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29)

<95화>

“후우-”

가쁜 숨을 내뱉으며 아리스타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사냥제. 많은 사냥감을 잡아내는 것으로 우위를 가려내며, 주로 남자들을 위한 행사이다. 하지만, 아리스타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사냥제에 참석했다.

사냥제에 참석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여러 실랑이가 있었지만, 사냥제에는 아리스타 말고도 몇몇 여성들이 참석했으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숨이 멎은 사슴의 눈을 감겨주고 있을 때, 근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타의 눈빛이 돌변하며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자, 잠깐! 아리스타!”

검이 뒤에 있는 사람에게 도달하기 전, 아리스타는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오라버니.”

“후아, 십년감수했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나타난 사람은 바로 루카스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를 보며 아리스타는 검을 밑으로 내렸다.

“그러게 왜 기척을 죽이고 나타나. 누가 덮치는 줄 알았잖아.”

“난 그냥 익숙한 얼굴이니까 놀라게 해주려고 했지.”

“오라버니, 내가 소드 익스퍼트인 거 잊었어?”

아리스타가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루카스가 졌다며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내가 검 들고 있을 때는 장난치지 마. 그러다 두 동강 난다?”

“어우, 넌 뭔 농담을 진담처럼 하냐? 살벌하게.”

“농담 아닌데.”

퉁명스럽게 말하는 아리스타를 살피다 루카스는 뒤늦게 그녀의 손에서 오러가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 두 동강이 나고도 남을 것 같아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탓에 땀을 뻘뻘 흘리는 그를 보며 아리스타가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농담이야. 내가 오라버니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

“하, 하하… 그, 그렇지?”

머쓱하게 웃던 루카스는 아리스타가 사슴의 다리를 묶는 걸 보며 그녀 곁에 다가갔다.

“내가 도와줄게.”

루카스는 아리스타에게서 로프를 하나 얻어, 사슴의 앞다리를 묶었다.

“대단하네. 벌써 사슴을 잡다니. 첫 사냥감이야?”

“아니, 네 번째 사냥감.”

“네, 네 번째?”

자신보다 많은 양에 루카스가 적잖아 당황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리스타의 말이 보였다. 그 옆에는 여우와 토끼, 그리고 작은 꽃사슴 하나가 놓여있었다.

생각보다 훌륭한 성적에 루카스는 아리스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묵묵히 사슴을 묶던 아리스타는 열렬한 시선을 무시하다 못해 결국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참 대단하다 싶어서.”

“뭐야 갑자기.”

순간 얼굴을 붉힌 아리스타는 장난치지 말라며 루카스를 툭 밀쳤다. 

“갑자기가 아니야. 솔직히 여자의 몸으로 검 휘두르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 그런데 어린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다다르고, 나보다 사냥도 잘하는데 이게 대단한 거 아니면 대체 뭐겠어.”

낯부끄러운 칭찬에 아리스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가. 부모님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데. 언제까지 사냥만 할 거냐고 그러시고. 아레스, 그 녀석도 언제쯤 철드냐고 매일 잔소리야.”

씁쓸함이 묻어나는 말투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아리스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늘 웃는 얼굴이었던 그녀가 조금은 초연해 보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평생 검만 휘두르고 살 수도 없고. 나도 언젠가는 가정을 이뤄야 하니까.”

애써 태연하게 말했지만, 루카스의 눈엔 그녀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체념해왔는지 한눈에 보였다.

“읏차, 이제 옮겨야겠다. 오라버니 좀 도와줄 수 있…….”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리스타는 제 손을 잡는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멈칫했다.

시선을 내리자, 루카스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

아리스타의 손이 움찔 떨렸다.

“너 검 좋아하잖아. 다른 사람들 말 때문에 네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마. 그러기엔 네 노력과 열정이 너무 아까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좋게 보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다들 한순간의 일탈이라고만 생각했다.

‘……왜? 난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루카스의 얼굴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겹쳤다. 

저를 부정하는 세상으로부터 온갖 분노와 울분에 차 있던 어린 시절. 말간 벽안을 지닌 소년이 절망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었다.

“……이러니 내가 반하지 않고 배겨.”

“응? 뭐라고?”

아리스타의 중얼거림에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스타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리스타는 아직도 잡고 있는 루카스의 손에 힘을 주며 그를 일으켰다.

“보아하니 오라버니는 사냥을 다 끝낸 모양인가 보네?”

“응, 난 여기까지만 하려고. 애초에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 그러면 나랑 같이 가자.”

“응? 정말?”

루카스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아리스타는 의아해했다.

“왜 그런 반응이야?”

“넌 사냥하는 거 좋아하니까 분명 더 하고 갈 줄 알았어. 그리고, 오늘 몬스터까지 있다고 했으니, 몬스터 잡으러 갈 줄 알았는데…….”

“아…….”

루카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 루카스가 오기 전까지 아리스타는 사슴을 처리한 다음에 바로 몬스터를 잡으러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단둘이 남게 된 기회인데 헛되이 쓸 수는 없지.’

