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29)

<94화>

여름제 둘째 날. 사냥제의 아침이 떠올랐다.

황실 숲에서 사냥제가 시작되기에 그 인근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작은 초소와 천막들이 처져 있었다. 또한 곳곳에는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제 막 도착한 루시아는 베른과 어색하게 주위를 거닐었다.

어제 서로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난 다음부터 누구랄 것 없이 사이가 조금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루시아대로, 베른은 베른대로 생각이 많았다.

‘베른이 만약 내 마음이 변한 걸 안다면…….’

‘루시아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두 사람은 각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린 상태였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단번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위태로웠다.

하지만, 용기가 없고 상대방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루시아도 베른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끝없이 이어지자 루시아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이 꽤 많군요.”

“그러게요. 올해는 작년보다 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 말이나 던진 것에 비해 베른이 잘 받아주었다. 조금 긴장이 풀리자 루시아는 드디어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베른의 말대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사람이 많은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글쎄요. 포상도 작년과 비슷한 걸 보면 상을 노리고 참석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작년, 그리고 재작년과 비교해 봐도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는데 유독 올해에 사람이 많았다. 

“응? 저건 뭐죠?”

그때, 한 곳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문을 모르는 베른과 루시아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그곳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어떤 철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뭔가를 구경하는 것 같은데 워낙 사람이 많아, 보이질 않았다.

“실례지만, 이곳에 뭐가 있는 건가요?”

베른이 결국 다른 사람을 붙잡아 물었다.

“새끼 오크가 있습니다.”

“오크요? 몬스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크라는 말에 누구랄 것 없이 베른과 루시아가 기겁했다.

“아니, 몬스터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최근에 페네우스 공자께서 잡았다고 하더군요. 북부에만 있다고 알려진 몬스터가 이곳에 있으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에단 말이 맞았어…….”

루시아는 불현듯 어제 에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몬스터라… 몬스터가 수도 근처에서 나타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페네우스 공자가 잡았을 줄은 몰랐네요.”

“하하, 그렇죠. 참, 혹시 그 소식도 아십니까?”

정보를 알려주던 사내가 베른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번 사냥감에는 몬스터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 몬스터가 사냥감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확실한 건 아니지만, 몬스터가 사냥감 리스트에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저 새끼 오크의 무리인 모양이에요.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폐하께서 큰 포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아마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겁니다.”

베른은 그제야 이번에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아무리 포상이 탐난다고 해도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일인데…….”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루시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베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아마 보상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몬스터를 잡음으로써 제 사냥 실력을 증명할 수 있으니 명예를 얻기 위해 참석하는 거겠죠.”

“명예라는 게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건가요?”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시아는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어렸을 적부터 헤르윈과 페네우스 일가가 몬스터로부터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치열하게 싸워왔는지 알기에 사람들이 몬스터를 쉽게 여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사람들이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설마 황실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제안을 했겠습니까. 무슨 조치를 취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걱정 마. 내가 해치울 테니까.”

지척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헤르윈이 어느새 와 있었다. 

“헤르윈,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몬스터 때문에 걱정되는 거지?”

“응…….”

“확실히 황실에서 몬스터를 안일하게 생각하긴 했어. 그래도 사람들이 다치기 전에 내가 먼저 처리할 거야. 그러니 넌 안심해.”

다른 사람보다 헤르윈이 직접 나선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루시아는 도통 인상을 풀지 못했다.

헤르윈은 피식 웃으며 평소처럼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앞에 베른이 있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후작님께선 몬스터에 관심 없으시죠?”

“네, 저는 제 분수를 잘 알아서 위험한 일은 자처하지 않습니다.”

“명예에 눈이 돌아 치기 어린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던데, 후작님은 그러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문득 헤르윈이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붉은 눈동자가 진지한 것을 보고 베른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아하니 공자께선 몬스터를 잡을 생각이신 모양입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잡겠습니까. 이곳에서 몬스터를 다뤄본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한두 번 토벌해본 것도 아니니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지기 전에 제가 먼저 몬스터를 잡아야죠.”

헤르윈은 포상과 명예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몬스터로 인해 인명피해가 날까 걱정하는 것뿐.

“혹시 모르니 충고 하나 드리죠. 숲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십시오. 어제저녁에 몬스터가 황실 숲으로 들어갔다는 제보가 있었으니 아직 숲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수선하던 그때, 트럼펫 소리가 들리고 황실 일가의 입장을 알렸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어제 그리했듯 황제가 연설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올해에는 내 아주 특별한 것을 준비했소. 모두 저곳을 보게.”

황제가 자랑스럽게 가리킨 곳에는 철장에 갇힌 오크가 있었다.

“저건 며칠 전 페네우스 공자가 친히 포획한 몬스터일세.”

몬스터라는 말에 아직 오크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아직 새끼의 부모로 추정되는 몬스터 두 마리를 잡지 못했지. 지금 그 두 마리는 황실 숲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네. 만약 이번 사냥제에서 몬스터를 잡는다면 짐이 특별한 상을 내리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자신만만한 황제의 말에 사기가 더욱 올라갔다.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헤르윈은 불편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연설이 얼추 마무리되고, 이제는 참가자들이 사냥을 하러 나갈 차례였다.

