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29)

<89화>

“다행히 늦지 않았군.”

다급하게 마차에서 내린 베른이 서둘러 카페에 들어섰다. 

여름제까지 단 5일이 남은 상황, 최근 진행하고 있는 사업도 런칭 막바지에 다다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다 어제 겨우 숨통이 트여 오늘에서야 루시아와의 약속을 잡았다.

일 때문에 계속 미루고 미루던 약속이라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할 순 없었다.

자리를 잡은 베른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약속 시간까지 15분 정도가 남았다.

오늘은 루시아를 기다리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베른은 안도했다.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루시아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베른은 옆으로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고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베른의 입매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제 앞에 나타난 여성을 쳐다봤다.

“베른, 여기서 다 보네?”

셀린느가 들뜬 얼굴로 베른을 내려다봤다. 

매번 베른의 뒤를 쫓아다닌 그녀이기에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어 베른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이번에도 나 쫓아온 거야? 내가 그런 짓 그만두라고 했지.”

“너 쫓아온 거 아니야. 요 며칠 동안 네 주변에 나타난 적 없잖아.”

셀린느가 억울하다는 투로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를 본 적 없긴 했다.

“이번엔 진짜 우연이야. 오랜만에 나온 카페에 네가 다 있다니. 오늘은 운이 좋은걸?”

셀린느가 수줍은 얼굴로 말하자 베른은 저도 모르게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다.

꾸밈없이 순수하기만 한 미소에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셀린느 한정으로 변덕스러운 제 마음이 야속하기만 했다.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시간 괜찮으면 오늘 나랑 같이 다닐래?”

“미안하지만, 안 돼. 약속 있어.”

“무슨 약속? 언제 끝나는데?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약속이 끝나도 안 돼. 너랑 나, 그럴 사이 아니잖아.”

단호한 대답에 셀린느는 잠시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제 눈치를 보는 베른을 보고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알겠어. 그럼 어쩔 수 없네. 대신 약속 끝나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지?”

“셀린느…….”

“대화는 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까지 피하면 나 상처받아.”

상처받는단 말에 베른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고개를 돌려 셀린느를 외면했다.

“약속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언제쯤 끝날 것 같아? 누구랑 한 약속이야?”

“그건…….”

베른이 당황하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이곳으로 다가오자 베른과 셀린느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르마리오 자작부인?”

“……아그네스 영애.”

“아, 이제는 제인슨 영애라고 불러드려야 하죠?”

루시아가 싱긋 웃으며 그들이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셀린느를 보다가 천천히 베른을 쳐다봤다.

카페에 들어왔을 때부터 루시아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베른은 루시아를 보자 괜히 제 발이 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 오해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루시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럼에도 베른은 루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계속 셀린느를 만나왔기에 양심에 찔린 것이다.

셀린느는 어느덧 미소를 지우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왜 베른이 루시아를 만나러 온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두 사람이 약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베른을 만나서 들뜬 나머지 그가 루시아와 약혼한다는 사실을 까먹고 말았다.

“보니까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계시던데. 무슨 얘기를 하셨나요?”

“루시아,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오랜만에 뵙는지라 저도 모르게 그만 말을 건네고 말았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영애.”

베른이 변명하기 전에 셀린느가 고개를 숙이며 중요한 내용만 감춘 진실을 털어놓았다.

루시아는 잠시 셀린느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늘 두 분께선 데이트를 나오신 건가요?”

“데이트? 음, 데이트라면 데이트죠. 며칠 뒤면 여름제잖아요. 여름제 일과 나중에 있을 약혼식에 대해 의논하러 왔습니다.”

“약혼식…….”

“네, 그래서 이제 좀 중요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상냥하게 말하는 루시아의 말투에는 조금의 가식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셀린느는 심술 한 번 부리지 못하고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셀린느가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루시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만큼이나 얼굴에 마음이 드러나는 훤히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자리에 앉으며 옷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잔뜩 긴장한 베른이 보였다.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꼭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 같네요.”

“……죄송합니다, 루시아.”

“왜 사과하시는 거죠?”

분노도, 질투도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루시아를 보며 베른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전 애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셨으니까요. 저라면 불쾌했을 것 같아서요.”

불쾌라.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불쾌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만큼 베른에게 마음이 없기도 하고, 본인도 베른 몰래 헤르윈과 저지른 일이 있었기에 엄한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추 예상이 되어 저도 모르게 공감했을 뿐.

루시아는 문득 셀린느와 있던 베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인슨 영애와 있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이던데, 혹시 최근에 따로 만난 적 있으세요?”

“푸흡! 콜록, 콜록…….”

루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른이 고통스러운 기침을 내뱉었다. 루시아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네요.”

“큽, 모, 몰래 만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몇 번 마주친 게 다입니다.”

“흐음, 그러신가요?”

“죄송합니다, 루시아. 숨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쩔쩔매며 횡설수설 말하는 베른을 보며 루시아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혹시 아직 마음을 접지 못하셨나요?”