루카스와 둘만이 남기를 기다리고 있던 찰나라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아리스타는 흥미를 잃었다고 대충 둘러대며 루카스와 함께 천천히 말을 몰면서 황궁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약혼 말이야.”

“……응.”

약혼 얘기가 나오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늦게 대답했다. 

“정말 그 여자랑 할 거야?”

“음, 일단 사귀고 있는 사이이기도 하고, 나도 슬슬 약혼할 나이이니까 해야지.”

“그 말은, 그 여자랑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약혼하는 건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네.”

미묘하게 뉘앙스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아리스타가 루카스의 정곡을 찔렀다.

루카스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에 덩달아 아리스타가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웃는 낯이었던 루카스의 얼굴이 조금은 굳어져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

루카스의 말투가 서늘하게만 들렸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아리스타는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아니,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모른 척 지나가면 안 될 것 같더라고.”

의미심장한 말에 영문을 모르는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잘…….”

“오라버니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고 있어.”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 루카스는 단번에 얼어붙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넋을 놓던 루카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이내 그의 청량한 벽안이 흉폭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타, 이런 장난 재미없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아리스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반응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그 사람이 다른 남자랑 입 맞추는 걸 봤어.”

루카스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터져 나오며,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루카스는 아리스타 말에 화를 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까드득-

이가는 소리와 함께 루카스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려 아리스타를 노려봤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루카스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생각하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리스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일로 내가 거짓말할 리가 없잖아.”

“하아…….”

다행히 루카스는 더 이상 아리스타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믿는 건지 아니면 믿지 못하는 건지 헷갈렸다.

아리스타는 루카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내 말… 믿어주는 거야?”

복잡한 눈빛으로 다른 곳을 보던 루카스가 슬쩍 아리스타를 쳐다봤다. 아리스타는 도통 루카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믿기 싫지만…….”

무정한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뒤로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가 괜한 말을 할 애가 아니잖아.”

“……오라버니.”

“네가 본 것들, 자세히 말해봐.”

조금 분노를 가라앉힌 루카스를 보며 아리스타는 순간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자신이 그동안 봤던 것들과 따로 알아본 일들을 숨김없이 낱낱이 고했다.

“……오라버니가 전에 바람 핀 애인 때문에 힘 들었다고. 그런데 이런 일을 또 알게 되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되겠냐면서 나한테 조용히 하라고 했어. 나만 입 다물면 아무 일도 없는 거라고.”

“너답지 않게 얕은 수작에 넘어갔네.”

루카스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농담을 했지만,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잔잔히 이어진 아리스타의 말을 들을수록 푸른 벽안은 서서히 공허해졌다.

“나도 처음엔 덜컥 겁이 나서 미처 말을 못 했는데 그 여자가 뻔뻔하게 오라버니랑 약혼한다고 하니까……!”

“그만.”

루카스를 대신해서 화를 내던 아리스타는 머리 위에 얹어진 묵직한 느낌에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루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은 것이 보였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

“오라버니…….”

“후우,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네. 네 말만 들으면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건지 모르겠어.”

“오라버니 잘못 아니야. 이건 모두 오라버니를 속이고 뻔뻔하게 있는 그 여자 잘못이야.”

아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루카스에게 팔을 뻗어 그를 꼭 안았다.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난 오라버니가 상처받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따뜻한 체온에 너덜거리는 마음에 조금씩 새살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던 루카스는 손을 들어 올려 덩달아 아리스타를 껴안았다.

잠시 멈칫하던 아리스타는 눈을 꾹 감으며 묵묵히 루카스를 위로했다. 그렇게 서로 조용히 껴안기를 몇 분. 머지않아 두 사람은 서서히 떨어졌다.

“덕분에 좀 기운 나네.”

“……오라버니, 약혼 안 할 거지?”

“당연히 안 해야지. 물론, 그 전에 대화를 해봐야겠지만 말이야.”

대화도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아리스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카스는 그저 아리스타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으로만 알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 이제 우리 가자.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응…….”

루카스가 먼저 앞서가며 아리스타가 그 뒤를 따랐다. 아리스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멀거니 쳐다봤다.

‘너무 멀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유독 루카스가 멀게만 느껴졌다. 아마 이것이 그와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리일 것이다.

한없이 먼 루카스를 보고 싶지 않아 아리스타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주책맞게 눈물이 조금 나오고 말았다.

코를 작게 훌쩍이며 눈가를 비빌 때, 무언가에 부딪쳤다. 그게 루카스의 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아리스타는 허둥지둥 눈물을 닦아냈다.

“오, 오라버니 갑자기 왜 멈춰선…….”

아리스타는 말을 하던 것도 잠시 루카스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넋을 놓았다.

하-

이내 바로 앞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리스타는 불안한 기색으로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순간 루카스가 머리끝까지 화났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앞에는-

“베키.”

베키가 어떤 남자랑 한데 뒤엉켜 키스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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