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29)

<75화>

헤르윈은 점점 멀어지는 루시아를 무력하게 쳐다봤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이미 제 곁을 떠나고 있었다. 이제 영영 다시는 그녀를…….

‘시작도 안 했으면서 벌써부터 약한 소리야?’

문득 아리스타의 말이 떠오른 헤르윈은 손을 움찔 떨었다.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모든 것을 놓쳐버리면 그때는 더 후회할 텐데?’

“맞아. 후회할 거야…….”

‘이번엔 네 차례야. 네가 먼저 용기를 내라고.’

아리스타의 말이 맞았다. 루시아는 숱한 거절을 당했음에도 그동안 열심히 자신에게 다가왔었다. 그녀에 비하면 자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루시아의 거절이 가슴 아파도,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릴 것만 같아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헤르윈은 주먹을 꽉 쥐며 성큼성큼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리자 루시아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울렸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직은 제게 흔들린다는 것만 같아 다행이었다.

헤르윈은 루시아의 어깨를 잡아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금 뭐 하는…….”

“난 너 절대 포기 안 해.”

굳건한 붉은 눈동자를 보며 루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엔 내가 너를 기다릴게.”

루시아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헤르윈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떨리는 입술이 살포시 루시아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사랑해, 루시아.”

헤르윈의 눈가가 붉어지고,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멍하니 헤르윈을 보던 루시아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뿌리치곤 저택으로 들어섰다.

루시아가 저택에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헤르윈은 도통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 * *

“아가씨, 오셨어요? 오늘은 조금 늦으셨…….”

루시아를 발견한 세인이 그녀를 반겼다. 루시아에게 다가가려던 것도 잠시 루시아가 먼저 세인을 지나쳤다.

놀란 세인이 뒤를 돌아 황급히 멀어지는 루시아를 쳐다봤다.

“우시는 건가?”

우는 거라고 하기엔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붉었다.

우는 것보다도…….

“꼭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은데.”

하던 일을 마저 할까, 루시아와 대화를 나눌까 고민하던 세인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일단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드리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한편 서둘러 방으로 들어온 루시아는 문가에 몸을 기대 스르륵 무너졌다.

“하아, 하아…….”

가슴이 너무 뛰어서 숨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꿈에서 봤던 것보다 더 생생한 그의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손등에 아직도 그의 숨결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파르르 떨리는 제 손등을 꽉 잡았다.

“헤르윈이 나를…….”

좋아한다. 한 번도 자신을 이성으로 본 적 없다던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믿기 힘든 말이라 주책없이 뛰는 가슴에 불안감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저를 보던 그의 눈빛과 마지막에 붙잡은 손길이 도무지 거짓처럼 보이지 않아 자꾸만 흔들렸다.

“하, 하하…….”

지금 나오는 웃음이 허탈함인지 환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계속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내 고백은 99번째에서 끝났는데…….”

앞으로 100번의 고백을 채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 고백을 헤르윈이 채울 줄은 몰랐다.

99번의 고백, 13년이란 세월을 돌고 돌아 다 포기한 지금. 헤르윈 드디어 자신을 봐줬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헤르윈의 고백에 넋을 놓던 루시아는 서서히 현실을 직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째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헤르윈의 고백이 정말 꿈만 같고 날아갈 듯 기쁜 건 사실이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오늘 베른과 약혼을 약속했다. 말이 약혼이지 약혼식을 치르고 나면 곧바로 그와 결혼할 것이 뻔했다.

이미 다른 남자와의 미래를 약속한 자신은 헤르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이편이 훨씬 나아.”

헤르윈은 친한 친구를 뺏긴다는 사실에 대한 질투심과 사랑의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거다.

아니, 꼭 착각이어야만 한다. 착각이 아니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드디어 헤르윈에 대한 마음을 놓아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준비를 마쳤는데 이제 와서 붙잡는다니 도무지 말이 되질 않는다.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루시아는 눈가를 비볐다.

그동안 헤르윈을 좋아했던 감정과 그를 포기하려 고생했던 나날, 방금 전 자신을 좋아한다는 헤르윈의 말에 기뻐하던 마음이 충돌해 머리를 어지럽혔다.

소리 없이 뚝뚝 눈물을 흘리며 울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루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

“큼, 크흠… 누, 누구세요?”

“루시아, 나야. 잠깐 들어가도 돼?”

루카스였다. 기껏해야 세인일 거라 생각했던 루시아는 허둥지둥 눈물을 닦고,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서둘러 아무 일도 없는 척 소파에 앉았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목소리가 바로 문 앞에서 들렸는데 언제 거기로 갔어?”

“무, 무슨 소리야. 난 계속 여기 있었는데.”

“그래? 아니면 말고.”

루카스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시아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아니, 뭐… 별일 없나 싶어서…….”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루시아의 얼굴을 보게 된 루카스가 멈칫했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너, 울었어?”

“……어?”

“울었냐고.”

눈물도 다 닦았고, 헐떡이던 숨도 고르게 만들었는데 대체 자신이 운 것을 어떻게 안 걸까?

