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29)

<87화>

“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멈칫한 아리스타의 뒤로 아레스가 베키를 반겼다. 뱀 같은 시선으로 아리스타를 훑어보던 베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웃었다.

“요즘 루카스를 못 본 것 같아서요. 얼굴 좀 볼 겸 방문했어요. 제가 일을 방해한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저희도 마침 쉬려던 중이었어요.”

베키가 루카스의 팔을 꼭 붙들며 리디아 남매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이 사 온 디저트를 내려놓던 베키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치즈 케이크를 발견했다.

“응? 디저트가 있었네요?”

“네, 안 그래도 루카스 이 녀석이 사 왔거든요.”

“어머, 정말요? 자기야, 내가 여기 오는 거 어떻게 알고 사 왔어.”

“아,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가 제게 사준 거예요.”

루카스가 당황하며 얼버무릴 때 아리스타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눈썹을 찡그린 베키는 고고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아리스타가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들며 베키를 향해 어쩔 거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공녀님께 사주셨다고요.”

“네, 며칠 전에 제가 오라버니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거든요.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다 주셨어요. 제가 산 건 아니지만, 맛있게 드세요.”

베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베키는 스산하게 케이크 옆에 있는 상자를 살폈다.

자신이 그렇게 먹고 싶다고 해도 사기 힘들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았던 그 베이커리였다.

전에 자신의 협박을 알아 들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분명 그때는 루카스를 향한 짝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저 태도로 봐서는-

‘꼭 선전포고하는 것 같잖아?’

“자기야, 안 먹고 뭐해.”

혼자 온갖 상상을 다 하던 그때, 루카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베키는 정신 차렸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는 홍차가 놓여 있었다.

“응, 고마워.”

루카스에게 미소를 보였지만, 베키는 현재 속이 말이 아니었다. 

제 말에 쩔쩔맸던 저 공녀가 지금은 기세등등한 게 조금 이상했다. 아니, 저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자 불안해졌다.

‘설마, 내가 다른 남자랑 있던 걸 루카스한테 말할 생각인가?’

순진하다 생각했는데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아리스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베키를 비웃었다.

그에 질세라 베키도 아리스타를 노려보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공녀께선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아리스타의 손이 흠칫 떨렸다. 단번에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고 베키는 자신이 그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리스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아니요.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어머, 공녀께선 무척이나 아름다운 분이시라 인기가 많으실 것 같았는데.”

“인기야 많죠. 하지만, 제 눈에 차는 사람은 없네요.”

“그럼, 제가 남자라도 소개해드릴까요? 어때? 루카스? 공녀께서 지금 이 청춘을 낭비하시는 게 너무 아깝지 않아?”

베키가 루카스에게 엉겨 붙으며 은근슬쩍 아리스타를 쳐다봤다.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긍정적인 루카스의 말에 두 여자의 희비가 갈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리스타처럼 멋진 여자한테 남자를 소개해 주려면 웬만한 남자로는 안 될걸? 왕자가 아니고서야, 아리스타가 아깝잖아.”

그 말은 루카스가 아리스타에게 보내는 찬사이자 알게 모르게 베키를 낮게 평가하는 언행이었다.

베키가 소개해 줄 남자 중에는 아리스타를 감당할 정도로 멋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니까.

물론 루카스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한 건 아니겠지만,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타격은 컸다.

“으엑, 그 정도는 아니다.”

“하하, 그런가? 하지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무 남자에게 주기엔 아리스타가 너무 아깝지.”

“……크흠, 적어도 후작위 이상은 돼야지.”

루카스와 아레스의 대화를 듣고 베키와 아리스타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베키는 똥 씹은 표정처럼 도저히 인상을 펴지 못했고, 아리스타는 순간 베키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루카스가 자신을 좋게 평가했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 기뻤다.

“아리스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다 문득 루카스가 아리스타에게 말을 건넸다. 아리스타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까지 좋게 평가해. 나는 아무나 상관없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아무나는 안되지. 아리스타, 남자들 중에는 개차반도 많아. 신중히 보고 잘 골라. 뭐 너라면 알아서 잘 고르겠지만 말이야.”

“하하, 칭찬 고마워.”

“그런데 넌 진짜 연애할 생각 없어? 생각해보니 네가 누구랑 연애하는 걸 본 적이 없네.”

아레스는 지금까지 아리스타 옆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친하게 지내는 남자는 몇 명 있는 것 같지만, 그중에 연인이라 불릴만한 사람은 없었다.

“난 연애에 관심 없어.”

“그래도 이제 네 나이가 있는데 연애라도 해야지. 그러다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결혼한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베키만이 섞이지 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저 세 사람 사이에 있는 끈끈한 유대감은 쉽게 뚫을 수 없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불쾌하여 심기가 뒤틀렸다. 베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제가 알기론 지금 좋아하시는 분이 따로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폭탄 발언이 툭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고 베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 자칫하다가는 아리스타가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고 자신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아리스타가 루카스를 향한 짝사랑을 들켜 영영 그의 곁에서 나가떨어졌으면 했다.

순간 아리스타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포식자 앞에 놓인 것 같은 느낌에 베키는 비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저도 모르게 주춤 떨고 말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따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전에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뭐?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대체 누구야?”

“너 그런 얘기 한 번도 없었잖아!”

아레스와 루카스가 쌍으로 번갈아 가며 질문을 퍼부었다. 처음엔 루카스가 놀란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아리스타는 열렬한 기세에 뒤로 밀려났다.

“……내가 누굴 좋아하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야…….”

아리스타와 눈이 마주친 루카스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아리스타가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거지?’

“당연하지! 어쩐지 그 얼굴로 연애 한 번 안 한다 했다.”

