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29)

<109화>

친구들은 이 기세를 몰아, 언제부터 사귀게 된 건지, 누가 먼저 고백을 했는지 등. 에단에게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처음엔 부끄러워하던 에단은 이내 자랑스럽게 자신의 연애사를 설명했다.

“당연히 내가 먼저 고백했지. 고백했을 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에단의 얼굴에는 행복이 만연하게 피어있었다.

“사실, 사귄 지 며칠 안 됐지만, 나는 레이라 영애랑 결혼하고 싶어.”

“어머, 정말요?”

“그렇게 좋은 거야?”

“지금은 누구나 좋을 때야. 나중에 가서 콩깍지가 벗겨지면 어떡하려고.”

놀라는 반응 반, 현실적인 반응 반이었다. 확실히 바로 결혼 생각까지 하는 걸 보면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나도 처음엔 내가 너무 사리 분별을 못하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더라고. 그냥 레이라 영애를 보면 딱 느낌이 와. ‘아, 이 사람이랑 평생 같이 살아야겠다.’라고.”

“흐음, 그래?”

“헤르윈, 너도 그렇지 않아? 너희도 어떻게 보면 사귄 지 얼마 안 됐는데 결혼하는 거잖아.”

에단이 헤르윈을 지목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루시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헤르윈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 내 삶에 루시아가 없는 미래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

“헤, 헤르윈…….”

무척이나 기쁜 말이지만, 친구들 앞이라 부끄러웠다. 루시아가 볼을 붉히며 슬금슬금 멀어지려 하자 헤르윈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모두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크, 크흠! 어쨌든 지금 나도 헤르윈이랑 비슷한 심정이라서 하는 얘기야. 물론 레이라 영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확신이 들 때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결국은 지금의 애인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사랑에 눈에 먼 것처럼 보이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는 그가 부러웠다. 

루카스를 떠올린 아리스타가 씁쓸하게 웃으며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브라이언이 아리스타처럼 부러운 눈길로 에단을 쳐다봤다. 늘 장난스럽게 빛나던 금안이 가라앉으며 슬그머니 옆에 있는 크리스틴에게 향했다.

갑자기 적막에 휩싸이자 에단이 당황했다.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진 루시아와 헤르윈을 제외하고 아리스타와 브라이언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있었다.

괜히 눈만 데구루루 굴리던 에단은 크리스틴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러고 보니 크리스틴, 너도 최근에 맞선 본다고 하지 않았어? 맞선은 봤어?”

“저 말인가요? 아뇨, 아직 보지 못했어요.”

다행히 분위기가 풀리며 모두 크리스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맞선보기로 했던 상대가 갑자기 약속을 취소해서 새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응? 갑자기 취소됐다고?”

“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제대로 된 설명도 안 하고 취소한 걸 보면 만났어도 저랑 오래가지 못했을 거예요.”

퉁명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유 없이 맞선을 취소한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다음 상대가 근사한 사람이길 바라야죠. 저도 꼭 루시아처럼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베른을 지칭하자 순간적으로 헤르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라며 모두가 그녀를 응원했다.

크리스틴을 쳐다보던 루시아는 자연스레 그 옆에 있던 브라이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그는 상념에 잠긴 얼굴로 크리스틴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참, 루시아. 결혼식은 언제 올리기로 했어요? 식장은 잡았나요?”

그때, 크리스틴이 루시아에게 결혼에 대해 물었다. 순간적으로 브라이언과 눈이 마주친 루시아가 몸을 파드득 떨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 어?”

“아니, 아직 정한 건 없어.”

다행히도 당황한 루시아 대신 헤르윈이 답을 해주었다. 어깨를 꽉 잡은 따스한 손이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 같았다.

“우리끼리 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아서 조만간 가족끼리 모여서 얘기하기로 했어. 마침 아버지께서 어제 출발하셨다고 하니 이틀 뒤면 도착하실 거야.”

“그렇군요. 그럼 조만간 일정을 잡겠네요.”

