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29)

<106화>

화창한 날씨, 테일러 카페 앞에 마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마차에서 루시아와 헤르윈이 나란히 내렸다. 근처를 거닐던 귀족들이 척 보기에도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따가워지자 루시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오는 거였는데.”

“지금 날 두고 후작이랑 단둘이서 만나겠다고?”

“그냥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뿐이잖아. 베른도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불안할 게 뭐 있어.”

“그래도 안 돼. 그 사람만큼은 절대 안 돼.”

헤르윈은 여전히 고집불통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베른 얘기만 나오면 시종일관 같은 태도였다. 

결국 헤르윈을 떼어내는 데 실패한 루시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카페에 들어섰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잡아주던 헤르윈은 뒤를 돌아 자신들을 쳐다보는 이들을 스산한 눈빛으로 훑어봤다.

그러자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홱 돌렸다. 소드 마스터에 다다른 이의 기백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한창 사람이 많을 때라 카페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빼곡했다. 

루시아는 베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그네스 영애, 이쪽입니다.”

그때, 베른이 아닌 여성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셀린느가 보였다.

“제인슨 영애.”

루시아는 반갑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베른이 따로 방을 잡아놨어요. 저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셀린느와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혼자 룸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루시아는 의아해하고, 헤르윈의 눈빛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주위에 사람이 많잖아요. 다른 사람 눈치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영애는 왜 이곳에…….”

왜 베른과 함께 있지 않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셀린느가 싱긋 웃었다.

“두 분끼리 따로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요. 어제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셀린느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곤 루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영애. 영애 덕분에 이리 베른과 이어질 수 있게 됐어요. 감사하단 말 외에 도저히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네요.”

“이러지 마세요. 그리 감사받을만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요, 백 번 감사 인사를 드려도 모자랄 정도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어느덧 셀린느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처음엔 어쩔 줄 모르던 루시아가 설풋 웃으며 셀린느를 일으켰다.

“자, 어서 가 보세요, 베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헤르윈을 쳐다봤다. 

“나도 같이…….”

“페네우스 공자 맞으시죠? 저와 같이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요.”

헤르윈이 루시아를 따라가려 하자 셀린느가 그를 저지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붙잡자 헤르윈은 얼떨떨했다.

대개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헤르윈의 기백에 눌려 말 한 번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헤르윈이 잠시 당황한 사이 셀린느가 루시아에게 눈짓했다. 루시아는 슬그머니 헤르윈의 눈치를 보며 베른이 있다던 방으로 들어갔다.

결국 헤르윈은 루시아를 따라갈 타이밍을 놓쳤다.

멍하니 루시아가 들어간 방을 보던 헤르윈이 탐탁잖은 눈으로 셀린느를 쳐다봤다. 셀린느는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왜 방해하신 겁니까.”

“방해라뇨. 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도저히 셀린느를 다른 사람에게 대하듯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루시아와 이뤄지게 해 준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헤르윈은 셀린느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이라도 하시겠어요?”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습니까?”

메뉴판을 건네주던 셀린느가 멈칫하며 헤르윈을 쳐다봤다. 헤르윈이 고고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셀린느를 쳐다봤다.

순간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서로 같은 위치에 놓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불안한가 보죠?”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그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은 불안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냐는 거죠?”

헤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제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뒤늦게 입을 열었다.

“베른을 믿는 것뿐이에요. 그가 선택한 건 결국 저니까요. 많은 고민과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저를 선택한 거라면 저도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헤르윈은 조용히 루시아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당신 말이 맞군요.”

“그렇죠?”

“하아, 그래도 둘이 있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하하하!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이 좁으시네요.”

훅 들어온 공격에 헤르윈이 어깨를 좁혔다. 그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셀린느를 쏘아봤다. 그때, 무언가 떠올렸는지 헤르윈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저번에 만났었죠?”

“네? 저랑요?”

“기억 안 나십니까? 저번에 저랑 부딪쳤었는데.”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지 셀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리스틴… 아니, 디오레스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마주쳤잖습니까.”

“어…. 아! 그때!”

셀린느는 베른과 루시아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도망쳤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도망치다 어떤 남자랑 부딪쳤었다.

“그때 그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셀린느가 신기하다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땐 그리 엇갈렸던 사람들이 돌고 돌아 결국 각자의 사람을 찾아간 게 참 신기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네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순식간에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누구랄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때, 셀린느가 끼고 있는 반지가 헤르윈의 눈에 들어왔다.

“후작이 준 반지입니까?”

끼고 있는 위치가 딱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네, 맞아요. 정확히는 한때 베른이 제게 청혼했을 때 줬던 반지입니다.”

이 반지를 끼고 결혼식을 올릴 줄 알았지만 결국에는 그와 헤어지고 르마리오 자작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베른이 새로 하나 맞춰주겠다고는 했는데 제게는 의미가 큰 반지에요.”

셀린느가 소중하게 왼손을 감싸 안았다. 

“조만간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정확하게 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뭐 어때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맞기만 하면 되는 거죠.”

셀린느가 소녀처럼 웃어 보이자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을 백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그쪽도 결혼할 생각이죠?”

헤르윈이 팔짱을 끼며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죠.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결혼식을 치를 예정입니다.”

오만하다기보다는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던 셀린느가 말했다.

“아, 저희 결혼식에 초대해드릴까요?”

“아뇨, 그건 사양하죠.”

