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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129)

<111화>

요한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얼굴이 굳은 공작 부부를 보고 줄리안이 당황하며 요한의 팔을 툭 쳤다.

“하하하… 여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나는 단 한 번도 이 결혼을 찬성한다고 말한 적 없소.”

“하지만…….”

줄리안이 입을 뻐끔거리며 무어라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아가 처음 헤르윈과 결혼한다고 폭탄 발언을 했을 때도, 페네우스 일가와 약속을 잡을 때도, 그리고 자신이 딸의 결혼이 기대된다 말할 때도 요한은 그 어떠한 긍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제야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줄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아버지!”

뒤늦게 반응한 루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요한을 다급하게 불렀다.

요한은 루시아를 스윽 보다가 하일과 스칼렛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까지 마련하셨는데 지금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루시아를 페네우스 공자와 결혼시킬 의향이 없습니다.”

헤르윈이 아닌 페네우스 공자라고 말한 것부터 그가 헤르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제 귀한 아들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얼굴을 굳히던 하일은 진지한 요한의 표정을 보고 겨우 입을 열었다.

“반대하시는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페네우스 가문이 저희에게 얼마나 과분한 가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공작님과 공작부인께서 저희 루시아를 예뻐하시는 것도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보다 더 나은 상대방을 찾을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왜 반대하시는 거죠?”

요한은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요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헤르윈을 쏘아봤다.

“저는 아직 페네우스 공자가 저희 루시아에게 했던 짓을 잊지 않았습니다.”

헤르윈이 움찔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억나십니까? 저희가 처음으로 공작성에 놀러 갔을 때, 루시아가 공자에게 고백을 했었지요. 한때 모두가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날로부터 루시아는 오랜 기간 공자를 사랑해왔습니다.”

루시아는 요한의 말에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등이 유독 굳건해 보였다.

“아카데미에서도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죠. 솔직히 말하면 제 딸이 어릴 적부터 공자를 짝사랑해왔다는 걸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딸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을 알게 되니 자연스레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더군요.”

헤르윈 얘기만 나오면 방긋방긋 웃으며 세상 행복해 보이던 루시아. 하지만, 아주 가끔은 헤르윈의 이름만 들어도 괴로워하던 그녀가 있었다.

요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루시아가 마냥 순수한 마음으로 헤르윈을 좋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시아는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부모의 눈엔 다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공자만을 사랑해왔다면 10년 넘게 혼자 속앓이를 해온 것이겠죠. 점점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고, 힘들어하는 딸을 마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침묵하며 요한의 말에 경청했다. 그만큼 무거운 주제였고, 딸을 생각하는 요한의 마음이 절절하게 보였다.

“그래서 맞선을 보라 제의한 겁니다. 하지만 도리어 루시아가 저희에게 제안 하나를 했죠.”

‘정말 마지막으로 헤르윈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때까지만…….’

루시아는 그때까지만 해도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내심 자신 또한 그녀가 사랑을 쟁취했으면 했다. 그러나, 결국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다.

“루시아가 슬퍼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괜히 희망을 준 저 자신을 숱하게 원망했습니다. 루시아의 말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했으면 그리 큰 상처는 받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루시아는 3일 내리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울음을 삼켰었다.

루시아의 방 앞을 몇 번이나 서성였는지 모른다. 그 후로 그녀가 다시 말끔해진 모습을 보였지만, 요한의 눈엔 그녀가 활기를 잃고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딸아이가 우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지금이야 이리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는 하지만, 공자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요한은 애초에 헤르윈을 신뢰하지 않았다. 

10년 넘게 루시아를 받아주지 않다가, 루시아가 약혼한다고 말하고 나서야 마음이 변했다는 게 알량하기 짝이 없다 생각했다.

무거운 적막이 휩싸였다.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요한만을 쳐다봤다. 

솔직히 이렇게 된 이상 온갖 질타를 받을 거라 생각했다. 자주 교류를 한다고 한들 결국 페네우스는 공작 가문이고 아그네스는 백작 가문이니까.

이 일로 페네우스 가문에서 아그네스 가문의 활동에 제재를 가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요한은 모든 불이익을 전부 감내하리라 다짐했다.

“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진작에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뒤늦게 말하여 죄송합니다. 이번 자리는 없던 걸로 하죠.”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루시아의 손을 잡아 그녀를 억지로 일으켰다.

루시아는 바르작거리며 당황했다.

“아, 아버지…….”

“가자.”

헤르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헤르윈은 입술을 달싹였다.

마음 같아선 루시아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리했다가는 요한의 마음을 돌릴 기회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헤르윈이 시선을 떨구자 요한은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요.”

하일이 입을 열었다. 요한은 내심 긴장하며 뒤를 돌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하일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래도 자세한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군요. 저와 단둘이 대화하는 건 어떻습니까.”

눈앞에서 아들이 대차게 거절당했는데도 하일은 침착했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은 주위를 훑어봤다.

모두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 그렇게 하죠.”

다행히 요한은 자리를 박차고 나서지 않았다. 요한과 하일이 식당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헤르윈이 자리에 주저앉으며 놀란 숨을 토해냈다.

“헤르윈.”

루시아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를 일으키자 파르르 떨리는 손이 보였다.

“루시아… 내가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나야말로 그런 말 듣게 해서 미안해. 설마 아버지께서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어.”

루시아는 헤르윈을 꼭 껴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헤르윈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겨우겨우 루시아의 등을 껴안았다.

요한이 했던 말이 이해가 됐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루시아가 힘들어했다는 사실이 못내 괴로웠다.

루시아가 자신을 받아줬을 때 마냥 기뻐한 저 자신이 한심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와 루카스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때 줄리안은 서둘러 스칼렛에게 다가갔다. 혹시라도 스칼렛의 감정이 상했을까 봐 해명하기 시작했다.

