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헤르윈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열에 들떠 시야가 조금 흐릿했지만,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꿈이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루시아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다니, 이건 꿈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지금 제 방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루시아와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 헤르윈은 루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체구가 작은 건 알았지만, 손도 정말 작았다. 꼭 인형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벌써 결혼까지 상상한 거야?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어쩌려고.”
그때, 한참 말이 없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헤르윈이 콧잔등을 일그러트렸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썩 유쾌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데려올 거야.”
“내가 네게 가지 않는다면?”
“그러면… 내게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려야지.”
잠시 울적한 표정을 짓던 헤르윈이 루시아를 쥔 손을 가져와 제 얼굴에 부볐다.
“루시아는 나를 10년 넘게 기다렸는걸. 이번엔 내 차례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
그간 한 행동이 있으니 지금 당장 루시아가 제게 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제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천히 시간을 두고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일주일 동안 술을 마시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꿈임에도 콧등에 닿은 루시아의 부드러운 손이 무척이나 생생했다. 헤르윈은 조심스레 루시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작은 손이 움찔 떨린 것만 같았다.
“나는… 네가 왜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만약 네가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해서 그런 거라면 나는 또 네게 버림받게 되는 거잖아. 그런 건 싫어.”
떨리는 목소리에 헤르윈이 눈을 떴다. 고개를 숙인 루시아의 얼굴에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다.
잠시 말이 없던 헤르윈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루시아는 힘없이 헤르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볼에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느끼며 헤르윈은 얇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친구한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안 해.”
그리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 루시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루시아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힌 눈물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헤르윈은 천천히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헤, 헤르윈……?”
루시아가 당황하며 바르작거렸지만, 헤르윈은 단단한 팔로 그녀를 옭아맸다.
눈가를 시작으로 가벼우면서도 거칠한 감각이 루시아 얼굴 곳곳에 내려앉았다.
헤르윈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주체 없이 뛰고, 손 끝에 열이 올랐다.
어느덧 턱선에 도달한 헤르윈의 입술이 훤히 드러난 루시아의 목까지 내려갔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에 루시아가 몸을 움츠렸다.
“하아…….”
열에 들뜬 숨이 루시아의 목을 간지럽혔다.
“이래도 내가 우정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무언가를 참는 듯 목울대를 긁는 목소리와 함께 짐승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후작과 입 맞출 때 미쳐버릴 것만 같았어.”
부끄러움에 헤르윈의 시선을 피하던 루시아가 몸을 흠칫 떨며 그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분명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헤르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걸까?
루시아의 벽안이 흔들리자 헤르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베른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이 작은 머릿속에서 그 녀석을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헤르윈은 루시아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점점 작은 입술로 손길을 옮겼다.
‘이 입술을…….’
다른 남자가 채갔다는 것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이건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이 입술은-
‘내 거야.’
헤르윈은 조심스레 루시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꿈인 것치곤 입술에 닿은 감각이 무척이나 생생했다. 저절로 달아오르는 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갈증 나.’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었음에도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키스는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말랑한 입술을 마주 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루시아는 감질나게 움직이는 헤르윈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능숙하던 베른과 달리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베른에 비할 바가 안 되는 고양감이 차올랐다.
심장박동이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고, 세상과 서서히 단절되는 느낌이 들었다.
베른을 헤르윈으로 상상했던 때보다 훨씬 황홀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헤르윈을 밀어내려 했다.
지금 이 관계는 누가 보더라도 부적절했다.
베른에게 먼저 약혼하자고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인데… 지금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당장 그만둬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떨리는 손으로 헤르윈을 밀어내려 해도, 헤르윈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안을 뿐.
“하아, 루시아.”
드디어 계속 맞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루시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헤르윈이 열기에 들뜬 눈빛으로 루시아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에는 짙은 욕망이 새겨져 있었다.
서로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던 것도 잠시 헤르윈이 다시 제게 다가오자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뜨거운 숨결 대신 묵직한 무게가 루시아를 덮쳤다. 시간이 지나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자 루시아는 눈을 떴다.
헤르윈이 잠에 빠져든 것이다.
멍하니 헤르윈을 쳐다보던 루시아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두 손에 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서 한편으로는 헤르윈이 다시 입 맞춰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헤르윈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슬며시 헤르윈을 쳐다봤다. 그는 제 마음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처음엔 헤르윈이 자신을 아리스타로 착각한 건 아닌가 했지만, 그건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었다.
헤르윈은 입을 맞추던 중간중간 계속 아리스타가 아닌 루시아의 이름을 불렀다.
헤르윈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 마음이 상처받을까 봐 애써 피하고 부정했던 진실을 마주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이제 명실상부 베른의 약혼녀였다.
베른을 떠올리자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서로 사랑해주지는 못할망정 상처 주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자고 약속했는데… 그것을 깨트려버렸다.