“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베른이 황급히 변명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에도 루시아는 셀린느를 보던 베른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그건 분명 아직 미련이 남은, 사랑이 서려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책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직 마음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제안 때문에 베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멋쩍게 웃는 루시아를 보고 베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루시아는 제 제안이 부담이 되지 않은지 걱정했지만, 그녀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저 자신이었다.

루시아의 말대로 셀린느에 대한 마음을 모두 접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을 잊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는 루시아야말로 괜찮은 가요? 루시아도 마음을 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헤르윈을 떠올리며 루시아는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베른은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고백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에, 루시아가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에도 없는 자신과 결혼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저도 이미 결심했는걸요. 하하, 이거 참. 제가 베른에게 뭐라 말할 처지가 아니었네요. 그래도 제가 한 말은 진심이었어요. 만약 진심으로 제인슨 영애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편히 얘기해주세요. 제 눈치를 보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베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그들은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여름제가 화제에 올랐다.

“아, 그런데 혹시 그 얘기 들으셨나요?”

“네? 뭐가요?”

“최근, 수도 근처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몬스터. 문득 헤르윈을 떠올린 루시아가 얼굴을 굳혔다.

“네, 저도 얼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루 빨리 몬스터를 잡아야 할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발견한 곳이 황실 숲 근처라 자칫하면 여름제때 몬스터와 맞부딪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사냥제는 취소되는 건가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취소하는 게 맞겠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하는 공문이 내려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년에 겨우 두 번 있는 사냥제인데 쉽게 취소될 것 같지는 않네요.”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베른, 사냥감을 선물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부디 몸조심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화와 함께 저번에 미처 다 하지 못한 약혼식 일정을 몇 가지 정하고 난 다음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루시아는 베른과 함께 카페를 나서면서 셀린느가 있었던 자리를 훑었다.

어느새 떠났는지 그녀가 있었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마차가 올 때까지 잠깐 기다릴까요?”

옆에서 들려오는 베른의 말에 루시아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있지 않아 마차가 도착했고, 베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루시아는 마차에 올라섰다.

“다음에는 여름제 때 뵙겠군요.”

“그렇네요. 제가 말한 거 잊지 않으셨죠? 녹색 계열의 옷을 입으셔야 해요.”

“당연하죠.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마차가 움직이자 루시아는 창을 통해 베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네.”

처음으로 약혼자와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라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았더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일이 일단락되어, 이제는 여름제때 입을 드레스를 확정하고, 베른에게 줄 손수건만 완성하면 된다.

손수건을 떠올리던 루시아는 문득 헤르윈을 떠올렸다.

‘그럼, 나도 손수건 만들어줘.’

고집이나 다름없던 소원. 절대 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는 했지만, 저도 모르게 밤마다 몰래몰래 헤르윈에게 줄 손수건을 만들었다.

물론 베른에게 줄 손수건보다는 덜 화려하고, 공이 덜 들어간 손수건이지만 말이다.

“주지도 못할 거면서…….”

주지도 못하고, 줄 수도 없는 주제에 대체 왜 만든 걸까. 헤르윈을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번에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그는 간간이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왔었다. 편지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적힌 글씨를 보면 자신에게 향한 그의 사랑이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헤르윈은 나를 좋아해.’

13년 넘게 그를 좋아해 왔기에,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가끔은 설레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달뜬 숨을 고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은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그와 자신은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타이밍이 맞질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베른에게 할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셀린느에게 돌아가도 괜찮다는 말. 

어쭙잖은 배려가 아니고 진심이었지만, 그 말은 어쩌면 베른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이대로 현실과 타협하며 베른과 평범한 행복을 영위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헤르윈의 사랑을 받으며 그토록 원했던 행복을 누리고 싶은 걸까?

아직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루시아는 눈을 감으며 흔들거리는 마차에 몸을 기댔다. 더 이상 생각을 해봤자 마음만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루시아는 피곤한 기색으로 목을 문지르며 방에 들어섰다. 마침 방을 정리하던 세인이 루시아를 반겼다.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응, 나 피곤해서 그런데 옷 갈아입는 것 좀 도와줄래?”

“네, 알겠습니다. 아, 맞다. 그 전에 선물이 하나 왔는데 확인해 보시겠어요?”

“선물?”

장갑과 가방을 소파에 놓던 루시아가 뒤를 돌았다. 어느덧 세인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페네우스 공자님께서 보내셨어요.”

“또? 이번엔 대체 뭐야?”

자잘한 것들을 보내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상자의 크기가 평소보다 남다르자 루시아는 어리둥절했다.

선물을 풀어보니 그 안에는 옅은 핑크빛이 맴도는 아름다운 드레스가 놓여있었다.

“이건…….”

“어머,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예요.”

세인이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드레스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척 보기에도 루시아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루시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드레스를 보다가 드레스와 같이 있던 카드를 집었다.

『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여름제 때 이걸 입으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아. 』

짤막한 글이었지만, 뜻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여름제라. 확실히 이걸 입으면 주인공은 단연코 아가씨겠어요. 아가씨, 이걸 입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가씨?”

옆이 조용한 것을 느끼고 세인이 고개를 돌리자 루시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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