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29)
  • <79화>

    “……너는 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모양이네.”

    “아니,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하지만, 부모니까 알잖아. 자식이 힘들어하는 건.”

    줄리안의 말을 듣고 스칼렛은 침대에서 끙끙 앓고 있는 헤르윈을 떠올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스칼렛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내려온 잔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루시아가 우리 집안으로 들어 오면 잘해줄 자신 있었는데.”

    줄리안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스칼렛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기에 아쉬운 것은 줄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어제 있었던 일을 따지려고 온 거였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다.”

    “어제 일?”

    “어제 헤르윈을 하루 종일 밖에 세워뒀잖아.”

    줄리안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서서히 낯이 창백해졌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헤르윈이 우리 집에 왔었어?”

    “몰랐던 모양이네? 난 헤르윈이 하도 루시아한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길래 너희가 애한테 벌이라도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애가 미워도 내쫓는 건 경우가 아니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창백한 낯을 봐서는 줄리안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다른 사람이 그랬다는 건가?

    ‘혹시 루시아가…….’

    “정말, 미안해. 난 그런 일이 있던 것도 몰랐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야, 내 아들도 잘한 건 없지.”

    스칼렛은 덤덤하게 줄리안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르윈의 일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던 줄리안은 스칼렛을 쳐다봤다.

    “지금 가려고?”

    “응, 아픈 애 두고 왔더니 조금 신경 쓰이네. 당분간은 수도에 있을 거니까 자주 보자.”

    “잠깐, 내가 배웅해줄게.”

    “괜찮아. 내가 알아서 갈 수 있어. 나중에 보자.”

    결국 줄리안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온 스칼렛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라도 낼 걸 그랬나.’

    사실 마차를 타고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제 귀한 아들을 밖으로 내쫓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었다.

    하지만, 줄리안과 대화를 하고 그녀가 루시아 얘기를 하자 놀랍게도 화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줄리안도 자신 못지않게 자식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응을 봐선 헤르윈이 잘못한 게 맞는 것 같고.’

    어떤 일이든 웬만하면 웃어넘기는 줄리안이 그리 진지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헤르윈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니 답답함만 늘어갔다.

    결국 의문은 풀지 못하고 정문으로 나가던 그때, 어디선가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고, 공작 부인!”

    꾀꼬리처럼 울리는 말간 목소리에 스칼렛은 뒤를 돌아봤다.

    루시아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스칼렛은 굳었던 입매를 풀곤 활짝 웃었다.

    “세상에, 루시아.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어엿한 숙녀가 다 됐네.”

    “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잘 지내고말고.”

    작은 체구로 쪼르르 오는 것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170cm에 가까운 스칼렛의 눈에 루시아는 더욱 귀여워 보였다.

    “부인?”

    스칼렛이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루시아는 발그레 달아오른 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칼렛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다 루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어쩜, 보면 볼수록 더 귀여워지니! 지금이라도 내 딸 할까?”

    “하, 하하…….”

    스칼렛 품에 안긴 루시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스칼렛이 매번 루시아를 볼 때마다 하던 말이기에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네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 루시아가 멈칫했다. 생각 없이 내뱉던 스칼렛도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알아차리며 입을 가렸다.

    “농담이야. 농담. 아니, 방금 전에 한 말은 진심이긴 하지만…….”

    괜히 제 발 저려 두서없이 말을 늘어뜨리던 스칼렛은 루시아의 말간 벽안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크흠, 얘기 들었단다. 약혼을 한다지?”

    “아…….”

    스칼렛이 알 거라곤 미처 예상을 못했는지 루시아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어색하게 뒷목을 어루만지는 손과, 저와 마주치지 못하는 눈동자, 그리고 쭈뼛거리는 몸까지.

    루시아의 반응에 스칼렛은 내심 놀랐다.

    “헤르윈이 말했나 보네요.”

    어쩐지 루시아의 얼굴에 옅은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문득 짐승 같은 육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스칼렛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예상이 맞는지 떠보기로 했다.

    “아니, 헤르윈이 아니라 헨리가 알려줬다. 헤르윈은 내게 그런 말 한 적 없어.”

    “아…그, 그러세요?”

    뻣뻣했던 그녀의 뺨이 부드럽게 풀리며 루시아가 괜한 오해를 했다며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어쩐 일로 수도까지 내려오셨어요?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네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단다.”

    “네?”

    “나는 분명 너를 헤르윈의 짝으로 점찍어놨는데 네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니 얼마나 놀랐던지.”

    루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듣자 하니 꽤나 약혼이 진전된 상태인가 보더구나.”