루시아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자 루카스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쫓아버리는 건데…….”

루카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루시아의 귓가에 꽂혔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던 루시아는 순간 대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헤르윈을 떠올렸다.

제집처럼 이곳을 드나들던 그가 왜 안 들어왔나 했는데…….

“오빠, 혹시 헤르윈 여기 왔었어?”

“그 새끼랑 마주쳤구나.”

갑작스러운 욕설에 루시아가 기겁했다.

“그 새끼라니…! 헤르윈한테 왜 그런 말을 해! 어쩐지, 저택에 안 들어오고 대문 앞에 있더라니! 손님이 왔으면 들여보내야지!”

“손님? 손님은 누가 손님이야.”

“오빠!”

루시아는 루카스를 경악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무리 자신과 헤르윈 사이에 일이 있다고 해도 루카스 또한 헤르윈과 친한 사이인데.

루카스가 헤르윈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설마 내가 헤르윈을 좋아했던 것 때문에 그래? 그러지 마. 오빠 헤르윈이랑 친하잖아. 언제는 나보다 더 동생 같다며. 아무리 나랑 헤르윈 사이에 그런 일이 있어도…….”

“루시아, 지금 그 녀석 편드는 거야?”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이니까 하는 소리지! 오빠까지 이러면 헤르윈 상처받는다고!”

“하, 상처? 걔가 너한테 상처를 준 걸 뻔히 아는데 나는 바보처럼 허허 웃으며 그 녀석을 받아줘야 해?”

“……오빠.”

이렇게 루카스의 서늘한 눈빛과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난생처음이었다. 루시아는 루카스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녀석이 너를 거절했을 때부터 걔는 내 인생에서 지웠어.”

“하지만, 내가 1학년 때 헤르윈에게 고백했을 때는 가만히 있었잖아.”

헤르윈 생일에 있었던 사건 이후로 루카스가 헤르윈을 조금 어색하게 대하긴 했지만, 금세 사이가 좋아져 친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땐 너희 둘의 일이니까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지. 나는 너희 둘이 서로를 좋아하는 줄 알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너희가 연인 사이가 될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헤르윈한테 여러 번 고백해왔다고. 그러면 그 녀석은 네 마음을 뻔히 알면서 여지를 줬다는 거 아니야.”

“아니야. 헤르윈은 그런 적 없어.”

루시아가 계속 헤르윈을 두둔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루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내 눈엔 그 녀석이 너를 갖고 논 걸로밖에 안 보여. 너한테 상처라는 상처는 다 줘 놓고 오늘 갑자기 찾아와선……!”

하지만, 곧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튼! 난 그 녀석 이제 내 인생에 지웠어. 네게 상처 준 인간을 우리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안 그래도 어머니랑 아버지도 헤르윈을 탐탁잖아 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 불편한데 오빠까지 그러면 어떡해. 이건 나랑 헤르윈의 문제야. 오빠랑 부모님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네 일인데 어떻게 우리가 가만히 있어.”

무슨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질 않자 루시아가 루카스를 노려봤다.

“계속 그런 말 할 거면 내 방에서 나가.”

루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밀어내자 루카스는 당황했다.

“자, 잠깐 루시아! 오빠 말 좀 들어 봐……!”

“싫어! 오빠가 그럴수록 내가 헤르윈한테 미안해지는 거 몰라서 그래? 지금은 오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쾅!

결국 방에서 쫓겨난 루카스는 코앞에서 세게 닫힌 문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그는 문을 간절히 두드리며 말 좀 들어달라며 애원했지만, 루시아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루카스가 한숨을 내쉬며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자신이라고 헤르윈을 내쫓는 게 마냥 마음에 편하겠냔 말이다.

루시아의 말대로 헤르윈을 제 친동생처럼 여겼기에 그가 루시아를 상처 줬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루시아가 맞선을 본 이유가 헤르윈에게 받은 상처 때문인 걸 알고 난 후부터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에는 루시아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속으로는 헤르윈에 대한 원망을 많이 했다.

헤르윈이 루시아만 받아주면 루시아가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없었을 것이다.

루시아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소와 같이 생활해도 가족의 눈에는 그녀가 하루하루 활기를 잃어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루시아가 없는 곳에서 요한과 줄리안이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고 걱정을 했는지 그녀는 모른다.

‘하필이면 루시아가 마음을 다잡고 나서야 오다니…….’

지금으로부터 7시간 전, 헤르윈이 저택에 방문했었다.

마침 집에는 루카스 뿐이라 루카스가 그를 맞이했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루시아를 힘들게 한 원흉. 루카스는 도저히 헤르윈을 곱게 볼 수 없었다.

‘루시아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루시아, 여기 있어?’

헤르윈은 저번에 마주했을 때보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그를 보며 루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루시아 지금 없다.’

‘그래? 그러면 언제쯤 돌아오는…….’

‘그 전에 너. 네가 무슨 낯으로 루시아를 찾아온 거야?’

오직 루시아에게만 정신이 팔려있던 헤르윈은 루카스의 날 선 목소리에 그가 자신을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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