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터벅 터벅 터벅-
또각 또각 또각-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두 굽 소리가 제 뒤를 따라붙었다. 베른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무시했다.
“베른, 나 힘들어.”
뒤에 들리는 목소리에 베른은 움찔 떨었다.
“베른, 나 힘들다니까? 조금만 천천히 가.”
이젠 종종걸음으로 뛰는 소리가 들렸다. 베른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아름답게 치장한 셀린느가 있었다.
저번에 후작저로 찾아온 날로부터 지금까지 셀린느는 계속 베른의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각종 편지와 선물, 그리고 만남을 요청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베른은 셀린느를 만나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공세가 통하질 않다는 걸 깨달은 셀린느는 결국 베른의 뒤를 쫓아다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의 일정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저번보다 훨씬 대담했다. 카페에서 마주한 것이 고작이었던 저번에 비해 이번에는 말까지 걸었다.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라면 완전히 성공했다.
셀린느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만, 그것을 겉으로 티 내지 않을 뿐.
한번 받아주기 시작한다면 무너지는 건 금방이라는 걸 직감한 베른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러다 금방 지쳐서 떨어지겠지.’
베른은 뒤에서 들려오는 셀린느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베른이 걷는 속도를 올리자 셀린느는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신장 차이가 있어 따라잡기에는 조금 힘들었다.
점점 멀어지는 베른의 뒷모습을 보며 셀린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이대로 나가떨어질 순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뛰려던 찰나,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앗!”
짧은 비명을 지른 셀린느가 바닥에 넘어졌다.
“윽…….”
손바닥과 무릎에 알싸한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도 발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니 구두가 벗겨져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발이 보였다. 발목에 손을 대니 뜨끈한 열기와 함께 점차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넘어지면서 발목이 꺾이고 만 것이다.
셀린느는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접질린 것인지 도무지 일어날 수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몸과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설움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베른을 놓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대로 베른이 떠나갔을까 싶어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던 찰나, 바로 코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셀린느! 괜찮아?”
저 멀리 있던 베른이 어느새 달려온 것이다.
자신을 무시할 때는 언제고 다급한 베른의 표정을 보자 셀린느는 순간 말을 잃었다.
“손 좀 봐! 여기저기 다 까졌네! 발은 왜 그래? 혹시 접질린 거야?”
셀린느가 뭐라 말하기 전에 베른은 꼼꼼하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저를 걱정하는 눈빛과, 많이 다친 건 아닌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까지.
꼭 연인 시절의 모습과 똑같았다.
안경 너머, 녹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셀린느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 다행이다. 아직 나를 좋아해서…….’
꼭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아무 반응 없이 계속 무시만 하는 베른을 보고 초조함을 느꼈었다.
베른이 정말 자신을 다 잊었을까 봐. 자신이 그에게 이제는 아무런 존재도 아닐까 봐.
하지만, 베른은 아직 셀린느를 잊지 않았다.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도가 물밀듯 밀려오자 긴장감이 탁 풀려버렸다.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버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셀린느의 눈물에 베른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랐다.
“많이 아파? 어디가 아픈데?”
“흐윽, 그, 그게 아니라…….”
셀린느가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하자 베른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베른이 셀린느를 안아 들었다.
“베, 베른!”
덕분에 셀린느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얼떨결에 공중으로 뜨게 된 셀린느는 버둥거리다가 반사적으로 베른을 껴안았다.
“근처에 내 마차가 있으니 일단 거기로 가자.”
베른이 단호한 어조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셀린느가 다쳤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은 다른 사람의 눈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베른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고 싶은 건 맞지만, 그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셀린느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근처에 사람은 없었다. 셀린느는 속으로 안도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베른이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가 화났다는 것을 깨달은 셀린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훌쩍-
그저 작게 훌쩍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을 잠자코 듣고 있던 베른은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섰다. 베른은 곧바로 마부에게 병원으로 가자고 명령했다.
“발목 봐봐.”
그리고 셀린느의 상태를 다시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셀린느는 머뭇거리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귀찮을 정도로 열심히 말을 건넬 때는 언제고 침묵하는 셀린느를 보며 베른은 그녀의 발을 잡아챘다.
“자, 잠깐만!”
셀린느가 말릴 새도 없이 베른이 작은 발을 들어 올렸다.
속치마가 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베른은 오직 셀린느의 발에만 집중했다.
그 짧은 새에 셀린느의 발목은 새파란 멍이 들며 부어올라 있었다.
“벌써 부어올랐네.”
“윽…….”
부끄러워하던 것도 잠시 베른의 손이 발목에 닿자 뭉근한 고통이 느껴졌다.
셀린느의 신음에 베른의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하아, 그러게 왜 쫓아와. 그쯤 하면 포기하고 돌아가야지.”
“……이대로 너를 놓치기 싫었는걸.”
