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헤르윈과 마차에 나란히 앉은 루시아는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손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입술이 퉁퉁 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르윈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진짜 적당히 해야지 이게 뭐야. 다른 사람이 보면 금방 눈치챈다고.”
황실 사용인이 오기 전까지 루시아는 헤르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나마 사용인이 타이밍 좋게 와서 다행이지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자 루시아는 팔을 쓸어내렸다.
그때, 헤르윈이 루시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끌려간 루시아는 멀뚱히 제 모든 것을 옭아매는 힘을 느꼈다.
“하아, 좋다…….”
진심 가득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루시아의 웃음이 기분 좋은지 헤르윈이 루시아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한껏 애교부리는 헤르윈이 너무나도 귀여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루시아는 점차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목에 닿은 헤르윈의 입김이 뜨거웠고, 제 손을 감싼 커다란 손이 질척거렸다.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헤르윈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기 전에 루시아는 손으로 막았다.
헤르윈이 제 입에 닿는 작은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이 다른 의미로 가늘어졌다.
“왜 막아.”
“왜긴 왜야. 한번 시작하면 도착할 때까지 안 놓아 줄 거잖아.”
“칫.”
제 예상이 맞았는지 헤르윈이 혀를 찼다. 그리고는 루시아의 목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헤르윈한테 폭 싸여 구속된 느낌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의 애정이 절실히 느껴져서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헤르윈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루시아가 무언가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 그거 알아?”
“뭐가?”
“내가 너한테 99번 고백한 거.”
루시아를 감싼 팔이 움찔 떨렸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헤르윈이 당황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참 징하다, 그치? 13년 동안 99번 고백한 거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졌을 텐데.”
지금에서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헤르윈과 연인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루시아가 과거를 회상하며 저 자신에게 혀를 내두를 때 헤르윈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머지않아 헤르윈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정이 떨어지긴 왜 떨어져. 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인데.”
“응? 사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루시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고 다독여도 도통 헤르윈이 기분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자 루시아는 횡설수설했다.
“그, 그래도 100번을 못 채울 줄 알았는데. 네가 나한테 고백했잖아. 이번까지 포함하면 총 101번이야! 나만 고백한 게 아니니까 그리 울상짓지 않아도…….”
눈물이 고인 붉은 눈동자를 보고 루시아는 멈칫했다. 헤르윈이 지닌 죄책감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쩐지-
“풉! 크흡…….”
평소에 알던 헤르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망울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웃음을 참으려던 루시아가 이내 크게 웃자 헤르윈의 표정이 더욱 뚱해졌다.
“웃겨? 내가 그렇게 웃겨?”
“하하하하! 그, 그게 아니라… 하하!”
한참을 웃던 루시아는 헤르윈이 삐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 겨우 목을 가다듬었다.
“큽, 맨날 냉랭한 표정만 짓던 사람이 계속 애교부리고, 울상을 지으니까 어색해서 그래.”
“내 마음도 몰라주고 너무하네.”
“미안해, 미안해. 삐졌어?”
입술을 쭉 내밀던 헤르윈이 루시아를 흘긋 보다가 볼을 붉히며 루시아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키스 한 번 하게 해 주면 풀릴 것 같은데.”
“안 돼.”
“칫.”
수작질이라는 걸 파악한 루시아가 단번에 거절했다. 헤르윈이 혀를 찼다.
친구로 지낼 때와는 또 다른 거리감이었다. 심통 난 헤르윈을 멀거니 보던 루시아가 헤르윈의 얼굴을 잡고 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헤르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헤르윈이 고개를 홱 돌리자, 루시아가 볼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뽀뽀 정도는 괜찮으니까.”
헤르윈이 잠시 넋을 놓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루시아의 볼에 뽀뽀를 날렸다. 아니, 온 얼굴에 입을 맞췄다.
웃음을 터트리던 루시아는 헤르윈의 얼굴이 점차 밑으로 내려가자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귓불에서 목덜미로 내려온 입술이 괜히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자, 잠깐 헤르윈…….”
그대로 멈춘 헤르윈이 루시아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고마워, 루시아.”
“응?”
“13년 동안 날 포기하지 않아서, 고마워.”
순간 루시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 감정에 감사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다.
그간 겪었던 힘든 순간과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위로받는 것 같았다.
“남은 생 동안 200번이고, 500번이고, 1,000번이고 고백할게. 사랑해, 루시아.”
눈물이 울컥 차올랐지만, 지금은 울고 싶지 않았다. 이 기쁜 순간을 웃음으로 누리고 싶었다.
“나도 사랑해.”
마주 보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던 두 사람은 누구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입을 맞췄다.
욕망 가득한, 서로를 잡아먹는 그런 열렬한 키스가 아닌 부드럽고도 달콤한 장난 같은 키스였다.
문득 창밖 너머로 점차 가까워지는 저택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이번만큼은 천천히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밤이 돼서야 저택에 도착한 루시아는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헤르윈을 만류하고 홀로 대문으로 들어섰다.
사실, 도착한 지 꽤 되었지만, 서로 떨어지기 싫어서 늦장을 부렸었다.
마차에서 내려 인사했을 때, 루시아는 헤르윈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랑 들뜬 눈가를 볼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한바탕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자신도 그와 같은 모습일까 싶어 루시아는 서둘러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말끔해진 모습으로 집에 들어선 루시아를 요한과 줄리안이 열렬히 반겼다.
두 사람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루시아에게 달려들었다.
“우리 딸! 어,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어디 보거라. 의사를 불렀으니 다시 진찰 한 번 해보고… 손이 왜 이래? 다친 곳 없다고 하더니……!”
