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29)

<108화>

“아레스,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아리스타였다. 서류를 들고 있던 그녀는 루카스를 보고 잠깐 멈칫했다.

아리스타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다가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아레스에게 다가갔다.

“뭔데?”

“이거 저번에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문서거든. 여기 이 부분을 잘 모르겠어.”

“어디 봐봐.”

아리스타는 간간이 아레스를 도와 가문의 업무를 조금씩 도맡고는 했다. 

그렇게 아레스와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며 업무를 보는 아리스타를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넋 놓고 쳐다봤다.

“이건 내가 나중에 직접 살펴봐야겠다. 내 책상에 올려놔.”

“알겠어. 또 시킬 건 없어?”

“음, 저번에 내가 부탁했던 건 좀 했어?”

“아직 처리 중이야. 급한 거면 오늘 중으로 넘겨줄까?”

“아니, 아직 기한 널널해. 그럼 이제 네가 할 건 없는 것 같은데… 루카스, 이번에 우리한테 들어온 일거리가 있나?”

“어? 어어, 아니 없어.”

“그렇다네.”

오랜만에 좀 쉬라며 아레스가 아리스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리스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루카스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흘긋 그를 훔쳐봤다.

그러자 딱-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벽안을 본 아리스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번에 베키 앞에서 연인행세를 한 후부터 루카스가 계속해서 자신을 피하고, 어쩌다 마주쳐도 어색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루카스와 단둘이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참, 황녀님께서 방문하신 것 같던데 알아?”

아리스타가 아레스를 이곳에서 내쫓기 위해 황녀를 들먹였다.

“우리 자기가 왔다고? 그럼 당장 가야지!”

거짓말에 보기 좋게 넘어간 아레스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깥으로 나섰다. 신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아리스타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루카스가 움찔 떨었다.

그에게 다가가려던 아리스타는 입을 꾹 다물며 머뭇거렸다.

“오라버니, 내가 불편해?”

“……어?”

루카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평소에 장난스럽기만 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저번에 오빠 허락도 없이 애인행세해서 그래?”

“뭐?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리스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루카스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아리스타의 낯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어두워졌다.

“그럼, 왜 날 피해?”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지만, 울상 짓는 아리스타의 표정을 보고 순간 루카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마차에 같이 탔을 때도 그래.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하더니 그다음부터 나만 보면 피했잖아.”

“그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목에 가시가 걸린 것마냥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어, 저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래도 일단 아리스타의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서 루카스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래.”

“……….”

고개를 푹 숙였던 아리스타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붉은 눈가를 들어 올렸다. 

마차에서 아리스타를 여자로 느꼈던 것처럼, 지금도 그녀가 여자로 다가왔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루카스가 순간 멈칫했지만, 평소에 했던 것처럼 조심스레 아리스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부디 제 손의 떨림이 그녀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요 며칠 이래저래 일이 많았잖아. 루시아 일도 그렇고, 내… 개인사도 그렇고.”

아리스타가 울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루카스는 어색하지 않게 그녀의 눈빛을 피하며 머리에 얹었던 손을 떼었다.

“이것저것 다 겹쳐서 힘들어서 그랬나 봐. 난 너 피한 적 없어.”

“……정말?”

“응, 정말이지. 내가 널 왜 피해!”

루카스가 고운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평소에 보던 장난기 많은 웃음이어서 아리스타는 의심을 거두었다.

“하긴, 요즘 일이 많았지…….”

무사히 넘어가자 루카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피하지 않는 거면 됐어.”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아리스타가 루카스를 흘겨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공격에 루카스의 심장이 순식간에 쿵쾅거렸다.

놀란 그대로 얼어붙어, 아리스타가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

쾅-!

“아리스타, 너 왜 거짓말했어! 안 왔잖아!”

아리스타에게 낚여 허탕을 친 아레스가 잔뜩 약이 오른 채 돌아왔다.

“아, 황녀님이 아니었던가?”

“아니었던가-? 너 이리 와. 나한테 한 대만 맞자.”

“때릴 수 있으면 때려보시던가.”

루카스를 가운데에 두고 아리스타와 아레스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루카스는 아리스타를 보호하며 아레스를 멀찍이 밀어냈다.

중간에 아레스가 자기보다 동생 편을 드는 거냐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루카스는 모른 척 아리스타를 보호했다.

남매싸움에 낄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아리스타에게 손을 뻗는 아레스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적당히 하라며 관전만 하던 루카스가 자신을 두둔하자 아리스타는 그간 쌓인 서운함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 하나가 조금씩 높이를 낮췄다. 

그 변화를 눈치채는 건 지금으로부터 조금 먼 이야기였다.

* * *

사냥제가 끝나고 어느덧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사냥제에서 큰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연대해 황실에 정식적으로 항의했고, 평민들 사이에는 수도에서 오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나마 북부가 몬스터의 남하를 막아주어 안심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불안감이 조성됐다.

덕분에 귀족과 평민 모두 흔들리기 시작하자 황실은 눈곱 뗄 새 없이 바쁜 일을 보내야만 했다.

한편, 사냥제나 오크에 대해 관심 없는 이들은 다른 소식에 집중했다.

바로 베른과 루시아의 파혼 소식이었다. 

약혼도 하지 않은 사이에서 헤어진 것이라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 후로 베른이 느닷없이 셀린느와 결혼한다고 밝혀 사교계가 들썩거렸다.

‘세상 남사스러워서 원,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고 하는 거죠?’

‘게다가 그 상대가 최근에 사망한 르마리오 자작의 전 부인이래요! 그 왜, 최근에 르마리오 자작가 쪽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잖아요.’

