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29)

<103화>

3일간 이어졌어야 할 여름제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사냥제에서 2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황실 측에선 연례행사인 만큼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싶어 했지만, 사망자 가족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반발하여 끝내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여름제가 갑자기 없어지자 시간이 붕 떠 버렸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기도 전에 루시아에게 온갖 편지가 쏟아졌다. 

괜찮냐는 걱정과 안부 인사가 주를 이루었지만, 개중에는 헤르윈과의 심상찮은 기류를 읽어낸 몇몇이 그와 무슨 사이냐며 은근슬쩍 떠보는 것도 있었다.

하나하나 살피고 답장을 하려던 루시아는 옆에서 성을 내는 줄리안 덕에 귀찮은 일을 처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줄리안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만들겠다며 이를 갈았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

‘나랑 헤르윈 소식이 알려지면 또 난리가 나겠지만.’

베른과 결별하고 헤르윈과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은 가족 외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물론 사건이 벌어지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알리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여름제도 흐지부지 끝나고, 베른과 준비했던 약혼도 한순간에 마무리되어 빽빽했던 스케줄이 텅 비어버렸다.

덕분에 루시아는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1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사정없이 밀려든 편지를 정리하고 이젠 좀 쉬나 싶었더니 손님이 찾아왔다. 루시아는 아론의 말에 따라 손님을 모셨다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을 열자마자 곧바로 향기로운 냄새와 부드러운 촉감이 루시아를 덮쳤다.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익숙한 목소리에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틴?”

“흑, 루, 루시아……!”

크리스틴이 세상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손님이 왔다는 얘기만 듣고 정작 누가 온 건진 몰랐던 루시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단 크리스틴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기에 그녀를 토닥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 어제 루시아가… 루시아가……!”

토닥일수록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끝내 그녀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자 누군가가 크리스틴을 루시아에게서 떼어냈다.

“브라이언!”

“어제 네가 오크한테 끌려간 걸 보고 하루 종일 불안해했어. 크게 다친 곳은 없다고 듣기는 했는데 도저히 진정이 안 되는 모양이야.”

그제야 루시아의 눈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크리스틴과 브라이언뿐만 아니라 응접실에는 아리스타와 에단도 있었다.

그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편지 중에 친구들 편지가 하나도 없어서 의아하던 찰나였다.

자신을 보러왔다는 사실에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모두 나 걱정 되서 온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오크한테 잡혔었단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한바탕 오크로 난리가 났을 때 사냥 중이었던 에단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며 떠들어댔고.

“때마침 헤르윈이 나타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나도 오러를 쓸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브라이언은 현장에 있었는지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과했으며.

“저,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루시아가 주, 죽는 줄 알고…….”

크리스틴은 루시아의 팔을 붙잡고 다시금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친구들의 걱정을 한 아름 받은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웃던 루시아는 문득 아리스타가 유독 조용한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아리스타의 표정이 다른 이들보다 심각했다.

“아리스타?”

“……미안해, 루시아.”

돌연 아리스타가 사과를 해왔다. 허리까지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 루시아는 당황하며 서둘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소드 익스퍼트나 되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미안해.”

루시아가 오크에 의해 숲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아리스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것이라곤 고작 오크의 주의를 끈 것뿐. 아리스타는 무력한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고, 혐오감까지 들었다.

아리스타가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자 루시아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아리스타는 흠칫 떨다가 눈을 좁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

“네 덕분에 살 수 있었어. 솔직히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여기에 없었을 거야.”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리스타가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고, 가만히 있으라 말해 준 게 큰 도움이 됐었다.

덕분에 패닉에서 빠져나와, 오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따스하게 위로하는 푸른 벽안을 보고 아리스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며 옅은 금발 사이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루시아가 픽 웃으며 아리스타를 껴안았다. 옆에 같이 있던 크리스틴은 덤이었다.

제 일처럼 생각하고, 화를 내고, 공감해주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한차례 눈물파티 뒤에 좀 진정이 됐는지 훌쩍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던 게 조금 창피했는지 아리스타가 볼을 붉혔고, 크리스틴은 안 그래도 실눈인 눈이 더욱 퉁퉁 불어 금붕어처럼 변해 있었다.

브라이언이 그런 크리스틴을 놀리며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모두 고마워. 사실 너희들만 편지를 보내지 않아서 조금 섭섭했거든.”

“섭섭해도 편지보단 이렇게 얼굴 보는 게 좋지?”

“당연하지!”

루시아가 말간 웃음을 터트리자 모두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얼굴 보니까 한시름 걱정이 놓인다. 내색은 안 했지만, 엄청 불안했어.”

“맞아, 무사히 구출됐다고 해도 트라우마가 남을 수 있는 일이잖아.”

“괜찮…다고 하기엔 아직도 좀 심장이 벌렁거리기는 해.”

애써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려던 루시아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네 쌍의 눈에 두 손을 들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오크가 나오는 악몽을 꿔서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안 그래?”

친구들은 안타까운 눈으로 조용히 루시아를 위로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이상 어제의 일을 언급하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화제를 바꾸며 얘기를 나눴다.

“아, 맞아요. 저 맞선 보기로 했어요.”