베른이 준비한 검과 보호구를 착용하며 사냥 준비를 마치자 루시아는 조용히 다가갔다. 

“다치지 마세요.”

루시아는 오늘만을 위해 준비했던 손수건을 꺼내, 베른에게 건넸다.

베른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아들다가 손수건 테두리에 놓인 수를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루시아, 이건…….”

“물망초에요. 전에 봤을 때 물망초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한 번 놔봤어요. 괜찮죠?”

셀린느가 놓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분명 물망초가 맞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시아에게서 셀린느의 흔적을 찾는 것만 같아 베른은 죄책감이 들었다. 

“루시아. 저는……!”

숨이 턱 끝까지 막혀 진심을 말하려던 베른은 말간 벽안을 보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뻐끔거리던 베른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 말고… 사냥제가 끝나면 얘기할 수 있을까요?”

사뭇 진지해진 베른을 보고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른은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루시아에게 받은 손수건을 고이 품에 넣었다.

베른이 말을 가지러 떠나고, 홀로 남겨진 루시아는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베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베른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 이유를 찾으려던 루시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렸다.

“설마…….”

“루시아.”

생각이 마저 이어지기 전에 앞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헤르윈이었다. 

가장 먼저 떠났으리라 생각한 헤르윈이 나타나자 루시아는 적잖아 당황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대다수의 남자들이 사냥을 하러 떠난 뒤였다.

“왜 안 갔어? 혹시 뭐 두고 간 거 있어?”

“응.”

“그게 뭔데?”

헤르윈은 조용히 루시아의 얼굴에서 그녀의 작은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전, 루시아게 베른에게 손수건을 주는 것을 똑똑히 봤다.

약혼할 사이니 사냥제 때 손수건을 주는 것이 특별할 건 없지만-

‘역시, 기분 나빠.’

루시아가 정성스레 수놓은 손수건을 베른이 받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헤르윈은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씩 웃었다.

“뭐긴 뭐야. 저번에 나한테 손수건 주기로 했잖아.”

“뭐, 뭐?!”

크게 당황한 나머지 루시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버버 거리며 루시아가 아무 말도 못하자 헤르윈은 최대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랑 한 약속 안 지킨 거야? 난 네가 손수건 주기만을 기다렸는데…….”

“그건…….”

축 처진 눈꼬리를 보며 순간 마음이 약해진 루시아가 머뭇거렸다. 사실, 주머니에는 헤르윈에게 주려고 만든 손수건이 있었다.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세인 앞에서 호언장담했으면서 밤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몰래몰래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혹시 몰라 들고 오긴 했는데…….

루시아는 주머니가 위치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헤르윈을 흘긋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불쌍한 얼굴로 날카로운 눈매를 밑으로 내렸다.

‘이왕 만들어버린 거, 주는 게 맞겠지만…….’

불과 5분 전까지 제 곁에 있던 베른이 마음에 걸렸다.

역시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손수건을 줄 순 없었다.

루시아는 꽉 잡았던 치맛자락을 놓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안… 난 네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루시아의 대답에 헤르윈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너무한다며 투덜거리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뭐, 사실 나도 그냥 던진 말이었어.”

“아…그래?”

어쩐지 헤르윈의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농담이라면 웃으며 넘겨야 하는데 지금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손수건을 따로 준비했지.”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리둥절한 루시아의 앞으로 익숙한 손수건이 흔들렸다.

“이건…….”

“전에 네가 준 손수건이야.”

헤르윈이 넘겨준 손수건을 보고 루시아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줘?”

“너한테 손수건 받고 싶으니까.”

헤르윈이 팔을 내밀었다.

“내 손목에 묶어줘.”

“뭐? 하지만…….”

“이 부탁도 안 들어줄 거야? 내 손수건 내 손목에 묶어주는 것뿐인데?”

루시아가 뒤로 물러서자 헤르윈이 칭얼거렸다. 타인에게 차갑기만 하던 사람이 인상을 풀고 애교를 부리자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술렁거렸다.

루시아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그래, 헤르윈 손수건이 맞기는 한데…….’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거라 그런지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얼른. 이러다가 내가 제일 꼴찌로 들어가겠어.”

주위를 둘러보니 헤르윈의 말대로 이곳에 남아있는 참가자가 별로 없었다. 이러다가는 헤르윈이 아무런 사냥감도 못 잡는 건가 싶어 루시아는 서둘러 손수건을 그의 손목에 묶어줬다.

단단히 묶인 손수건을 보고 헤르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됐지? 얼른 가. 이러다가 사냥감 다 떨어지겠어.”

어느덧 걱정 어린 표정을 짓는 루시아를 보며 헤르윈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루시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많은 사냥감을 가져오겠습니다, 레이디.”

너무 놀라 제자리에 얼어붙었던 루시아는 헤르윈이 떠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에게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헤르윈은 어느새 말을 몰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금 봤어?”

“어제도 그러더니, 페네우스 공자가 아그네스 영애를 좋아하나 봐.”

“하지만, 아그네스 영애는 캐스퍼 후작이랑 약혼하잖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루시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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