루카스가 미처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아레스가 옆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대체 누구야? 고백은 했어? 네가 차일 리는 없을 테고… 설마 고백도 안 한 건 아니지?”

떨떠름하던 아리스타는 잠시 눈이 짜게 식었다. 그리고는 제게 바짝 다가온 아레스를 밀었다.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네가 나를 이렇게 아낄 줄은 몰랐네.”

“아, 아끼긴 누가 아낀다고 그래. 가족으로서 궁금하니까 그렇지.”

아레스도 뒤늦게 자신이 과민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헛기침했다.

“그래서 지금 누굴 좋아하고 있는 거야?”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루카스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말간 벽안을 보고 있으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아리스타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뭐…그렇지.”

“누굴 좋아하는 건데?”

“그건 말 못 해. 하지만… 좋아한 지 꽤 됐어.”

아레스가 너무 놀란 나머지 어버버 말을 더듬었고,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람의 어디가 좋아?”

“……다. 좋아하는데 특별히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첫눈에 반했어.”

만인의 첫사랑인 아리스타가 첫눈에 반한 상대라니 궁금해서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특히 동생의 연애사는 처음이라 아레스는 들떠 있었다.

“누군지 더 궁금하네. 그냥 나한테만 귓속말로 알려주면 안 돼?”

“싫어. 징그럽게 왜 이래. 저리 가.”

물론 아리스타는 질색을 하며 아레스 옆에서 멀어졌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키는 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뭐,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딱 봐도 속에 구렁이 열 마리는 키우는 것 같으니, 이 정도 함정에 쉽게 빠질 인물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이 기회를 틈타 아리스타를 루카스에게서 완전히 떼어낼 셈이다. 

베키는 자신의 몸을 루카스에게 더더욱 밀착시키며 콧소리를 냈다.

“그저 소문인 줄 알았는데 정말 공녀께서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네요. 게다가 첫눈에 반했다니 정말 궁금하다. 그치, 루카스.”

일부러 아리스타가 다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인 다음 기세등등한 얼굴로 루카스를 올려다보던 베키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루카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지하게 얼굴을 굳힌 채로 못에 박힌 듯 반대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베키는 천천히 루카스의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아레스와 투닥거리는 아리스타가 들어왔다.

“짝사랑에 첫사랑인가…….”

낮게 읊조린 루카스의 목소리는 오직 곁에 있는 베키에게만 도달했다.

베키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루카스가 아리스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저보다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베키에게 있어 10점 만점 중 10점인 애인이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애정이 반쪽짜리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과 애정을 받음에도 그것이 진심이라고 느껴질 때는 별로 없었다.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고,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행동은 베키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스처간 여느 애인에게나 마찬가지였다.

루카스가 전 여자친구와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연애를 시작하면 오직 한 사람에게만 퍼붓는 맹목적인 사랑이 궁금해서.

덕분에 다른 남자들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던 공허함이 완벽히 맞아떨어졌었다. 허나, 진실을 눈앞에서 목격한 지금. 초조함이 밀려들어 왔다.

‘싫어. 지금 어딜 보는 거야? 루카스, 넌 내 거야. 내 거라고!’

속이 난장판이었다. 루카스는 아직도 아리스타를 보고 있었다.

“루카스.”

베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루카스가 그녀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서늘한 표정을 지우며 미소를 지었다.

헤실헤실 풀어지는 얼굴과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평소와 같았지만 딱 하나, 그의 말간 벽안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벽안은 투명하기 그지없어 오늘도 여지없이 베키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베키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앉아있더라도 그의 눈동자는 자신이 아닌 그 여인을 비췄을 것이다. 

바보같이 저 눈을 보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하고 싶은 말 있는 거 아니었어?”

말이 없는 베키를 보고 루카스가 상냥하게 물었다. 늘 저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공허함이 채워졌었는데 왜 지금은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 오히려 갈증이 일어 좀 더 많은 것을 갈구하고 싶어졌다.

“루카스.”

“응?”

“우리 약혼하자.”

“……뭐?”

베키의 말에 루카스도, 투닥거리던 리디아 남매도 멈칫하며 모두 하나같이 그녀를 쳐다봤다.

베키는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지우고, 예쁘게 보이려던 표정도 없앤 채 무덤덤하게 고백해왔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그녀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약혼. 그래, 저번에 루시아와 얘기를 나누며 자신도 곧 약혼을 해야겠다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지?’

목에 가시가 걸린 것마냥 껄끄러웠다. 언젠가는 약혼할 걸 예상한 바인데도 베키의 말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아리스타를 쳐다봤다.

아레스가 아리스타를 붙잡은 채 경악한 것이 보였고, 아리스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저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나랑 약혼하기 싫어?”

베키가 루카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레 아리스타에게 돌아가는 눈빛을 보고 초조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베키가 울상을 짓자 루카스는 황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그럴 리가. 너무 놀라서 그랬어…….”

“난 자기랑 약혼하고 결혼해서 귀여운 자식 낳고 오손도손 살고 싶어.”

루카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하하 웃으며 베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웃고 있는 데도 웃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스스로 느끼기에도 인위적인 웃음에 가까웠다.

“그럼, 우리 이제 약혼하는 거지?”

“……그래.”

“정말 기뻐! 사랑해, 루카스!”

폭 안겨 오는 아담한 몸에 루카스는 팔을 둘렀다. 

옆에서 아레스가 박수를 치며 드디어 약혼한다고 축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아리스타 또한-

“……축하해.”

축하한다는 아무 감정 없는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루카스는 도저히 고개를 돌려 아리스타를 볼 수 없었다.

왜 그런 건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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