‘아! 자작의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부인이 도망간 일, 말이죠?’

‘네, 그거요. 혼인한 지 1년밖에 안 돼서 다른 절차 없이 혼인이 저절로 취소된 모양이에요.’

‘진짜 터무니없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편이 죽었는데 장례도 안 치르고…….’

‘뭐, 그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제인슨 영애가 팔려 가다시피 결혼을 한 거였으니.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었던 거겠죠.’

‘그런데 대체 캐스퍼 후작이랑은 어쩌다가 결혼하게 된 걸까요?’

‘뻔하죠. 저렇게 쫓기듯 결혼하는 거면 분명 사고라도 친 거예요.’

‘두 사람, 과거 연인 사이였다는 말도 있던데요?’

사냥제에 몰린 관심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선이 베른과 셀린느에게 쏠려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덕분에 각종 가십에서는 매번 ‘캐스퍼 후작과 제인슨 영애의 관계는?!’으로 시작되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가진 기사들을 앞다투어 내놓고는 했다.

베른이 앞서 말한 대로 정말 모든 관심과 화살을 혼자 맞는 꼴이었다. 

신문을 확인하며 루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너무 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나설까?”

“나서긴 왜 나서. 후작이 착실하게 약속을 지키고 있는데.”

루시아의 옆에 있던 헤르윈이 그녀의 손에 들린 신문을 뺏으며 가만히 있으라고 타일렀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다른 곳에서는 제인슨 영애가 혼전 임신으로 결혼하는 거라고 떠들고 있다고.”

“사람들이 이러는 거 한두 번이야? 이러다가 나중에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야.”

“하지만……!”

“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헤르윈은 루시아를 폭 안으며 그녀 입에 매운 닭꼬치를 넣어주었다. 입에 음식이 가득 차자 루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헤르윈이 괜히 가만히 있으라 말한 것은 아니었다. 베른과 루시아가 마지막 만남을 가지고 며칠 뒤, 헤르윈의 앞으로 베른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루시아가 이 일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잘 지켜봐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굳이 베른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지만, 베른이 우려했던 것처럼 루시아는 이 모든 상황에서 저 혼자만 쏙 빠진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으니까 후작이 연락하지 않은 걸 거야. 여기서 네가 나서면 여론은 더 나빠져.”

“으응…….”

루시아가 연신 우물거리며 우울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헤르윈은 루시아의 입에 묻은 소스를 손으로 닦았다.

본능적으로 제 손을 핥은 헤르윈은 혀를 톡 쏘는 매운맛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으앗! 매워!”

“헉! 많이 매워? 여기, 물, 물!”

루시아가 서둘러 물을 주자 헤르윈이 허겁지겁 받아마셨다.

만담 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찼다.

“대체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헤르윈은 누구냐.”

“분명 머리라도 다친 게 틀림없어. 저 냉혈하기 짝이 없던 인간이 저런 팔불출일 리가 없다고!”

“그래도 보기 좋네요. 루시아를 아끼는 게 보이잖아요.”

바로 친구들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친구들과 함께 다과회를 가지고 있었다.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2주 동안 벌써 4번이나 모일 정도로 그 빈도수가 잦았다.

물론, 자주 모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희 둘이서만 놀 거면 앞으로 우린 부르지도 마!”

바로 헤르윈이 루시아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려 다른 애들까지 끌어모은 것이다.

루시아가 사람들 시선을 조심해야 한다며 바깥에서 손도 못 잡게 하고, 집으로 자주 찾아오지 못하게 했기에 결국 헤르윈은 잔머리를 썼다.

그 효과는 탁월했다.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친구들 앞이라 스킨쉽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6명이 친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에 사람들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게다가 주로 모이는 곳이 친구들의 집 중 하나이기에 더더욱 금상첨화였다.

“얘들아, 내가 미안해…….”

괜히 민망해진 루시아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과를 해왔다. 유독 루시아에게 약한 친구들이 손을 내저었다.

“네가 사과할 게 뭐 있어. 사과는 저 낯짝 두꺼운 놈이 해야지.”

“맞아. 그리고 자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우리가 결혼하고 나면 지금처럼 자주 모이지 못할 테니까.”

아리스타의 말에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정을 꾸리고 나면 지금처럼 자주 모이지도 못할 거고, 본가가 수도가 아닌 사람들은 그곳으로 주거지를 옮길 가능성도 컸다.

당장 헤르윈만 해도 결혼하면 바로 북부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에단, 너 최근에 그 사람이랑 잘되고 있다며. 요즘은 어때?”

“아, 맞아요! 저번에 데이트 신청한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되셨나요?”

이야기 주제도 슬슬 연애사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연인인 루시아와 헤르윈을 제치고, 가장 먼저 연애할 것 같은 사람이 바로 에단이었다.

여름제에서 봤던 귀여운 외모의 여자랑 잘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단이 볼을 붉히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나…….”

에단이 뜸을 들이자 모두 잔뜩 긴장했다.

“레이라 영애랑 사귀기로 했어.”

모든 사람의 눈이 토끼처럼 휘둥그레 커졌다. 잠깐의 정적 끝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웬일이니! 웬일이니!”

“꺄아아악! 정말 축하드려요!”

“첫 연애네! 축하해!”

“다행이다, 원하는 사람이랑 이어져서.”

“축하한다.”

모두 하나둘 축하를 보내자 에단이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여자에게 관심도 없고, 연애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던 에단이 드디어 연애를 한다니, 경사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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