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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29)
  • <91화>

    시끌벅적한 파티장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구석, 연미복을 차려입은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커다란 철창에 갇힌 새끼 몬스터에게 박혀 있었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몬스터가 무슨 장난감인 줄 알아? 그렇게 위험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

    근처에 보초를 서던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헤르윈의 몸에선 흉흉한 붉은 오러가 미약하게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리던 새끼 몬스터가 오들오들 떨 정도의 기세였다.

    헤르윈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필이면 오크 새끼일 건 뭐야.’

    근 한 달간 인근 숲에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몬스터는 바로 오크였다. 인간형 몬스터 중 하나로 단연 머리가 똑똑한 종족.

    과거 북부에서 몬스터를 토벌했을 때, 오크가 다른 몬스터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쑥대밭을 만들어놓는 바람에 고생한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이나 오크는 머리 돌아가는 것이 비상하고, 성질이 잔학하기로 유명하다.

    ‘다행히 무리를 이루지는 않고, 암컷이랑 새끼만 데리고 움직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새끼를 데리고 있는 오크 역시 매우 흉폭하다. 저번에 새끼 오크를 잡은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

    이제껏 몬스터의 서식지는 북부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수도를 비롯해 다른 지역에서 몬스터가 나타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황실에서도 이번에 잡은 새끼 오크를 바로 죽이지 않았다.

    “그냥 잡은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지금은 저리 덜덜 떨며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면에 숨겨진 모습을 헤르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몬스터가 왜 몬스터겠는가.

    얼핏 듣기로는 내일 있을 사냥제에 본보기로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새끼 오크를 죽인다고 하였다.

    그전까지 과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지 의문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자 헤르윈은 뒤로 돌아섰다.

    “혹시 모르니 절대 철장 가까이에는 다가가지 말고, 꼭 다섯 명 이상씩 보초를 서도록 해라. 아무리 새끼라고 해도 장정 한 명 정도의 힘은 갖고 있으니 말이야.”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꼿꼿하게 서며 헤르윈의 말을 새겨들었다. 좀처럼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헤르윈은 애써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 *

    “루시아.”

    “아, 베른. 일은 모두 마쳤나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도중 잠깐 자리를 비웠던 베른이 돌아왔다. 그는 루시아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며 루시아의 손을 붙들었다.

    “네, 다행히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자리가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해요.”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자리였기에 혹시 베른이 불편할까 싶어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기회에 친구분들과 더 친해지면 좋죠.”

    언제나 그랬듯 베른은 괜찮다며 웃는 것이 전부였다. 

    그 덕에 친구들은 루시아와 베른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루시아에게 자극받아 약혼 의사를 밝힌 크리스틴이 부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역시 사이가 무척이나 좋으시네요. 저도 두 사람처럼 사이좋은 약혼자를 갖고 싶어요.”

    “네? 아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칭찬에 베른이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내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두 사람 옷 맞춰 입은 거죠? 이렇게 보니 무척이나 닮았네요.”

    아리스타가 눈썰미 좋게 루시아와 베른의 옷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맞춰 입은 상태였다.

    여름에 맞게 시원하면서도 옅은 녹색 계열의 옷을 갖춰 입어, 서로의 톤을 맞췄다.

    거기에 더해 일전에 맞춘 노란 토파즈 귀걸이와 브로치를 달고 있으니 더더욱 눈에 띄었다.

    루시아가 설풋 웃으며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예쁘긴 하지만…….’

    헤르윈이 선물해준 드레스가 제게 더 잘 어울렸다. 

    세인이 이런 예쁜 드레스를 방치하는 건 너무 아깝다며 꼭 여름제 때 입으라 말했지만, 루시아는 그것을 입을 생각이 없었다.

    ‘헤르윈에게 여지를 줘서는 안 되지.’

    약혼자를 앞에 두고 다른 남자가 준 옷을 입고 파티장에 나타날 순 없었다.

    루시아는 지금 헤르윈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두 사람 옷이 비슷하네.”

    안도하기 무섭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경직한 루시아는 뒤를 돌았다. 연미복을 멋있게 빼입은 헤르윈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베른과 루시아를 살피던 그는 루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히 불편하고 미안한 기분에 루시아는 쭈뼛거리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캐스퍼 후작.”

    “네, 오랜만이로군요. 저번에 다 같이 식사한 이후로 처음 뵙는 거죠?”

    웬일로 헤르윈이 먼저 베른에게 인사를 했고, 베른은 흔쾌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베른만 보면 못마땅해했던 일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요즘 수도 근처에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공자께서 선두로 나서서 몬스터 포획에 힘쓰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네, 맞습니다. 소식이 참 빠르시군요.”

    “공공연한 소문이니까요. 대단하시네요. 몬스터를 잡으시다니. 저는 워낙 몸 쓰는 일이 맞질 않아서 부러울 따름입니다.”

    “북부에서 아직까지 몬스터들이 들끓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죠.”

    루시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아직까지는 기 싸움이나 거슬리는 말 같은 건 없었다.

    헤르윈이 자신을 좋아한다 했으니 분명 이전보다 더 베른을 경계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헤르윈은 베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아 다행이지만, 헤르윈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빰! 빠라밤! 빰빰!

