 또 왔냐는 질린 듯한 눈빛을 받았었다. 그때는 요한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나왔다.
“하아…….”
헤르윈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오늘은 몇 주 만에 친구들을 만난 날이었다.
아리스타와 에단은 바쁜 일이 있어 오지 못했고, 지금 당장 헤르윈 집에 온 것은 브라이언밖에 없었다.
하인에게 커피를 받아 든 브라이언은 테이블을 떡하니 차지한 검은 머리통을 슬그머니 밀며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전에 봤을 땐 실실 웃기만 하더니 오늘은 왜 그래? 몇 주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백작님께서 우리 결혼 반대하셨어.”
“쿨럭!”
기껏해야 루시아와 싸운 거라 생각한 브라이언이 헛기침을 했다. 순간 농담한 건가 싶었지만, 끝없이 우울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럼, 너희 헤어진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헤르윈이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하지만, 이내 햇볕 한 줌 받지 못한 식물처럼 힘없이 늘어졌다.
“백작님만 반대하시는 상황이라 백작님의 마음을 돌리면 돼. 그런데 그게…….”
“영 쉽지 않은 모양이네.”
“……응.”
헤르윈이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의 주위로 먹구름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하하, 그래서 말이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루시아였고, 다른 하나는-
“얘들아.”
“……….”
크리스틴이었다. 루시아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던 크리스틴이 브라이언을 보고 눈에 띄게 얼어붙었다. 어느덧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드러낸 크리스틴이 뒤로 주춤거렸다.
“루, 루시아! 저희 잠깐 화장실이라도 갔다 올까요?”
“응? 그래.”
영문을 모르는 루시아는 크리스틴에게 끌려갔다. 줄행랑치는 뒷모습을 보며 브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한테 고백이라도 한 모양이네.”
놀란 브라이언이 천천히 헤르윈을 쳐다봤다. 헤르윈은 여전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크리스틴이 너를 피하는 걸 보면 딱 견적 나오는데. 아, 혹시 크리스틴 맞선 상대가 바로 너였냐?”
족집게나 다름없는 추측이었다. 브라이언은 별다른 변명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에게도 제 마음을 말한 적 없는데 한 쌍의 커플에게 낱낱이 털리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 루시아가 말해줬어?”
“아니. 그런데 루시아는 알고 있었나 보네?”
“뭐, 어쩌다가. 맞아, 크리스틴 맞선 상대로 내가 나갔어.”
“흐음…….”
감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헤르윈은 무언가 떠올리고 도로 브라이언을 쳐다봤다.
“잠깐, 원래 크리스틴 맞선 상대가 따로 있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취소되고, 바로 네가 다음 상대라는 것은…….”
브라이언이 말없이 씩 웃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따로 손을 썼다는 것을. 헤르윈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너도 참 대단하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아니, 애초에 아버지께서 네가 크리스틴이랑 맞선 보는 걸 허락해주셨어?”
“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걸 보면 허락받은 거 아니겠어?”
브라이언이 여유로운 태도로 당연한 걸 묻는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