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29)

<86화>

루시아가 황망하게 천을 보고 있을 때, 헤르윈이 서둘러 무릎을 굽혀 천을 주웠다.

“미안. 묶을 게 없어서 리본 좀 썼어.”

방금 전, 도둑을 제압할 때 썼던 리본이 아무래도 이 상자를 묶는 데 사용된 것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많이 더러워지진 않았다.”

천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그것을 곱게 접었다. 그러다 문득 헤르윈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손수건에 쓰는 천이지?”

하나는 처음 보는 색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천으로 만든 손수건이 지금도 품 안에 있었다.

“손수건 만들려는 거야?”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녀가 손수건을 주는 사람은 자신과 그녀의 가족 이외에 본 적이 없었다.

루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한테 주려고?”

“……베른.”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헤르윈은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입꼬리를 내렸다.

“좀 있으면 여름제잖아. 그때 열리는 사냥제에서 손수건을 줄 거야.”

“……후작에게 줄 거라 이거지.”

누가 들어도 헤르윈의 목소리가 서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을 피다 걸린 사람처럼 루시아는 괜히 헤르윈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며 우물쭈물하는 루시아의 머리 위로 짙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그럼, 나도 손수건 만들어줘.”

그리고는 조금 불퉁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그에 당황한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르윈은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너도?”

“응, 나도 만들어줘.”

“……내가 왜?”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손수건을 만들어줄 의무는 없었다. 그럼에도 받고 싶었다.

“내가 도둑 잡아줬잖아.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도 손수건 만들어줘.”

“그런 억지가 어딨어. 그리고 사냥제 때 여자가 손수건을 주는 의미가 뭔지 몰라?”

사냥을 나가는 남성에게 여자가 손수건을 주는 행위에는 잘 다녀오라는 의미도 있지만, 보통은 연인 사이, 혹은 가족에게만 주는 편이었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모르는 남자에게 손수건을 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자가 그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경우에만 한했다.

그런데 약혼자가 있는 여자가 버젓이 다른 남자에게 손수건을 준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부적절한 관계였다.

이 사실을 헤르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알아. 그러니까 나도 해줘.”

“헤르윈.”

“만들어주는 걸로 알고 기대하고 있을게.”

“자, 잠깐만.”

헤르윈이 루시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어느새 루시아의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든 채였다.

뒤에서 루시아가 안 된다고, 안 할 거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헤르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루시아가 마차에 탈 때까지도 실랑이는 이어졌다.

“헤르윈! 난 안 만들 거라고 분명 말했어!”

“응, 예쁘게 만들어준다고? 알겠어.”

“정말! 너 그럴 거야?!”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는 상황에 결국 루시아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헤르윈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마차 문에 반쯤 올라서 루시아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난 네가 나 말고 다른 남자에게 손수건 주는 모습은 절대 못 봐.”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한참을 루시아를 노려보던 헤르윈은 이내 인상을 풀며 바로 코앞에 있는 루시아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루시아가 볼을 감싸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잘 가. 나중에 또 보자.”

헤르윈이 문을 닫고 나서야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서둘러 뒤를 돌아 자신을 보자 헤르윈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완전히 거리를 떠나고 나서야 헤르윈은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여름제라…….”

생각도 안 했는데 곧 있으면 여름제였다. 웬만하면 그런 곳에 잘 가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꼭 참석해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

“보아하니 몸 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베른을 떠올리던 헤르윈은 이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사냥제 때 후작가의 코를 눌러서 보란 듯이 루시아에게 제 사냥감들을 선물할 생각이었다.

베른의 기를 눌러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헤르윈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정말! 세인, 너도 말이 된다고 생각해? 헤르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말도 안 되죠.”

“흥, 내가 하나 봐라. 세인, 너도 절대 헤르윈 손수건 만들지 마.”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루시아는 씩씩거리며 세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웬일로 루시아가 투정을 부리고는 있지만 이런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세인은 루시아가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며 대충 맞장구를 쳤다.