“저이가 아직 헤르윈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가 봐. 내가 꼭 설득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백작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다행히 스칼렛은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요한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전처럼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전에 네가 말했던 게 이런 거였구나?”

“……….”

줄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전, 그때만 해도 줄리안은 지금의 요한과 같은 마음이었다.

딸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던 줄리안의 말이 스칼렛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줄리안, 너도 백작님처럼 헤르윈이 밉니?”

“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네 진심을 듣고 싶어서 그래. 숨김없이 말해줘.”

서둘러 부정하던 줄리안은 진지한 스칼렛의 눈빛을 보고 머뭇거렸다.

지금은 루시아와 헤르윈의 결혼을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요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내 딸이 가장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야. 헤르윈이랑 결혼해서 행복해지겠다는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뭐 있겠어.”

줄리안의 말에 식당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쳐다봤다.

줄리안이 애써 웃으며 나란히 붙어있는 헤르윈과 루시아를 바라봤다. 두 사람에게서 어릴 적 꼬마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과거야 어떻든 헤르윈이 우리 루시아를 행복하게 해줄 거란 걸 잘 알고 있거든. 그렇지?”

헤르윈은 문득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이내 코끝이 빨개진 그는 감정을 추스르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더 이상 루시아에게 상처를 주는 짓은 안 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분위기가 풀리고 나서 요한과 하일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일단 대기하기로 했다.

줄리안과 스칼렛은 따로 자리를 옮겼고, 나머지 네 명은 응접실에 모여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것 참 골치 아프네. 아버지가 한번 마음먹은 일은 웬만해선 끝까지 밀고 나가시거든. 너 좀 고생해야 할 거다.”

“오빠,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루시아, 이럴 때일수록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너도 아버지 성격 잘 알잖아.”

“그건…….”

루카스의 말이 맞긴 했다. 요한은 한번 결단을 내리면 그것을 잘 바꾸지 않는 성정이었다.

“맞아, 누나. 다른 일도 아니고 결혼이 걸린 문제인데 대충 넘어갈 수는 없어. 어떻게 겨우겨우 승낙하신다고 해도 형이 백작님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 거야.”

헨리마저 말을 거들자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를 생각해주는 요한이 고맙기는 했지만, 결혼을 코앞에 두고 반대하는 것은 영 마땅찮았다.

그때, 계속 생각에 잠겨있던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정공법밖에 없겠네.”

“뭐, 생각한 거라도 있어?”

루카스의 말에 헤르윈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백작님의 말씀이 맞아. 난 백작님 이해해. 나 같아도 딸을 마음고생 시킨 놈이 사위로 들어온다고 하면 싫을 거야.”

본인에게 가차 없는 객관적인 평가였다. 루시아가 아니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헤르윈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그러니 내가 홧김에 결혼을 결정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드려야지.”

“나도 도울게!”

헤르윈이 너무나도 고마워, 루시아는 그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넌 안 돼.”

“안 돼, 루시아.”

하지만, 루카스와 헤르윈이 동시에 부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네가 나서면 역효과야. 그냥 가만히 앉아서 헤르윈이 하는 걸 지켜보기만 해.”

“형 말이 맞아. 네가 나선다면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난 비겁하게 네 뒤에 숨는다고 생각하실 거야.”

“하, 하지만…….”

헤르윈이 당황한 루시아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와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나만 믿어. 내가 꼭 결혼을 성사시킬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입술만 달싹이던 루시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윈이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토닥였다.

“다 끝났나 보다.”

그때, 귀를 쫑긋 세운 헨리가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으로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루카스, 와서 네 아버지 좀 부축하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얘기를 나누는 그 잠깐 사이에 술이라도 마신 건지 요한과 하일 모두 몸을 가누지 못했다.

루카스는 서둘러 요한을 힘겹게 부축하는 줄리안을 도왔다. 헨리도 그를 따라 스칼렛 대신 하일을 부축했다.

“아니, 이이는 대체 뭘 했길래 술을 이렇게 마신 거야?”

스칼렛이 혀를 차며 비틀거리는 하일을 쳐다봤다. 하일이 무뚝뚝한 얼굴로 자꾸만 피식 웃었다.

“이래서는 대화를 못 하겠네. 스칼렛, 우리는 이만 갈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래, 얼른 가. 아이고, 정신 좀 차려.”

두 부인이 각자의 남편을 챙겨서 멀어지자 하일이 입을 열었다.

“백작, 부디 잘 생각해보시게.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잖소!”

“그건 제가 알아서 결정할 일입니다!”

술 취한 것치고는 얌전했지만,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헤르윈은 하일을 헨리에게 맡기고 루시아의 뒤를 쫓아와, 요한이 마차에 오를 수 있게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루카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오르려던 요한이 헤르윈을 보고는 멈칫했다.

반쯤 풀린 눈이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어느새 헤르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네 녀석에게 내 딸은 절대 못 줘!”

그 말만 하고는 요한이 마차에 쏙 들어갔다. 줄리안이 요한의 등을 찰싹 때리며 무안하게 웃었다.

“미안하다, 헤르윈. 오늘 일은 잊고 나중에 또 보자꾸나. 알겠지?”

“그래, 헤르윈. 이번 말은 그냥 잊어도 될 것 같아.”

잠시 벙 쪄있던 헤르윈은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굳게 다짐한 듯 의지를 불태웠다.

“아닙니다. 제가 백작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헤르윈…….”

마지막으로 루시아를 태운 헤르윈이 마차 문을 닫고 손을 흔들었다.

아그네스 일가를 태운 마차가 떠나자 제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던 헤르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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