누구랄 것 없이 두 사람 모두 루시아를 한 바퀴 돌리며 그녀가 다친 곳은 없는지 매와 같은 눈으로 훑어봤다.
그러다 루시아의 손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고 기함을 토했다.
누가 보면 사람이 죽은 거라 착각할 정도였다.
아니, 죽을 뻔했으니 틀린 말은 아닌가.
“아휴, 어머니, 아버지 진정 좀 하세요. 루시아 멀쩡히 걸어 다니고 얘기하잖아요.”
“너는 오빠라는 애가 왜 이렇게 태연해! 몬스터한테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진정을 하니!”
“망할 황실 같으니! 일 처리를 어떻게 했으면 오크가 나타나!”
이미 눈이 뒤집힌 두 사람의 귀에 루카스의 말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루시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요한과 줄리안을 꼭 끌어안았다. 그제야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두 사람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줄리안이 울먹거리며 루시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냥제에 꼭 참석했어야 하는 건데 미안하구나…….”
“다음부터는 그런 위험한 곳에 혼자 두지 않으마. 정말로 아픈 곳은 하나도 없는 거지?”
루시아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줄리안이 눈물을 훔쳤다.
루시아가 오크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루시아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도통 안심할 수 없었다.
이제야 긴장이 탁 풀려버린 두 사람은 크게 안도했다.
루시아 한정으로 좁혀졌던 시야가 점차 넓어지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여기저기 떠올랐다.
요한이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고 안심하던 것도 잠시 얼굴을 굳히며 조용히 분노했다.
“내 이 일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아무리 황실이라 하여도 하마터면 딸이 죽을 뻔했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듣자 하니 루시아 말고도 다른 사상자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들과 함께 정식으로 항의해요.”
줄리안이 옳다구나 요한의 말에 찬성했다.
“루카스에게 얘기 들었다. 혼자 있다가 오크에게 봉변을 당한 거라고?”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숨길 이유가 없어 순순히 긍정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요한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싶어 의아해하던 찰나 요한이 입을 열었다.
“대체 캐스퍼 후작은 어디 있었길래 그 위험한 곳에서 너를 혼자 뒀어?”
요한은 지금 베른에게 화가 나 있었다. 베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지만, 약혼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곁에 없었던 것만으로도 화낼 여지는 충분했다.
당황한 루시아가 루카스를 흘겨봤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저택으로 떠난 후였다. 헤르윈이 말하기를 루카스도 자신이 베른과 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진작에 부모님에게 알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루카스를 쳐다보니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네가 직접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맞아! 후작은 대체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니?”
줄리안까지 합세해 진실을 말하라고 닦달했다.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면 베른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들이었다.
루시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약혼녀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굳이 감싸줄 거 없다. 솔직하게 말해보렴.”
루시아가 말하지 않는 것을 두고 베른을 감싼다고 생각한 요한이 달래는 말투로 슬쩍 다독였다.
그에 기가 차 루시아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면 대체……!”
“저, 베른과 헤어졌어요.”
갑작스런 루시아의 말에 요한은 화내다 말고 멈춰 섰고, 줄리안은 못 들을 것을 들은 것마냥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참의 적막 끝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뭐어어?!”
루카스와 루시아가 동시에 귀를 틀어막았다. 이윽고 그들의 부모님은 잔뜩 흥분한 채 횡설수설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대체 왜 헤어졌다는 거냐,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이가 좋지 않았냐 등. 온갖 질문이 쏟아졌지만 하나하나 받아칠 수는 없었다.
대신, 루시아는 이 모든 것을 만회할 말을 툭 내뱉었다.
“그리고 저 헤르윈이랑 결혼할 거예요.”
요한과 줄리안이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넋을 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루카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모습을 보였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다고?”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게 ‘어쩌다 보니’로 설명될 일인가 싶어 입만 뻐끔거리던 루카스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래…. 일단… 축하한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축하 인사를 건네는 루카스를 보고 루시아가 의외라는 듯 놀란 반응을 보였다.
“웬일이야? 헤르윈을 자기 인생에서 지웠다던 사람이?”
쿡 찌르는 날카로운 말에 루카스가 가슴을 움켜잡으며 비틀거렸다.
“그, 그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너희 둘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 뻔히 아는데 반대할 순 없잖아.”
180도 달라진 루카스의 모습에 잠깐 놀라던 루시아는 이내 루카스의 팔을 툭 쳤다. 고맙단 인사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빠도 약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번엔 또 다른 폭탄 발언이었다. 넋이 나가 있던 줄리안과 요한의 얼굴이 루카스를 향했다. 당황한 루카스가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 그건 그러니까… 너 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어제 헤르윈이 말해주던데? 듣자 하니 약혼을 약속한 지 꽤 됐다며. 왜 말 안 했어?”
“여러 사정이 있어. 그래, 어제까진 약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베키를 떠올린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피곤함이 밀려와 눈가를 문지르던 것도 잠시 루카스는 어느새 자신에게 바싹 다가온 부모님을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약혼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렇게 약혼하라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던 애가 무슨…. 혹시, 너 사고라도……!”
“아아악!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세요!”
루카스가 펄쩍 뛰며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 약혼도 안 하기로 했다며 설명을 이었다.
그럼에도 주구장창 연애만 하던 아들이 약혼한다는 소식에 줄리안과 요한은 화들짝 뒤집어졌다.
루시아는 자신보다 루카스에게 길길이 날뛰는 부모님의 모습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