1초도 안 되는 새에 정색하는 헤르윈을 보고 셀린느는 어쩐지 그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분위기가 한층 풀어진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루시아와 베른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각자 연인에 대한 자랑이 대화의 8할을 이루었다.

* * *

한편,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온 루시아는 자신을 반기는 베른을 볼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베른, 잘 지냈어요?”

“저야 잘 지냈죠. 루시아는 괜찮으세요? 아무래도 그날 일이 일인지라 계속 걱정했답니다.”

“어머, 그러다가는 제인슨 영애께서 질투하셨을 텐데요.”

“걱정 마세요. 같이 걱정했으니까요. 오히려 자기 탓인 것 같다고 셀린느가 더 걱정했어요.”

온전히 사고로 일어난 일이라 셀린느의 탓이랄 것도 없는데 몇 번 상대해본 그녀의 성격을 떠올리니 확실히 스스로를 탓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평소처럼 편안했다. 

“인사가 너무 늦었군요. 제 독단이나 다름없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른마저 그럴 거예요? 안 그래도 밖에서 제인슨 영애한테 감사하다는 말은 열 번 넘게 들었어요.”

“그만큼 감사하니까 그런 거죠. 솔직히 저와 셀린느의 일이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아마 저희 파혼 소식 이후로 제가 셀린느와 결혼한다고 하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저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연하고 당당한 모습에 잠깐 말을 잃은 베른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맞는 말이에요. 이제 저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서 바로 결혼하실 생각이신가 봐요?”

“네, 최대한 서두르려고 합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끝에 드디어 결혼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지금 셀린느가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서 더 서두르는 것도 없잖아 있어요.”

“어머, 머물 곳이 없다뇨.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있기야 하지만… 아시잖아요. 가족이라고 해도 셀린느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들뿐이라는 거. 아무래도 르마리오 자작이 사망한 그다음 날부터 자작가에서 나와, 여관에서 지낸 모양이에요.”

르마리오 자작이 죽은 이후 벌써 몇 달은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의지할 곳 없이 여관을 전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루시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경악하자 베른이 공감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설마 그렇게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마 갖고 있던 예물과 보석들을 팔아서 생활한 모양이에요.”

“지금은 어디에서 지내고 계세요?”

“일단 저희 집으로 들였습니다. 앞으로 함께할 테니 굳이 다른 집을 구할 필요도 없죠.”

루시아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렸다.

“그… 혹시, 이번 일, 부인께 말씀드렸나요?”

분명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계기는 부모님의 반대라고 들었었다. 후작이 사망했다고 해도 부인은 정정했다.

루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베른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냥제가 끝나는 즉시 셀린느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가 전부 설명했습니까.”

“그렇다면 두 분을 찬성하신…….”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어머니께서 절대 허락할 수 없다며 반대하셨죠.”

루시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베른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지금, 뭐라 했니?’

‘들으신 그대로예요. 루시아와 헤어졌고, 셀린느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베른은 셀린느의 손을 단단히 쥐며 제 어머니, 티아나에게 모든 사실을 고했다. 티아나는 믿기지 않다는 듯 비틀거리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어머님, 괜찮으신…….’

놀란 셀린느가 다가가려 하자 티아나가 짝- 소리가 나도록 매몰차게 셀린느를 뿌리쳤다.

‘어머니는 누가 어머니야! 너 같은 걸 내 며느리로 둔 적 없다! 아니, 절대 인정 못해!’

익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셀린느와 헤어졌던 때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자 베른은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셀린느, 괜찮아?’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어느새 티아나에게 맞은 손등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셀린느의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베른이 그녀를 자신의 뒤에 숨기며 티아나에게 선전포고했다.

‘인정 안 하셔도 됩니다. 딱히 어머니의 허락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니니까요.’

‘뭐야?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저는 셀린느와 결혼할 겁니다. 어머니께 허락받을 나이는 이미 훌쩍 지났고, 더 이상 저희를 가로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어머니께서 계속 저희를 반대하시고, 셀린느에게 무례하게 구신다면…….’

베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 어머니를 쏘아봤다.

‘다시는 셀린느에게 접근하시지 못하도록 후작령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야말로 티아나를 완전히 내치겠다는 말이었다. 티아나가 뒷목을 잡으며 길길이 날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래, 어디 한번 할 수 있으면 해보거라! 내 너희 둘이 결혼하도록 가만두고 볼 것 같니?!’

베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간 부모님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1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했다.

그때, 셀린느가 베른의 팔을 붙잡았다.

‘베른, 그러면 안 돼. 어머니시잖아. 어머니께서도 받아들일 시간이 있어야지.’

셀린느는 베른을 토닥이며 그의 뒤가 아닌 옆에 나란히 서서, 티아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예전에 벌벌 떨며 눈도 못 맞추던 시절과는 확연히 달랐다.

‘부인께서 저를 탐탁잖게 여기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베른에게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요.’

‘셀린느……!’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베른을 사랑합니다, 부인. 베른의 옆에 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전혀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를 내뱉는 셀린느를 본 티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셀린느는 어느새 한 발짝 앞으로 나와, 티아나 앞에 섰다. 티아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떨며 그녀를 경계했다.

‘저를 인정하실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부디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셀린느가 무릎을 꿇어, 소파에 앉은 티아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따스한 성격은 물론 베른에게 향한 애정이 그녀의 녹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결국 티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셀린느를 지나쳐 그곳을 벗어났다.

홧김에 자리를 피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베른은 잘 알았다. 난공불락 같은 티아나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