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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129)

<74화>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 저녁. 이제야 저택으로 돌아간 루시아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려야겠군요. 여름이 지나고 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른 시일 내에 해요. 어차피 저희 결혼도 할 거잖아요?’

드디어 베른과 약혼을 결정했다.

베른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파고든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언제 흔들렸냐는 듯 자신과의 약혼을 받아들이고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하여 늦은 시간까지 베른과 함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결과 최대한 여름이 가기 전에 약혼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먼저 빨리 약혼식을 치르자 말하긴 했지만, 군말 없이 따르는 베른을 보고 있으면 괜히 악역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제 감정을 알아차렸는지 베른은 저택을 떠나는 루시아에게 말을 했다.

‘루시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제 결정입니다.’

괜한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그가 위로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야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지만, 베른은 셀린느와 한때 연인이었고 결혼까지 기약했던 사이였다.

게다가 오늘 그녀의 입으로 자유로운 몸이 됐다고 하지 않았던가.

베른이 말하길 셀린느와 헤어지게 된 이유엔 부모님의 반대가 컸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베른의 아버지, 전대 후작께서 돌아가셨고, 영영 다른 사람에게 가 버렸다 생각한 셀린느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베른에겐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1년 동안 칩거하며 아무도 만나지 못할 만큼 셀린느를 사랑했던 그였으니까.

처음에는 베른이 처한 상황이 안타까워, 전에 베른이 제게 그리했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약혼하자는 말이 튀어 나갔던 건데, 설마 베른이 곧바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내가 베른이었어도 그랬을까?’

루시아는 눈을 감고 베른과 셀린느를 떠올렸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모습이 자신과 헤르윈으로 바뀌었다.

‘그 남자 말고 나랑 결혼하자 루시아.’

달콤하면서도 현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상상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랑 베른은 출발 선상부터 다른데 왜 똑같다고 생각한 거지?”

셀린느는 과거 베른의 연인이었기에 그녀가 베른을 붙잡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자신과 헤르윈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굳이 그와의 사이에 수식어를 붙이자면 ‘소꿉친구’, ‘일방적인 짝사랑’ 정도가 될 것이다.

헤르윈을 많이 놓아 주었다 생각했는데… 새삼 그와의 정의를 내리니 비참해졌다.

“그래도 만약 헤르윈이 나를 붙잡는다면…….”

흔들릴 것 같은데.

물론 베른이 마음에 걸리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이성으로 본다거나, 놓치기 싫을 만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그와 약혼을 약속했기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가 나타났다고 사람을 무정히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베른도 나를 선택한 걸까?’

자신과 닮은 그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셀린느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눈치를 보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 하나만으로 자신을 고른 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하아,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타인의 마음은 어떻게 알겠는가.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괜히 머리가 복잡해진 모양이다.

루시아는 마차 벽에 나른하게 등을 기댔다.

‘피곤하니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최대한 머리를 비우며 눈을 감던 루시아는 서서히 마차가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마부가 도착했다고 말하길 기다리던 그때.

“아, 아가씨.”

조금은 당황한 듯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페네우스 가의 마차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뜻밖의 말에 루시아는 눈을 뜨며 창밖을 살폈다. 마부의 말대로 페네우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저택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헤르윈?”

머지않아 마차에서 헤르윈이 내려왔다.

베른과 아리스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을 때 이후로 그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며칠 전 크리스틴 파티에서도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헤르윈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었다.

기껏해야 한 달만에 만나는 건데도 어쩐지 헤르윈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유독 평소보다 가슴이 더 뛰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꾹 누르던 루시아는 헤르윈이 자신이 탄 마차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흠칫 떨었다.

똑똑-

“루시아, 맞지?”

잠시 멍하니 있던 루시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차 문을 열었다.

“헤르윈.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루시아가 마차에서 나오자 헤르윈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혹시 계속 여기서 기다렸던 거야? 안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저택에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대기한 헤르윈이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시아는 헤르윈의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을 눈치챘다.

그의 눈 밑으로 검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았고, 볼살이 전보다 훨씬 홀쭉하게 들어가 피골이 상접했다.

“세상에! 너 얼굴이 대체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루시아의 손이 얼굴이 닿자 헤르윈이 움찔 떨었다.

“저번보다 마른 것 같은데? 다크서클은 또 왜 생겼어? 혹시 요즘 잠을 못 자? 아니면 정말 아팠던 거야?”

헤르윈이 아픈 줄 알고 루시아는 자연스레 그를 걱정하며 허둥지둥거렸다.

“안 되겠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자. 일단 네 상태도 보고, 의사도 불러서…….”

