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29)

<92화>

당황한 나머지 헤르윈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아리스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헤르윈이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야.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걸.”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지만, 조금 전 경직되어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풀어졌다. 루카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큼! 여기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전에 네가 했던 말은 진심이겠지?”

루카스는 루시아를 좋아한다는 헤르윈의 말을 쉽사리 믿지 못했다.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확신은 없었다.

헤르윈은 루카스의 말을 알아듣고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래. 그렇구나.”

헤르윈의 진심을 확인한 루카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힘내라.”

“……형.”

투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루카스가 헤르윈을 인정했다. 설마 그가 인정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한 헤르윈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헤르윈이 눈을 빛내며 부담스럽게 쳐다보자 루카스는 괜히 말을 돌렸다.

“크흠! 다른 사람 다 춤추러 나갔는데 너희는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너희들이라면 춤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

“형, 내가 원하는 건 한 명뿐이야. 알잖아.”

지극히 헤르윈다운 말이라 루카스는 자연스레 시선을 그 옆에 있는 아리스타에게로 돌렸다.

“아리스타, 너는? 혹시…좋아한다던 그 사람 기다리고 있어?”

루카스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하지만, 아리스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짝사랑 상대인 루카스가 직접 짝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어 가슴이 욱신거린 상태였다.

아리스타는 떨리는 숨을 가느다랗게 내뱉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 원래 춤추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오라버니도 잘 알잖아.”

“……그런가.”

루카스와 아리스타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베키가 서늘하게 얼굴을 굳히며 루카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약혼녀가 곁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를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번에 약혼하자고 말한 날로부터 약혼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루카스는 알게 모르게 대화를 피하곤 했었다.

그때는 아직 약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아리스타가 있는 자리에서 또다시 그가 도망치는 것을 두고만 볼 순 없었다.

“루카스, 우리도 이만 춤추러 가자. 그리고 슬슬 사람들에게 우리 약혼 소식을 알려야지.”

“……약혼? 형 약혼해?”

약혼이란 단어에 헤르윈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리스타는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다. 루카스는 드물게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축하해 형. 약혼식 날짜는 정했어?”

“아니, 아직. 사실 약혼을 약속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정한 게 없어.”

“그래도 약혼할 거란 사실은 변함없으니 세부 사항도 곧 정할 거예요. 그치? 루카스.”

다른 소리 하지 못하도록 베키가 약혼에 못을 박았다. 루카스는 그저 기계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린 춤추러 가볼게. 나중에 봐.” 

“응.”

베키와 루카스가 떠나고 잠깐의 침묵 끝에 헤르윈이 아리스타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루카스 형이 약혼이라니. 넌 뭐 알고 있었어? 아니, 그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뭔 소리야?”

방금 전엔 루카스랑 베키가 있어서 차마 묻지 못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정보들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 헤르윈은 아리스타를 채근했다. 

그럼에도 아리스타는 멀거니 베키와 춤을 추는 루카스를 쳐다봤다.

낮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헤르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묘한 느낌이었다. 헤르윈은 아리스타의 시선을 따라 루카스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베른과 춤을 추던 루시아가 댄스홀 밖으로 빠져나왔다. 

헤르윈은 곧바로 아리스타와 루카스에게서 관심을 저버리고 루시아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저 멀리 두 사람에게 한 여인이 접근한 것이 보였다.

“뭐지?”

어디선가 낯이 익은 여인이 두 사람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다.

베른은 난처한 듯 보였고, 루시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베른과 꼈던 팔짱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화를 끝낸 루시아가 혼자 자리를 떠났다. 베른이 서둘러 루시아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앞에 있던 여성이 베른을 붙잡았다.

‘주홍빛 머리카락, 주근깨…….’

가물가물한 기억 속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

‘크리스틴 파티에서 봤던 여자다.’

루시아와 베른이 키스하는 것을 목격하기 직전 저와 부딪쳤던 여자였다.

그때, 그녀는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구슬프게 울며 연회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어? 너희 아직도 여기 있었어? 춤추러 가지 않고…….”

루시아는 댄스홀에서 벗어나, 아리스타와 헤르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불과 몇 분 사이에 기분이 가라앉은 아리스타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헤르윈을 보고 멈칫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루시아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헤르윈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가.”

“아니, 그냥…….”

“네 약혼자는 어디 가고 왜 너 혼자야.”

“아… 베른은 다른 여자랑 춤추러 갔어.”

“다른 여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베른이 그 여성과 춤추고 있었다. 늘 생글생글 웃던 그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약혼자가 다른 사람이랑 춤춰도 되는 거야?”

“……약혼해도 다른 사람이랑 춤추는 건 흔한 일인걸.”

잠시 생각에 잠겼던 루시아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다가온 셀린느를 떠올렸다.

‘캐스퍼 후작, 춤을 요청합니다.’

‘……제인슨 영애.’

늘 셀린느라 부르던 베른이 급격히 목소리를 낮추며 셀린느를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렀다. 