    부끄러워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상황이 올 거란 걸 오래전부터 각오해왔으면서 막상 스칼렛 앞에 서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칼렛의 얼굴에서 어제 제게 고백하던 헤르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곧… 약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순간 스칼렛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래? 줄리안은 아직 그런 얘기까진 오가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제 나눈 얘기라서요. 나중에 약혼식을 올리게 되면 초대장 보내드릴게요.”

    루시아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기는 것처럼 그녀의 감정 또한 감추려 했다.

    꼭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미련이 남은 것 같아 보였다.

    ‘내 착각인가?’

    제멋대로 과대 해석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예상이 맞다면…….

    잠시 고민하던 스칼렛은 결국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헤르윈은 포기했니?”

    “……네?”

    “네가 헤르윈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오해라면 미안하구나.”

    “……….”

    루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너무 돌직구를 날린 건가 싶어 스칼렛은 잠시 후회했다.

    ‘그래도 이대로 넘길 수는 없지.’

    이번이 아니면 루시아의 진심을 알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다.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야. 헤르윈이 많이 부족할지 몰라도 네가 우리 가문에 들어왔으면 했어. 이건 나뿐만 아니라 그이도 마찬가지란다.”

    루시아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토록 헤르윈에게 거절당했었는데, 정작 그의 가족들은 자신을 받아들일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결혼이란 게 한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도 지금은 다른 사람이 있고요.”

    내뱉은 말이 스스로에게도 창이 되어 돌아왔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억누르며 루시아는 애써 웃었다.

    “헤르윈도 분명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루시아가 마음을 감추려 노력했음에도 스칼렛의 눈엔 그녀의 본심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엇갈린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마음은 아직 서로를 향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자신이 밀어붙인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기에 스칼렛은 여기서 이만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구나. 루시아, 늦었지만 약혼 축하한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해요.”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나중에 북부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들르마.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스칼렛을 배웅하기 위해 루시아가 그녀의 곁을 따랐다.

    마차에 오르는 스칼렛을 보며 루시아는 초조함을 느꼈다.

    사실 스칼렛을 봤을 때부터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저, 저기……!”

    결국 루시아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칼렛을 붙잡았다.

    “혹시… 헤르윈 어디 아픈 곳 없나요?”

    스칼렛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뒤돌아보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루시아는 스칼렛과 눈도 맞추지 못한 채 횡설수설했다.

    “어, 어제 잠깐 봤었는데 상태가 이상했던 것 같아서요. 열도 조금 있었던 것 같고…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헤르윈은 지금 침대에 누워있어.”

    스칼렛의 말을 듣자마자 루시아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루시아가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졌다. 절박한 얼굴 가운데에 아직 헤르윈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다니요! 어디가 아파요? 잔병 한 번 앓은 적 없던 애인데……!”

    “자, 자 좀 진정하렴.”

    저도 모르게 스칼렛의 팔까지 붙잡았던 루시아는 뒤늦게 정신 차렸다.

    스칼렛은 내심 미소 지으며 루시아를 토닥였다.

    “어제 열이 펄펄 오른 채로 늦게 들어왔단다. 의사 말로는 감기라고 하더구나. 어제에 비해 열은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푹 쉬어야 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병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렴.”

    “열이…….”

    어쩐지 평소보다 그의 체온이 뜨거웠다 싶었다. 그런 아픈 사람을 하루 종일 밖에 세워두고 매몰차게 집에 들어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자업자득이지 뭐. 그 전부터 헤르윈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거든.”

    “전부터 몸이 안 좋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제롬의 말로는 일주일 내내 식사도 거르고 술만 마셨다고 하는구나. 술독에 오르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어.”

    일주일 전이라면 크리스틴 파티가 있었던 날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술에 입도 안 대는 사람이 그리 술을 마신 걸까?

    헤르윈이 걱정됐다. 그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루시아가 입술을 앙다물며 주먹을 꽉 쥐자 스칼렛이 슬쩍 말했다.

    “정 걱정되면 헤르윈 좀 보고 갈래?”

    “……제가요?”

    “그래. 헤르윈도 너를 보면 조금은 기운을 차릴 거란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고 싶다는 마음과 가서는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갈게요. 저 얼른 준비하고 올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황급히 저택으로 들어가는 루시아를 보며 스칼렛은 작은 웃음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헤르윈이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비록 지금 루시아에게 약혼자가 있을지라도…….

    “결혼도 아니고 약혼인데 뭐.”

    귀족사회에서 파혼은 꽤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 남들 눈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애초에 누군가가 루시아와 헤르윈을 보고 수군거린다면 가만히 있을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헤르윈 고 녀석 깜짝 놀라겠네.”

    헤르윈이 루시아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제 아들을 어떻게 골려줄까 고민하던 스칼렛은 어느새 드레스를 갈아입고 온 루시아를 발견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한층 아름다워진 루시아를 보고 스칼렛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아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자, 그럼 이만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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