아무리 헤르윈이 먼저 다가왔다고 해도 그것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이었다.
지독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 허리를 감싼 헤르윈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헤르윈을 다시 침대에 똑바로 눕히며 그를 쳐다봤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다가왔다면, 우리 관계가 달라졌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 헛된 상상을 하며 미련을 놓지 못했다.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헤르윈도 잠결에 꿈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자신만 모른 척하면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헤르윈과의 입맞춤은 이곳에 묻어둘 것이다.
“기억하지 마, 헤르윈. 이건 전부 꿈이야.”
세뇌하듯 속삭이던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르윈의 방을 나섰다.
홀로 방에 남은 헤르윈의 입에서 루시아의 이름이 잠꼬대처럼 튀어나왔다.
* * *
“으음…….”
헤르윈이 신음과 함께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몸이 가벼웠다. 지끈거리던 이마와 축축 늘어지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몇 날 며칠을 내리 잔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에 스칼렛과 제롬의 얼굴을 본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희미했다.
“루시아…….”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루시아의 이름을 읊조렸다.
열에 들떠 정신 차리지 못할 때 매일같이 루시아가 나오는 꿈을 꿨었다.
주로 자신을 떠나가려는 그녀를 붙잡는 꿈이었지만, 딱 한 번 루시아에게 입 맞추는 꿈을 꾼 적 있었다.
품에 쏙 들어오는 체구와 자신을 가득 담은 벽안, 그리고 입술에 느껴지던 촉감. 모든 것이 선명했다.
어쩌면 베른과 루시아가 키스하는 꿈을 꾼 다음, 그에 대한 반발심리가 꿈에 적용된 걸지도 모른다.
“……나쁘진 않네.”
꿈에 불과할지라도 허탈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 루시아를 붙잡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역시 다른 누구에게도 그녀를 빼앗길 수는 없다.
“세상에,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주먹을 꽉 쥐며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제롬이 들어왔다.
제롬은 호들갑을 떨며 헤르윈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하시나요? 아니면, 열이 있다던지…….”
“이제 괜찮아. 아픈 곳 하나 없어.”
“하아, 정말 다행입니다. 다음부터는 아프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서 아프시니 제가 다 불안합니다.”
“불안할 것까지야 뭐 있겠어. 그동안 챙겨줘서 고맙다.”
“고마우면 앞으로 술은 일절 드시지 마십시오! 이놈의 병은 전부 그 술 때문입니다! 적어도 안주라도 드시지 빈 속에 술만 들이부으니 기력이 약해지시지 않습니까!”
울상을 짓던 것도 잠시 제롬이 잔소리를 쏟아붓자 헤르윈은 곧바로 질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며칠 동안 누워있었던 거야?”
“도련님이 금요일 밤에 쓰러지셨으니까… 거진 3일 됐네요. 오늘 월요일이거든요.”
“3일씩이나 앓아누웠다니…….”
그저 가벼운 몸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꽤나 오랜 기간 침대에 누워있었다.
“누워 계신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진 기억나십니까?”
“드문드문. 어머니가 오신 건 알고 있어.”
“주말에는 헨리 도련님이 방문하셔서 도련님의 상태를 살펴보셨습니다.”
“헨리가? 그 녀석 웬일로 기특한 짓을.”
우애 좋은 형제라고 할지라도 서로 딱딱하게 구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전에 헨리와 루시아의 일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지 않았던가.
‘헨리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간 거였지만.’
씩씩거리던 헨리를 떠올리며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걱정 돼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확실히 도련님께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하시기는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얼추 예상이 됐다.
그때,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밥을 먹긴 했던가?”
“잘 드시진 못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음식을 가져오라 일러두겠습니다.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신가요?”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되도록이면 제일 빨리 나오는 걸로.”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롬이 후다닥 밖으로 나가고 나서 헤르윈은 침대에서 벗어나 제 몸을 내려다봤다.
3일 내리 열에 시달렸기에 옷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찝찝함을 씻겨내기 위해 헤르윈은 웃옷을 벗었다.
“아, 맞다. 도련님.”
딱 욕실에 들어가려던 찰나 밖으로 나갔던 제롬이 다시 찾아왔다.
“주말에 헨리 도련님뿐만 아니라 아그네스 영애께서도 방문하셨습니다.”
“뭐?”
루시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헤르윈은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 사실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자, 잠깐. 루시아가 왔었다고? 대체 언제? 나는 그런 기억이…….”
“토요일 날 마님이랑 같이 오셨습니다. 도련님께서 깨어나시면 얘기하고 가시라 말씀드렸는데, 그냥 얼굴만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대체 어쩌다가 찾아온 걸까? 혹시 자신이 아픈 걸 알고 걱정되어서 온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 설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루시아와 키스했던 꿈을 떠올렸다.
다른 것들보다 유독 생생하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헤르윈은 귓불을 붉히며 다시금 열이 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한번 올라간 입가가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