루시아는 그만큼 베른이 당황한 것을 느꼈다. 하긴, 만약 헤르윈이 셀린느처럼 저돌적으로 나왔다면 자신도 당황했을 것이다.

‘무례인 것을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아그네스 영애.’

루시아는 셀린느를 똑바로 마주했다. 셀린느는 손과 어깨를 잘게 떨 만큼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루시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만큼 셀린느가 얼마나 절박한지 알 것 같았다.

‘루시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루시아가 말이 없자, 그녀가 화난 것이라 생각한 베른이 서둘러 변명했다.

베른이 루시아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셀린느의 얼굴에 절망감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울기 직전인 그녀를 보며 루시아는 입을 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꼭 약혼한 사람끼리 춤을 추라는 법은 없지요.’

‘루시아?’

설마 루시아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베른이 크게 당황했다. 그만큼 셀린느의 눈이 커져 있었다.

‘저는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루시아가 베른에게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려 하자 셀린느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는 벅찬 감정과 감사함이 섞여 있었다. 

연민일까? 베른을 왜 셀린느에게 양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선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랑 춤춰도 상관없겠네.”

“어?”

셀린느와 베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루시아는 불현듯 들려오는 말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르윈이 진지한 얼굴로 루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가 허리를 굽히며 루시아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을 추겠습니까? 레이디?”

어디에 있어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인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춤을 권하자 주변에서 술렁거렸다. 루카스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아리스타가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약혼 예정인 루시아에게 춤을 권한 것도 권한 것이지만, 현재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할 수 있는 헤르윈이 여자에게 춤을 권한 것이 화제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헤르윈은 루시아나 아리스타처럼 평소 어울리는 여자들하고만 춤을 추곤 했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없다. 허나, 그가 정중하게 자세를 갖춰 춤을 권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자 루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춤을 권하고 있지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루시아, 네 말대로 굳이 약혼한 사이가 아니어도 춤을 출 수 있잖아.”

루시아가 머뭇거리자 근처에 있던 아리스타가 헤르윈을 거들었다. 아리스타가 눈을 찡긋거리며 댄스홀을 턱으로 가리켰다.

“남들 눈치 보지 말고 가. 오히려 거절하면 사람들 시선이 더 쏠릴걸?”

루시아는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헤르윈을 쳐다봤다. 그는 아직도 허리를 굽힌 채 오직 루시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열렬하여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응.”

제 손 위에 작은 손이 포개지자 헤르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걸 보고 루시아와 아리스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순간 넋을 잃을 정도였다.

“가자.”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헤르윈의 손에 이끌려 댄스홀로 나갔다. 멀리 떨어진 곳에 베른과 셀린느가 있었지만, 지금 루시아의 눈엔 오직 헤르윈만 보였다.

‘이건 꼭…….’

16살, 헤르윈 생일파티에서 춤을 췄을 때와 같았다.

그때는 자신이 아리스타의 대타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헤르윈이 자신에게 웃어주고, 첫 춤 상대로 자신을 골라줬다는 것에 기뻐했었다.

풋내 나는 그 시절처럼 감당하기 힘든 벅찬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감정의 파도에 익사하기 직전이다. 지금 당장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편 루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헤르윈은 그저 어미 새를 쫓는 새끼처럼 루시아가 자신만을 멍하니 보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여기서 긴장을 풀어버리면 저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음만 나올 것 같았다.

티 하나 없이 맑은 벽안이 오로지 자신만 보고 있는 것은 꽤나 기쁘고도 벅차, 가슴이 몽글거렸다.

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과, 한 줌에 잡히는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정수리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작은 체구.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평소엔 춤추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하루 종일 춤만 출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루시아만이 남은 기분이었다.

악단의 연주를 들으며 타이밍 좋게 헤르윈은 루시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주변에 시선이 쏠릴 만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덕분에 넋을 놓고 있던 루시아가 정신 차렸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하, 왜? 부끄러워?”

“그야…! 당연하지! 들어 올리는 구간도 아닌데 갑자기 그러면…….”

루시아가 시선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제게만 들리게끔 속삭이는 게, 꼭 종달새가 지저귀는 것만 같았다.

“……내 말 듣고 있어?”

“응.”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보고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붉은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못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아, 행복하다…….”

“뭐?”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빙그르르 돌면서 헤르윈이 루시아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간지러운 말소리를 듣고 루시아는 헤르윈을 올려다봤다. 헤르윈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나도.’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저도 모르게 헤르윈에게 넘어갈 뻔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곤 헤르윈의 가슴팍만 쳐다봤다.

그때, 헤르윈의 재킷 주머니에 익숙한 것이 보였다. 그건 바로 자신이 그에게 줬던 손수건이었다.

살짝 튀어나온 손수건의 재질이나, 색, 그리고 흘긋 보이는 자수까지. 전부 루시아의 손을 거쳐 간 것들이었다.

손수건을 본 순간부터 루시아는 흔들렸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베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이 약혼을 이어가야 한다고 여겼지만, 쓸데없는 아집이 제 눈을 가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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