혼자 분개하는 루시아에게 성의 없는 세인의 태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수놓으실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헤르윈이 이상해. 그렇게까지 해서 내 손수건을 받아내려는 저의가 뭐야?”

루시아는 계속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인은 자연스럽게 루시아가 수를 놓을 수 있도록 자리를 정돈했다. 

루시아는 중얼중얼거리면서도 어느새 세인을 따라 오늘 사 온 천에다가 초크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저번에 내가 준 거 아직 잘 쓰고 있으면서 왜 또 필요한 건지…….”

“아가씨의 사랑이 고팠나 보죠.”

계속 들려오는 투정에 결국 세인이 입을 열었다. 루시아가 멈칫하며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어버버 거렸다.

“이런 대답을 원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요? 제 귀에는 아가씨께서 페네우스 도련님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라는 것처럼 들렸는데요.”

“세인, 지금 나한테 농담하는 거지?”

“농담처럼 들렸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퉁명스러운 대답에 루시아가 볼에 바람을 넣었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준다며 루시아가 툴툴거렸지만, 세인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가 말이다.

“세인, 너 요즘 나한테 너무 차가운 것 같아. 저번에는 내 말 잘 들어줬으면서.”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죠. 그리고, 지금 아가씨께선 투정 부리고 계시잖아요.”

“내가 언제.”

“지금이요.”

“……됐어. 너랑 말 안 해.”

세인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루시아가 결국 토라졌다. 루시아는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바늘을 집었다. 그리고 수를 놓으려 하자 옆에서 세인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왜.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루시아의 입에선 툴툴거리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세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세인은 황당과 당황 그 사이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느질 전에 그건 수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응? 뭐가?”

세인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자 루시아가 초크로 그린 천이 보였다. 한참 자신의 천을 내려다보던 루시아는 이내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이, 이건……!”

“그렇게 페네우스 공자 얘기를 하시더니… 분명 공자님 손수건은 안 만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이, 이건 오해야!”

천 위에 그려진 것은 다름 아닌 페네우스 가문의 문양이었다. 게다가 천 끄트머리에는 헤르윈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인 것이다. 루시아가 서둘러 변명을 하려고 할 때, 세인의 짜게 식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아가씨도 참 아가씨답네요.”

수치스러워진 루시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천에 그려진 초크 자국을 지우기 바빴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공자님 손수건도 만드세요.”

“세인!”

“제가 봤을 땐, 아직 아가씨께선 공자님을 다 잊지 못하셨어요.”

“하, 하지만. 난 이제 약혼할 몸이야.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래도 저번에 공자께서 고백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리고 오늘도 공자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루시아가 우물쭈물거리며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는 자신의 일은 웬만하면 잘 털어놓지 않는 편이었지만, 셰인은 사용인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을 통해 그녀가 진작에 헤르윈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인이 보기에 루시아는 아직 헤르윈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다. 혼자 마음 정리를 하다가, 헤르윈이 고백을 하고 나니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루시아가 안쓰러웠다.

“아가씨. 고작 약혼일 뿐이에요.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약혼이라면 파혼의 여지가 충분히 있어요.”

“……….”

“이대로 계속 공자님께 흔들린 채로 약혼할 바에는 차라리 파혼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게 아가씨에게도, 캐스퍼 후작님에게도 더 좋을지 몰라요.”

“그래도 내가 먼저 약혼하자고 말했는걸…….”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은 채로 죄책감 때문에 약혼을 강행하는 건,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일지도 몰라요.”

세인의 말을 듣고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일이 제 마음대로 쉽게 풀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이해관계가 엮여있기 때문에 약혼을 그리 쉽게 깰 수는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초크나 줘봐.”

루시아는 세인이 건네준 초크를 받으며 천을 내려다봤다. 손으로 문지른 초크로 인해 녹빛 천은 탁해졌고, 잔뜩 구겨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아 루시아는 울적했다.

