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29)

<107화>

“다행히, 그날 이후로 아직까지는 이렇다 하는 반응을 보이신 적 없습니다. 일단 셀린느를 내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죠.”

“부디 좋은 결과를 맞이하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베른의 이야기가 슬슬 마무리를 지어갈 때쯤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이번엔 베른이 루시아에게 물었다.

“루시아 네도 별일 없으시죠? 아무래도 저희가 갑작스레 파혼하게 되어 놀라신 건 아닐지 걱정이네요.”

“뭐, 놀라지 않으셨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워낙 헤르윈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계시기도 했고, 어머니는 도리어 조금 반기는 눈치시더라고요.”

“그래요? 그건 의외네요.”

“좀 이래저래 이해관계가 엮여있어요. 그리고 다행히도 페네우스 가문에서도 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셨고요.”

“무탈하게 넘어갔네요.”

“네, 맞아요. 조만간 저희랑 페네우스 가랑 모여서 정식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에요. 사실상 확정된 것이니 주로 일정에 대해 얘기하겠지만요.”

“그러면 식도 금방 올리시겠군요.”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헤르윈이 최대한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빨리 결혼하고 싶더라고요.”

“그 마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저희랑 똑같네요.”

눈이 마주치자 누구랄 것 없이 두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쳐다만 보다가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행복하신가요?”

베른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 괴로운 일은 없으신 거죠?”

“네,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닫힌 문을 흘긋 쳐다보던 베른이 행복한 웃음을 보였다.

“셀린느와 함께 헤쳐 나갈 거예요.”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던 과거에 비해 훨씬 나은 답변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함께해줘서 감사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시아가 제 약혼녀라 좋았습니다.”

한 줌의 가식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편안한 미소를 지어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무리도 지었겠다.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 참. 저희 파혼 말입니다.”

문을 나서기 직전, 베른이 갑자기 돌아섰다.

“제가 먼저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혼자 책임을 지시겠다는 건가요?”

“네, 파혼 뒤에 바로 결혼 소식을 알리기도 할 건데 아무래도 사람들 이목이 모일 수밖에 없잖아요?”

가십을 좋아하는 치들이 환장할 만한 스토리이긴 했다. 이 소식이 사교계에 퍼지면 온갖 흉을 보며 두 사람을 물고 뜯는 사람들이 있을 터.

그런데 베른은 그 모든 일들을 오로지 혼자서 감내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합의 하에 헤어진 건데 베른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할 수는…….”

“아니요. 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이미 셀린느와도 얘기 끝났어요. 사실 저보다 셀린느가 먼지 꺼낸 얘기입니다.”

“제인슨 영애가요?”

“네. 그간 루시아에게 진 빚이 너무 많다며, 이것으로라도 은혜를 갚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세요. 나중에 소문이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결혼 발표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모든 화살을 받아낼 테니까요.”

베른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오히려 베른은 그것이 더 편한 모양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 나중에 저희 결혼식에 오실 거죠?”

약혼 직전까지 갔던 남자의 결혼식에 가는 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이지만, 앞으로 나돌 소문들을 생각하면 파혼하고 나서도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다.

루시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요, 청첩장이 나오면 꼭 제게 먼저 보내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루시아에게 첫 번째로 보내드리지요.”

화기애애한 말을 끝으로 문을 열었다. 카페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문가 바로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는 셀린느와 헤르윈이 있었다.

“헤르윈, 이제 우리 가… 너, 지금 뭐 해?”

헤르윈에게 다가가던 것도 잠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루시아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건 옆에 있던 베른도 마찬가지였다.

헤르윈과 셀린느가 서로를 노려보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 모습이 몇 년 지기 친구처럼 보였다.

“아! 루시아!”

으르렁거리던 헤르윈이 루시아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루시아를 베른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셀린느가 혀를 찼다.

“쯧쯧, 그렇게 감정을 훤히 드러내셔야겠어요? 어른답지 못하시네요.”

“흥, 그런 것치곤 당신도 후작의 팔을 꼭 붙잡고 있지 않나?”

헤르윈에게 지적할 바가 되지 못하게 셀린느 역시 베른에게 찰싹 붙어, 은근슬쩍 그가 자신의 것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한편 연인들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루시아와 베른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정말, 지금 뭐 하는 거야, 헤르윈.”

“셀린느, 오늘따라 응석이 심하네.”

두 사람은 그저 허허 웃으며 응석받이 애인을 어르고 달랠 뿐이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루시아와 베른은 동병상련의 처지를 느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얘기 재밌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행복하길 바랄게요.”

더 이상의 인사는 필요 없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베른과 루시아는 이제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고, 각자의 애인을 바라봤다.

베른은 셀린느를, 루시아는 헤르윈을 데리고 카페를 나섰다.

카페에서 나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베른을 보며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속삭였다.

“후작이랑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 것뿐이야.”

“그런 거라면 굳이 만나지 않고, 편지로 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여전히 베른과 만난 게 못마땅했는지 헤르윈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별다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 맞아. 베른이 혼자 사람들에게 파혼 소식을 알리기로 했어. 아무래도 사람들 시선이 있을 테니 자기가 감내하겠다고 하더라. 파혼 소식 뒤에 곧바로 결혼을 발표할 예정이니 알고 있으래.”