팔을 붙잡은 작은 손을 보며 헤르윈은 조심스레 작은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그제야 루시아가 멈칫하며 헤르윈을 돌아봤다. 헤르윈의 표정을 제대로 본 루시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헤르윈이. 그 헤르윈이 얼굴을 붉힌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루시아는 저 붉은 눈이 무엇을 담고 있는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설마…….’

“……루시아.”

입을 달싹이던 헤르윈이 한 발짝 다가왔다.

“캐스퍼 후작이랑 헤어지면 안 될까?”

루시아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네가 캐스퍼 후작이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아니, 네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거 자체가 싫어.”

불과 10분 전, 마차 안에서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충격적인 말이 헤르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루시아는 헤르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헤르윈이 앞에서 무어라 말을 하곤 있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명처럼 웅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루시아는 도저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계속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헤르윈은 루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잠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눈에 띄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노을보다 헤르윈의 얼굴이 더 붉었고, 제 손을 붙잡은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모두 진심이야. 저번처럼 그저 캐스퍼 후작이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헤르윈.”

횡설수설 말하던 헤르윈이 멈칫했다. 그제야 말간 벽안과 눈이 마주친 헤르윈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나 좋아해?”

헤르윈의 귓불이 더욱 달아올랐다. 잠시 말이 없던 헤르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응.”

고개를 푹 숙였음에도 그의 키는 컸고, 루시아는 작았기에 헤르윈의 얼굴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아리스타에게만 보여주던, 아니 그보다 더 사랑의 빠진 얼굴로 헤르윈이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한 참동안 얼어붙어 헤르윈을 쳐다보던 루시아의 입가가 서서히 굳었다.

이내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아니, 거짓말이야. 네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루시아는 지금 헤르윈이 자신에게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장난 하나도 재미없어. 장난칠 생각으로 온 거면 당장 돌아가.”

루시아가 돌아서려 하자 헤르윈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루시아,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이거 놔!”

루시아는 헤르윈의 손을 뿌리쳤다. 루시아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넌 나 단 한 번도 이성으로 본 적 없잖아. 내가 친구로밖에 안 보인다며, 아리스타를 좋아한다며! 그런데 왜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루시아가 마저 말을 다 잇기 전에 헤르윈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진한 머스크향이 코끝에 느껴졌다.

“그동안 네게 모질게 굴어서 미안해. 네게 상처 준 거,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어. 루시아, 나는 아리스타를 좋아한 게 아니야.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꿈에서 염원할 정도로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을 내뱉는 헤르윈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네가 내 옆에 있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어. 네가 지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 그냥 네가 주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 착각했어.”

헤르윈은 루시아의 머리카락에 제 얼굴을 묻었다.

“늘 내 시선 끝에는 네가 있었는데. 바보같이 그걸 너무 늦게 알아챘어.”

“네 말 못 믿어… 너는 계속 아리스타를 좋아해 왔잖아…….”

헤르윈의 절절한 호소에도 루시아는 도저히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리스타는 그저 동경이야. 동경심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나 봐. 내 말 믿기지 않겠지만, 아리스타를 좋아한다 착각했을 때도 나는 아리스타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아니야. 네가 캐스퍼 후작과 있다고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

으스러질 듯 저를 꽉 끌어안는 헤르윈에게서 그의 진심이 흘러들어왔다.

헤르윈의 오랜 친구로서, 그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그가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기간 그에게 차여와 상처 입었던 마음에 스멀스멀 불안감이 차올랐다.

고백할 때면 아리스타를 좋아한다고 거절해왔던 그가 이제 와서 그녀는 동경했던 거라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그저 소꿉친구가 제 곁을 떠나는 게 싫어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또 상처받고 싶지 않아.’

그가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정말 그때는 죽고 싶어질 것이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거, 네 착각이야.”

“……루시아.”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치?”

한걸음 물러선 헤르윈은 루시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음의 벽을 세운 루시아에게 헤르윈은 깊은 절망을 느꼈다.

그녀에게 제 마음이 닿지 않았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숨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헤르윈은 입술을 깨물며 의지를 다졌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믿을 수 없다면 다시 말할게. 사랑해, 루시아.”

루시아의 벽안이 살짝 흔들렸다. 이내 루시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나… 베른과 약혼하기로 했어.”

헤르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오늘 그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받고, 약혼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왔어. 그러니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말해도, 이미 늦었어.”

겨우 진실을 고한 루시아는 주위가 조용해진 것에 의아함을 느끼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절망 어린 헤르윈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루시아는 애써 헤르윈을 외면하곤 걸음을 옮겼다.

‘이걸로 된 거야.’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의 마음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라면 자신 같은 건 금방 잊고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자신대로, 헤르윈은 헤르윈대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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