* * *

아레스의 집무실. 

한창 바쁜 아레스를 도와 일을 처리하던 아리스타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리스타.”

“응? 오라버니. 무슨 일이야?”

아리스타에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루카스였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리스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건 바로 수도에서 요즘 가장 유명하다는 베이커리의 케이크였다. 아리스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나 주는 거야?”

“응, 저번에 내 이야기 들어줬잖아. 그에 대한 보답이야. 치즈 케이크 좋아하지?”

“그렇기는 한데…….”

루카스에게 선물을 받아 기쁘지만 아리스타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 오라버니가 준 쿠키도 아직 다 못 먹었어…….”

루카스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고 일주일이 훌쩍 흐른 지금. 그는 계속해서 아리스타에게 선물 공세를 했다.

상담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이유였다. 처음엔 기쁘게 받아들이던 아리스타도 매일같이 이어지는 자잘한 선물이 이제는 부담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아, 그랬었나? 에이, 그래도 사 왔는데 먹어. 아니면 이제 쉬는 시간인데 차랑 같이 먹을까?”

시계를 확인하니 딱 티타임 가지기 좋은 시간대였다. 아리스타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카스는 그녀의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기묘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루카스, 너 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바로 아레스였다. 아레스는 해괴망측한 모습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루카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자 루카스는 언제 웃었냐는 듯 얼굴을 굳히며 아레스를 노려봤다.

“내가 뭘 어쨌다고.”

“뭘 어쩌긴 어째. 요 며칠 동안 관심에 굶주린 개마냥 아리스타 주변을 맴돌잖아. 너희 나 몰래 무슨 일 있었지?”

“무, 무슨 일이 있긴. 저번에 오라버니 얘기 들어준 게 다야. 그치?”

저도 모르게 당황한 아리스타가 말을 더듬으며 루카스를 쳐다봤다. 아레스와 눈싸움을 벌이던 루카스는 아리스타를 보자마자 햇살처럼 활짝 웃었다.

“응, 저번에 아리스타가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 몰라. 덕분에 부모님이랑 루시아랑 잘 화해했거든.”

그저 고마워서 하는 말일 텐데 어쩐지 아리스타는 루카스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리스타는 얼굴이 붉어질까 싶어 서둘러 루카스가 사 온 케이크 포장을 뜯었다.

“와아, 맛있겠다. 우리 얼른 먹자.”

“기다려봐. 내가 차 가져올게.”

서둘러 말을 돌리는 아리스타랑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모습으로 차를 가지러가는 루카스를 보고 아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너도 얼른 와. 안 그러면 나랑 오라버니가 다 먹는다.”

아리스타의 말을 듣고 아레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야.”

“왜.”

“루카스는 ‘오라버니’라 부르면서 나는 왜 ‘너’야.”

아리스타가 눈을 끔뻑이며 아레스를 쳐다봤다. 그는 자신과 루카스의 호칭이 다른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걸 보고 아리스타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넌 나한테서 오빠라는 소리를 듣고 싶냐?”

“그런 건 아니지만, 루카스랑 온도 차가 너무 심하잖아!”

“너랑 오라버니랑 다르니까 그렇지.”

“다르긴 뭐가 달라. 오히려 꽃밭에만 사는 저 녀석보다 내가 훨씬 낫구만.”

아레스가 툴툴거리며 아리스타 옆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홱 돌리곤 삐진 티를 내며 치즈 케이크를 먹자 아리스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게 오빠 소리가 듣고 싶으면 해줄게. 오-빠!”

“됐어! 엎드려 절 받는 것도 아니고.”

아레스랑 아리스타랑 투닥투닥 같잖은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루카스인가 싶어 아리스타는 고개를 돌렸다.

“왔어? 차는…….”

아리스타는 마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머, 공녀님도 계셨군요.”

루카스 옆에는 그의 연인인 베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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