“흐응, 그래? 그거 하난 마음에 드네. 당연히 그래야지. 그 사람이 널 두고 무슨 짓을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베른과 별반 다를 건 없는데…….”

“아니야. 너는 후작이랑 달라.”

아무래도 연인이 되고 나서 헤르윈이 콩깍지가 단단히 든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헤르윈의 팔에 올라가 있던 제 손을 쏙 뺐다.

헤르윈이 어리둥절해하며 멈추자 루시아가 씩 웃었다.

“그런고로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밖에서 스킨십은 일절 금지야.”

헤르윈의 얼굴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그가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 파혼 소식이 전해지면 자연스레 나한테도 시선이 쏠릴 텐데. 우리가 붙어있는 걸 보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 봐, 오늘 카페에 들어설 때만 해도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수군거렸잖아.”

“그건……!”

“사람들 없을 때는 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으니까 조금만 참아. 아, 물론 우리 집에 자주 와서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사람들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고 루시아가 주절주절 이유를 덧붙였지만, 헤르윈은 절망스럽기만 했다.

드디어 사귀게 되었는데 왜 제 사랑스러운 연인을 만지지도 못하고, 찾아가지도 못한단 말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헤르윈의 표정을 보고 루시아는 웃음을 삼켰다. 

헤르윈이 원래 이렇게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에 그와 사귀게 되면서 여러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귀여워 보인다는 건 나중에 말해야지.’

처음으로 헤르윈보다 우위에 선 지금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루시아가 코를 흥얼거리며 먼저 앞서갔다. 헤르윈이 그 뒤를 터덜터덜 따라왔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루시아는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피했다.

연인이 되고 나서 첫 데이트였지만, 루시아만 행복하고 헤르윈에게는 우울한 하루였다.

* * *

쾅!

“루, 루카스! 너 그 소식 들었어?”

여느 때처럼 업무를 보던 루카스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헐레벌떡 들어오는 아레스를 보고 퍼뜩 정신 차렸다.

반응을 하기도 전에 아레스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것 봐봐! 캐스퍼 후작이 결혼한대!”

아레스가 건넨 것은 한 신문이었다. 주로 가십과 스캔들을 다루는 출판사였다. 

아레스가 가리키는 쪽을 보자 그곳에는 캐스퍼 후작이 루시아와 헤어지고, 몇 달 전만 해도 르마리오 자작부인이었던 셀린느와 결혼을 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미 베른으로부터 모든 얘기를 들었던 루카스에겐 전혀 감응이 없었다.

“뭐야, 별것도 아니구만.”

“이게 별일이 아니라고? 동생 일이라면 회까닥 도는 녀석이 웬일이야? 너 솔직히 말해! 루카스 아니지?!”

아레스는 도무지 덤덤한 루카스의 반응이 믿기질 않았다. 급기야 루카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루카스가 아레스의 손을 떨쳐냈다.

“왜 이래. 난 정상이거든?”

“지금 네 꼴이 어떻게 정상이야! 전에 루시아가 캐스퍼 후작이랑 약혼한다고 했을 때는 며칠이고 업무에 집중도 못 했으면서!”

길길이 날뛰는 친구를 보고 루카스는 무언가 떠올렸다.

“아, 내가 너한테는 말한 적 없던가?”

“뭐가.”

“루시아, 캐스퍼 후작이랑 헤어진 지 꽤 됐어. 그리고 루시아도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기로 했고.”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레스가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놀란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보네.”

뒤늦게 미안하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루카스를 보자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레스는 대체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신문에 있는 내용을 보면 동생 바보인 제 친구가 충격을 받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괘씸한 놈.”

미안하다고 하면 다인가? 그런 일이 있었으면 바로 얘기했어야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아, 그래도 루시아가 상처받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 헤르윈이랑 결혼 축하한다고 전해줘.”

“뭐야, 헤르윈이랑 결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야 루시아가 결혼한다며.”

“응.”

“다른 사람이랑 만날 새도 없이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으니 상대방은 당연히 헤르윈밖에 없지 않아?”

“그건…….”

“게다가 요즘 아리스타가 헤르윈 아주 꼴 보기 싫다고 흉보더라고. 간간이 루시아 이름도 같이 나온 걸 듣고 헤르윈이 루시아를 좋아하나 했지.”

아리스타 이름이 나오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하지만, 아레스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쩐지 네가 요즘따라 넋을 놓는다 했더니 루시아가 걱정돼서 그랬구나?”

“내가… 넋을 놓고 다녔어?”

“며칠 됐잖아. 이름도 몇 번이나 불러야 반응하고, 중간에 업무하다 말고 창밖이나 보고 있고. 난 네가 실연의 아픔 때문에 그런 줄 알았지.”

“아, 아하하 맞아…….”

처음엔 떨떠름해 하던 루카스는 퍼뜩 정신 차리며 대충 맞장구쳐줬다.

생각해보니 베키와 헤어졌었다. 처음으로 약혼을 약속했던 연인이 눈앞에서 바람피우는 것을 목격하고 헤어진 거였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스타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며칠 전, 리디아 자택까지 데려다주던 억겁 같은 시간 동안 봤던 아리스타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애써 떨쳐내려 해도 어느 순간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카스는 아레스 몰래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볼을 붉혔다.

‘나 왜 이러지?’

계속 가슴이 뛰어 기분 좋은 울림이 울려 퍼졌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기 전에 누군가가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