그때, 크리스틴이 들뜬 목소리로 희소식을 알렸다. 약혼하고 싶다고 말한 게 불과 이틀 전인데 벌써 선을 본다니.

“벌써? 너 약혼하고 싶다고 말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됐잖아.”

에단도 그리 느꼈는지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다.

“말은 그때 처음 했지만, 사실 전부터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다가 오늘 딱 좋은 상대가 나타났다고 저보고 맞선을 보라고 하시지 뭐예요.”

일전에 맞선은커녕 부모님의 잔소리도 싫다며 투정 부리던 것에 비해 얼굴이 환했다.

기쁜 얼굴로 쫑알쫑알 얘기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루시아는 슬쩍 브라이언을 훔쳐봤다.

분명 브라이언이 크리스틴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마조마했다.

‘응?’

하지만 머지않아 루시아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브라이언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틴을 사랑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전혀 반길 만한 주제가 아닌데 왜 저렇게 좋아하나 의문이 들던 찰나, 브라이언과 눈이 마주쳤다.

브라이언이 조금 당황한 모습으로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는 눈치껏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루시아! 나중에 제게 약혼자가 생기면 공원에 놀러 가실래요? 캐스퍼 후작이랑 같이요!”

루시아는 마지막에 이어진 베른의 성을 듣고 그만 탄식을 흘렸다.

“그, 저… 있잖아.”

“네. 왜 그러세요?”

“나, 베른이랑 헤어졌어…….”

크리스틴 퉁퉁 부은 눈을 번쩍 떴다. 그건 에단과 브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헤, 헤, 헤어졌다고요?”

크리스틴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낯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전에 루시아가 먼저 입을 뗐다.

“좀 사정이 복잡한데. 안 좋게 헤어진 건 아니야. 서로 상의 하에 헤어졌어.”

“대체 언제 헤어진 거야? 어제만 해도 사냥제에 파트너로 같이 참석하지 않았어?”

“맞아, 사이좋게 다녔으면서…….”

불과 하루 전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이 충격이었는지 에단과 브라이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오히려 말 안 하면 답답할 것 같은데?”

“뭐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아, 혹시 우리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야?”

“아니, 그건 아니야. 음…….”

루시아는 눈을 굴리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아리스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자신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제 헤르윈에게 익히 들었었다.

아리스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루시아가 운을 뗐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이야기가 흐를수록 친구들의 얼굴엔 놀라움이 피어났다.

* * *

크흠!

헤르윈이 헛기침을 하며 먼지 한 톨 없는 자신의 옷을 살폈다.

평소의 입던 평상복이나 제복이 아닌 정장을 빼입은 헤르윈이 계속해서 땀이 나는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어제 드디어 루시아의 마음을 확인한 후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날밤을 샌 헤르윈은 아침이 되자마자 모든 사용인을 동원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머리를 손질하며, 몸에는 루시아가 좋아하는 머스크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는 몇 달 전, 타이밍이 맞지 않아 미처 주지 못했던 아쿠아마린 귀걸이 한 쌍을 챙기고, 꽃집에 들러 루시아와 어울리는 꽃다발을 샀다.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헤르윈은 한달음에 마차에서 내려 아그네스 저택을 바라봤다.

루시아와 10년 넘게 소꿉친구로 지내면서 아그네스 가문과 거의 가족 같은 사이이지만, 연인의 가족으로 만난다 생각하니 미친 듯이 가슴이 떨렸다.

헤르윈은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저택을 향해 한 발짝 내딛자 아론이 보였다.

“공자님께서 오셨군요. 혹, 아가씨를 뵈러 오셨습니까?”

“그, 그렇다네. 루시아는 지금 안에 있는가?”

“네, 마침 친구분들이 오셔서 얘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잔뜩 긴장했던 것과 다르게 아그네스 일가를 마주치진 않았다.

아론의 안내에 따라 익숙한 복도를 거닐던 헤르윈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다른 가족분들은 안 계신 건가?”

“네,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정이 있으셔서 집을 비우셨습니다.”

후우-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론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응접실에 도착했다.

헤르윈이 응접실 문을 열려던 것도 잠시, 아론이 입을 열었다.

“어제 아가씨께 얘기 전해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두 분 잘 어울리십니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헤르윈은 얼떨떨해하다가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아론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헤르윈은 응접실에 들어갔다. 

“루시아-”

꿀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루시아를 부르던 헤르윈은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조금 전에 아론이 미리 언질을 해줬기에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빛들은 뭐냐?”

루시아의 이름을 부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친구들의 눈빛이 무슨 불한당을 보는 것처럼 불순했기 때문이다.

“몬스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 뻔뻔한 낯짝 좀 보소.”

“루시아, 정말 헤르윈이랑 결혼할 생각이에요? 다시 잘 생각해보세요. 세상은 넓고 좋은 사람은 널려 있어요.”

헤르윈을 보던 탐탁잖은 시선들이 이내 루시아에게 모여 그와 헤어지라는 말을 쏟아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것들이 지금 루시아한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저들이 자신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는 것을.

헤르윈은 서둘러 루시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네 쌍의 눈빛들을 되받아쳤다.

주위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루시아는 헤르윈 품에서 4:1로 공방을 벌이는 이들을 얼떨떨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도 잠시, 루시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꿈에 그리던 완벽한 나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