“뭐, 그렇지. 처음엔 모두 놀라셔서 경황이 없으신 것 같았는데 다행히 잘 받아주시더라고. 이대로만 가면 무탈하게 넘어가겠지.”

그 외에도 친구들이 이번 결혼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그에 헤르윈은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던 도중 가만히 있던 브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모두 헤르윈의 얘기에 빠져 있어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루시아밖에 없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본 루시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렇게 친구들에게서 빠져나온 루시아는 브라이언이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다.

모퉁이를 돌자 그 앞에는 벽에 기댄 브라이언이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린 것 같은 모양새에 루시아가 화들짝 놀랐다.

“까, 깜짝이야!”

“왜 놀래. 네가 먼저 나를 쫓아왔으면서.”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왜 계속 쳐다봤던 거야?”

“티 많이 났어?”

“그건 아니지만, 내가 눈치가 좀 좋잖아.”

브라이언이 능글맞게 대답했지만, 루시아는 웃지 못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저 멀리 친구들이 얘기 나누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 크리스틴 좋아하지?”

잠깐 눈동자가 흔들리던 브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티가 많이 났나?”

루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에 보이더라고. 크리스틴한테 약혼하자고 장난치는 것도 그렇고, 맞선본다고 했을 때 얼굴을 굳혔던 것도 그렇고…….”

루시아의 말을 듣고 브라이언이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눈에 띄었을 줄이야.

“반응을 보니 좋아하는 게 맞구나?”

잠깐 멈칫한 브라이언은 이번에도 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참, 바보 같네. 만약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면 너도 의심을 거뒀으려나?”

“그건 아닐걸.”

“그래?”

웃던 것도 잠시 브라이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 적 없었기에 조금 망설여졌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확인만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브라이언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루시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오히려 브라이언은 용기를 얻었다.

“아니야, 말할래. 너라면 괜찮겠지.”

브라이언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시작은 막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지금의 친구들과 가까워지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사실 지금처럼 마음이 깊지는 않았어. 그냥 호감 정도?”

당시에는 그냥 호감에 그쳤었다. 그러나 크리스틴을 포함해, 아리스타와 루시아 등 친구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친구는 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저 스스로 세운 철칙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이 여자 저 여자 많이 만나고 다녔잖아. 사실은 아버지한테 반항하려고 시작한 거거든.”

어쩌면 자신을 봐달라는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늘 장남만 챙기고, 차남인 자신은 만일의 사고에 대비한 대체품 취급했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지더라.”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평소와 같이 지냈지만, 혼자 남을 때면 여지없이 우울감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삶의 의욕이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나를 형의 대체품으로만 보는 아버지한테 지쳐있었고, 내 얼굴만 보고 달려드는 여자들에게도 진저리가 났었어.”

그렇지만, 그 감정을 표출할 길이 없었다. 늘 제 감정을 밝은 표정으로 포장하여 감추기 바빴기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혼자만의 우울감에 빠져들 때 크리스틴이 처음으로 브라이언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요즘 괜찮은가요?’

‘응? 뭐가?’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을 장착하던 브라이언은 아무렇지 않게 크리스틴을 돌아봤다.

‘아니, 요즘 따라 기운이 없는 것 같아서요.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나요?’

그 말을 들은 브라이언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봐 준 적 없었다. 좋아한다며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그렇고, 매일 같이 붙어 지내는 친구들도 그렇고. 

유일하게 크리스틴만이 브라이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내가 힘들긴 뭐가 힘들다고 그래. 이렇게 쌩쌩한 사람이 힘든 일이 뭐가 있어.’

하지만, 브라이언은 힘들다는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혹시 몰라서 사 왔는데.’

크리스틴이 다행이라며 안도했지만, 목소리에는 어딘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초콜릿 상자가 들려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그것을 브라이언에게 주었다.

‘이왕 샀으니 드세요. 나중에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제게 언제라도 말씀하시고요. 알겠죠?’