    그때, 트럼펫 소리를 시작으로 악기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일가를 보러 모두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모두 빠지지 않고 참석해주어 고맙소. 이번 여름제에는…….”

    황제가 앞서 여름제의 시작을 알리며 짧은 연설을 했다. 모두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헤르윈이 은근슬쩍 루시아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번에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어?”

    “……응, 예쁘더라.”

    “그래? 다행이다.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였거든. 그 옷보다는 내가 산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흘긋 보니 헤르윈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내일은 입어줄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 이미 정해놓은 옷이 따로 있어.”

    “아쉽네.”

    아쉬운 것치고는 말투에서 실망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선물을 보내면서도 루시아가 그것을 입어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짧은 대화가 끝마침과 동시에 황제의 연설도 마무리를 지었다. 이윽고 악단이 연주를 시작하며 황태자 부부와, 황녀와 아레스가 먼저 춤을 선보였다.

    머지않아. 하나둘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댄스홀로 나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루시아.”

    당연히 베른도 제 약혼녀인 루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그 손을 잡으며 베른과 함께 앞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헤르윈이 못내 마음에 걸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그는 붉은 눈동자를 고요히 빛내며 베른과 루시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괜히 오싹해진 느낌에 루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멀리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춤을 추는 루시아와 베른을 헤르윈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그런 그의 곁으로 아리스타가 은근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너 이대로 괜찮아?”

    “뭐가?”

    “저번에 분명 루시아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헤르윈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 마음 같아선 루시아 첫 춤 상대가 되고 싶지만, 아직 루시아가 후작과 약혼 관계이니 그럴 순 없지. 약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랑 춤을 추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걸?”

    “루시아를 배려해서 가만히 있는 거야?”

    “뭐, 그렇지. 그리고 전에는 이유도 모르고 괜히 캐스퍼 후작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루시아를 좋아하는 걸 인지하니 전처럼 치기 어린 행동을 할 수 없더라고. 뭐, 그래도 언젠가 루시아를 뺏어올 거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얌전하다 했다.”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헤르윈을 보던 아리스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헤르윈에게서 떨어져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다른 친구들이 사라진 뒤였다.

    에단은 마음에 품고 있다던 여성에게 가서 춤을 권하고 있었고.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은…….

    “응?”

    어느새 댄스홀로 나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분명 각자 파트너를 고른 줄로만 알았는데 두 사람이 같이 춤을 추고 있자 아리스타는 적잖아 당황했다.

    헤르윈은 오직 루시아만 보고 있어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어머, 리디아 공녀 아니신가요? 여기서 다 뵙네요.”

    어디선가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스타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뒤를 돌아보니 베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루카스와 함께 나타났다.

    루카스는 헤르윈을 보고 경직됐다.

    “……영애도 오셨군요.”

    “여름제인데 빠질 수야 있겠습니까? 그런데 옆의 분은 혹시… 마음에 두고 있다던 사람인가요?”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로 그가 페네우스 가문 사람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베키는 일부러 아리스타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베키의 말에 적잖아 당황한 것은 헤르윈과 루카스였다.

    “베키, 저 사람은 헤르윈이야. 두 사람이 친하다고 해도 그런 사이 아니라고.”

    아리스타와 헤르윈을 대신하여 루카스가 베키에게 설명했다. 헤르윈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아리스타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는 누군데 다짜고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왜 루카스 형이랑 같이 있는 거지?”

    “……오라버니 애인이야.”

    “애인? 원래 사귀던 사람이었나?”

    매번 루카스의 바뀌었기에 저런 애인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 그랬나요? 이거 참 죄송합니다. 저는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여서 분명 연인인 줄 알았어요.”

    베키가 실수를 저질렀다며 사과를 해왔지만, 어쩐지 헤르윈 눈에는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게는 따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초면에 괜한 억측은 자제하시죠.”

    솔직히 루카스 애인만 아니었다면 면박을 줬을지도 모른다.

    ‘형은 왜 저런 사람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거지?’

    헤르윈은 처음으로 루카스의 안목이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카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 역시 헤르윈을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루카스가 바로 시선을 돌리기는 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 헤르윈은 루카스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리던 것을 똑똑히 포착했다.

    저번에 좋지 않게 헤어졌었으니 루카스가 자신에게 어색하게 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헤르윈은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다시 루카스와 가까워질 생각이었다.

    “형,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어? 어어… 그럭저럭…. 그러는 너는? 아팠다고 들었는데…….”

    도통 눈을 마주치진 못했지만, 루카스가 먼저 헤르윈이 아팠었던 일을 꺼낼 줄은 몰랐다. 

    오랜 기간 루시아만큼이나 루카스와도 친하게 지내왔기에 루카스가 지금 어색하게나마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헤르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응, 괜찮아. 이제는 아픈 곳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에 루카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헤르윈이 아팠던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루카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미안하다 말해야 하는데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때, 헤르윈 옆에 있던 아리스타와 눈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한 루카스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괜찮아.

    아리스타가 입으로 뻐끔거렸다. 

    루카스가 무슨 마음인지 이해한 그녀가 응원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루카스가 헤르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에는 내가 미안했다. 아무리 감정이 격했어도 감정적으로 굴어선 안 되는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정말로, 미안해.”

    루카스가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헤르윈과 아무 사정을 모르는 베키가 당황했다. 

    아리스타만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루카스의 용기를 응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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