울적한 목소리에 베른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울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갈 것만 같아, 베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 한 번뿐이야. 다음에는 네가 다쳐도, 나를 쫓아와도 반응 안 할 거야. 그러니 여기서 그만둬.”
“싫어.”
“셀린느!”
“싫어! 드디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어. 내가 이걸 가만두고 볼 것 같아? 네 눈엔 내가 막무가내로 보일지 몰라도. 난 절박해.”
셀린느의 눈을 보면 흔들릴 것만 같아 베른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소용없어. 루시아와 약혼하기로 했으니까.”
셀린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셀린느가 다급하게 말했다.
“뭐? 하, 하지만 저번에 분명 약혼을 확정한 건 아니라고……!”
“……네가 가고 나서 정한 사안이야. 약혼식 날짜를 조율 중에 있으니 이젠 무를 수도 없어.”
“내가… 가고 나서 그랬다고?”
“그래.”
언제 걱정했냐는 듯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 무미건조한 금안을 보고 셀린느는 정말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베른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떠난 직후에…….’
루시아와 약혼한다는 건 특별히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녀와 약혼식을 확정한 것이 자신과의 만남 이후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어째서 다른 여자의 손을 잡기로 한 걸까?
‘내가 이리 버젓이 앞에 있는데…….’
바닥에 쓸린 손바닥과 접질린 발목보다 가슴의 고통이 더 컸다.
“후작님,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숨 막히는 침묵 끝에 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가서 치료부터 하자.”
베른이 셀린느를 부축하려 하자 셀린느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내가 혼자 할 수 있어.”
셀린느는 베른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백한 낯으로 위태롭게 일어섰다.
베른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내 손 잡아. 지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잖아.”
잠시 말이 없던 셀린느가 베른을 돌아봤다.
눈물은 없지만, 눈가가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럴 때마저 너는 다정하구나. 나는 네 말 한마디에 죽고 못 사는데…….”
베른의 손에 힘이 풀리자 셀린느는 그를 마차에 남겨두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나갔다.
병원에 들어가기 직전 셀린느는 잠시 고개를 숙이다가 눈가를 비비며 뒤를 돌아봤다.
“그래도… 나는 너 포기 안 해.”
셀린느의 모습이 유독 초라하게만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베른은 병원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약혼 얘기는 일부러 셀린느를 떨어트리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녀에게 흔들려서는 안 되고, 여기서 냉정하게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 것이 맞으니까.
하지만 상처받은 셀린느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기랄!”
베른은 드물게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 * *
“하아아…….”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하아아아…….”
머지않아 다시 한숨이 들리자 아리스타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소리의 원천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루카스가 세상 모든 걱정을 떠안은 표정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저 새끼를 내가 왜 아직도 고용하고 있지?”
루카스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아레스가 있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루카스를 노려봤다.
아레스는 며칠 동안 계속되는 루카스의 한숨에 짜증이 치솟을 대로 솟아난 상태였다.
일도 제대로 안 하면 그 핑계를 대서라도 쫓아낼 텐데 신기하리만큼 죽을상을 하면서도 제 일은 다 해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쉽게 풀 일이지만, 잘못 물어봤다간 루카스가 몇 날 며칠이고 사람을 귀찮게할 게 뻔하기에 아예 말조차 걸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다다른 아레스는 진지하게 루카스를 해고할까 고민했다.
그런 아레스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아리스타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아레스에게 은근슬쩍 다가갔다.
“내가 오라버니랑 얘기해볼게. 잠깐 밖에 나가서 기분전환이라도 해.”
잠시 아리스타를 쳐다보던 아레스는 넋이 나간 루카스를 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편이 내 정신 건강에 좋겠다.”
아레스가 퀭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너무 저 녀석 말 들어주지 마. 적당히 흘러 넘겨. 안 그러면 버릇 돼.”
“내가 알아서 할게.”
아리스타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낀 아레스는 루카스를 보고 혀를 차며 서둘러 밖으로 탈출했다.
아레스가 밖으로 나가든 말든 자신의 세상에 빠져 있던 루카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크흠!”
아리스타가 헛기침과 함께 루카스의 책상을 두드렸다. 잡념에서 빠져나온 루카스가 아리스타를 쳐다봤다.
“오라버니.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매일같이 한숨만 내쉬고 있으면서.”
입술만 달싹이던 루카스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봐, 지금도 그러잖아.”
한숨을 지적하자 루카스는 그제야 자신이 한숨을 내쉬었다는 걸 인지했다.
“그렇네.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거지?”
“꽤 됐어. 고민이 있으면 털어놔.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한 번만 더 한숨 내쉬면 아레스한테 잘릴걸?”
아레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루카스는 입을 가리며 아레스 자리를 훑었다. 다행히 그는 자리에 없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루카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