크리스틴이 떠난 뒤로 브라이언은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그 초콜릿은 하나도 먹지 못했어. 내 마음을 들킨 게 조금 두렵기도 했고, 너무 아까웠거든. 뭐, 결국 상해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게 더 아쉬웠지만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벌써 4년 전 일이라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또한, 브라이언이 가족들 일로 힘들어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신기하게도 크리스틴이 그 말을 한 다음부터 조금씩 상태가 좋아지더라고. 아마 나도 모르는 새에 누구에게라도 걱정 받고 싶었던 모양이야. 그다음부터는 뭐… 크리스틴을 좋아하게 된 거지.”

별것 없는 얘기라며 브라이언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사실, 그냥 짝사랑만 하기로 했었어. 나 같은 녀석에게는 너무 과분한 여자니까. 그래서 크리스틴을 잊으려고 더 이 여자 저 여자 만난 것 같기도 해.”

이미 더러워질 때로 더러워진 자신에 비해 크리스틴은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하얀 순백에 때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 너희 둘을 쭉 지켜보고 나니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간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어.”

“그러면 크리스틴에게 고백한 거야?”

브라이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크리스틴이 좀 있으면 맞선 본다고 했잖아.”

루시아의 말을 듣고 브라이언의 입꼬리가 점차 위로 올라갔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래?”

브라이언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루시아는 숨까지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무언가 속삭인 브라이언은 점차 커지는 루시아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저, 정말?”

“응. 그러니 나중에 내가 직접 밝힐 때까지는 비밀이다?”

“당연하지! 당연하지! 헤르윈한테도 말 안 할게.”

어느덧 설렘 가득한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굴리던 루시아가 브라이언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빛냈다.

“꼭 잘됐으면 좋겠다.”

짐짓 놀라던 브라이언이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이 아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정말이고말고.”

“……크리스틴이 아깝지는 않아?”

“음,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네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거 잘 알고 있어. 너희 둘, 잘 어울려.”

귓불이 달아오른 브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고마워, 루시아. 덕분에 더 용기가 나네.”

“아니야,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서로 지금 있었던 일은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하며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비운 지 꽤 된 것 같아 두 사람은 서둘러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헤르윈이 루시아를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혹시 저 녀석이랑 무슨 일 있었어?”

“저 녀석이라니. 넌 친구를 그렇게 못 믿어?”

브라이언이 황당한 기색을 보여도 헤르윈은 여전히 루시아만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잠깐 대화만 나눈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우리 슬슬 가자.”

에단의 말대로 어느새 이곳에 온 지도 5시간이 훌쩍 넘었다. 슬슬 집에 가기 위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틴, 나중에 맞선 보고 나면 꼭 알려줘야 해. 알겠지?”

“네, 당연하죠. 나중에 또 봐요!”

그렇게 각자 인사를 하며 루시아는 마지막으로 브라이언과 눈을 마주치고는 헤르윈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움직이자 헤르윈이 물었다.

“브라이언은 좀 괜찮아?”

“응? 뭐가?”

갑자기 브라이언의 이름이 나오자 루시아는 긴장했다.

“뭐긴 뭐야. 그 녀석, 실연당하고 우울해하던 거 아니었어? 걔 크리스틴 좋아하잖아.”

상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루시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 읍!”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뒤늦게 막아봤지만, 이미 중요한 부분에 반응한 뒤였다.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그걸 왜 몰라. 저 녀석이랑 몇 년을 보고 지냈는데. 아카데미 2학년 때부터 크리스틴 좋아하지 않았나?”

루시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자신은 그가 크리스틴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는데 헤르윈은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그렇긴 하지만 브라이언은 자기가 크리스틴을 좋아하는 걸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그야 그렇겠지. 그 녀석이 내색을 안 했으니까. 나니까 알아차리는 거야. 지금도 나 빼고는 아무도 모를걸?”

헤르윈이 당연하다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헤르윈이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었다.

애인이자, 오랜 소꿉친구의 새로운 이면을 본 것 같아 루시아는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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