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헤르윈이 루시아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챈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 역시 헤르윈과 루시아가 붙어있으면 은근 속닥거리고는 했다.
“헤르윈 저 녀석 눈빛 좀 봐라.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네.”
“난 처음부터 알았어. 학기 초에 내가 루시아랑 대화할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중간에 끼어들었거든.”
헤르윈의 마음도 알았겠다. 친구들은 암묵적으로, 은근슬쩍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눈치 없게 비앙카가 중간에 두 사람을 훼방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헤르윈의 짝사랑을 조용히 응원했었다.
그러다 헤르윈의 생일날, 그 사건이 터졌다.
“설마 루시아도 헤르윈을 좋아했을 줄은 몰랐어요.”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라는 건 좋은 일이지만 하필이면 그걸 전교생이 들어서…….”
“비앙카 이 나쁜-! 그 녀석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더 멀어졌잖아!”
헤르윈의 생일날, 전교생 앞에서 온갖 모욕을 당한 루시아는 다음날부터 헤르윈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 피해 다녔다.
그녀가 상처를 받은 것이 눈에 훤했기에 비앙카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헤르윈도 루시아와 같은 마음이니 두 사람이 대화로 이번 사태를 잘 풀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진짜 사귐으로서 교내에 퍼진 소문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으면 하는 소망도 있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두 사람은 서먹서먹하게 지냈다. 다행히 방학식부터 사이가 다시 좋아진 것 같았지만,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지내는 둘의 모습에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라 생각했을 뿐.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헤르윈도 루시아를 좋아하는 눈치이니 언젠가 사귀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 2학기가 되고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됐을 때도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했다.
어쩔 때 보면 연인처럼 가까워 보이면서도, 친구로만 보일 때도 있었다.
“저 녀석들 사실 우리들 다 속이고 비밀 연애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좀 조용하지 않아?”
“연애는 안 하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따로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그래도 가끔은 둘이 같이 사라졌다가 나타나잖아.”
온갖 추측만이 난무할 뿐 그 누구도 헤르윈과 루시아가 사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루시아가 베른을 데리고 나타나기 전까지 이어졌었다.
“사귀는데 말을 하지 않는 거라면 서운했겠지만, 둘이 진짜로 사귀지 않는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너희 둘을 엮어주려고 했거든. 가끔 에단이랑 브라이언이 너희한테 짓궂은 장난도 쳤잖아. 그거 다 너랑 루시아 엮어주려고 했던 거야.”
아리스타의 말을 들은 헤르윈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 루시아를 좋아하는 것이 맞다. 자각은 하지 못했어도 아카데미에 다니기 전부터 자신은 루시아를 좋아해왔다.
그런데 아리스타랑 다른 친구들이 먼저 제 감정을 알아챘다고?
“나는…….”
드디어 헤르윈이 입을 열자 아리스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너를 좋아했었어…….”
“……….”
저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헤르윈 때문에 순간 아리스타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뒤늦게 이해한 아리스타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어리기 시작했다.
“뭐, 뭐? 나를? 네가?”
당황하던 것도 잠시, 아리스타는 제게 좋아한다 말하는 헤르윈의 건조한 눈빛을 발견했다.
아리스타가 서서히 진정하며 굳은 얼굴로 헤르윈을 쳐다봤다.
“‘좋아했다.’라는 건 과거형이네.”
헤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외의 전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리스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다는 건데?”
“오거로부터 네가 나를 구해줬을 때.”
생각보다 꽤 오래전 일이라 아리스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언제까지 나를 좋아한다 생각했는데?”
“아마 2주 전.”
“뭐? 2주 전?”
기껏 해봐야 아카데미 시절까지겠지, 생각하던 아리스타는 최근까지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말에 경악했다.
헤르윈이 자신을 좋아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참으로 이상했다.
이제껏 자신을 좋아해 온 남자들은 꽤 많았고, 그들의 마음을 눈치채는 건 그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헤르윈은 그런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루시아를 좋아한다 생각했는데…….
루시아를 생각하던 아리스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걸 루시아가 아는 건 아니지?”
헤르윈이 고개를 푹 숙이자 아리스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내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헤르윈의 머리를 때렸다.
“이 멍청한 새끼가! 너 미쳤어?! 그걸 왜 말해! 루시아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대체 루시아가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
“1학년 초부터.”
헤르윈이 자신을 좋아했다고 말한 시기와 맞물려 떨어졌다.
아리스타는 그 당시 루시아가 자신을 피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헤르윈 때문에 루시아와 멀어질 뻔했던 걸 깨닫자 속에서 열불이 올랐다.
“이……!”
아리스타는 입을 뻐끔거리며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겨우 집어삼켰다. 그녀는 겨우겨우 분노를 억누르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설마 루시아가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겠다고 한 것도 그 이유인가?”
“……내게 마지막 고백을 하고 난 다음 바로 약혼자를 데려왔어.”
“고백을 했었어?”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고백한 것까진 몰랐다.
1학년 헤르윈 생일 때 있었던 사건 이후로 그런 기색은 전혀 못 느꼈는데…….
잠시 넋을 놓던 아리스타가 퍼뜩 무언가 떠올리며 헤르윈을 쳐다봤다.
“설마 내 핑계를 대면서 고백을 거절했던 거야?”
헤르윈은 말이 없었다. 제 말이 맞아떨어지자 아리스타가 탄식을 흘렸다.
루시아와 헤르윈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을 줄은 더더욱 상상도 못했다.
저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도저히 루시아를 볼 낯이 없었다.
‘루시아는 대체 무슨 심정으로…….’
만약 자신이 루시아와 같은 처지에 놓여, 좋아하는 사람이 제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다면…….
아리스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헤르윈을 노려봤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좋아했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너를 오거로부터 구해줘서? 아니면 검술 친구라서?”
“……네게서는 다른 애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어.”
“그 특별한 감정이 뭔데?”
“글쎄. 그냥 너와 있으면 즐겁고, 심심하지 않고, 네가 있으면 나까지 덩달아 실력이 향상되는 느낌이었지.”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자신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사랑이나 애정 같은 애틋한 감정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다시 질문할게. 너 나랑 연애하고 싶었어?”
헤르윈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랑 키스하는 상상해 봤어?”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루시아처럼 다른 사람이랑 약혼한다 했으면 어땠을 것 같아?”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와 만나길 바랐겠지.”
“그 사람이 넌 아닌 거지?”
“응.”
역시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정말 좋아했다면 그는 진작에 고백을 했을 것이고, 고백을 하지 못하더라도 사귀거나 약혼을 하는 상상의 나래를 한 번쯤은 펼쳐봤을 것이다.
‘……나처럼.’
아리스타는 잠시 루카스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할게. 루시아가 캐스퍼 후작과 약혼한다 했을 때, 기분 어땠어?”
헤르윈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매끈했던 그의 이마가 순식간에 구겨졌다.
“기분…이상했어…….”
“루시아가 다른 남자 손을 잡고 데이트했을 때는?”
“둘을 방해하고 싶었어.”
“……루시아가 캐스퍼 후작과 키스했을 때는?”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확실히 비교되는 답변이었다. 이리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으면서 그는 왜 제 마음을 헤맸던 걸까?
“……우리가 왜 네가 루시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알아?”
분노로 주먹을 파르르 떨던 헤르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루시아를 볼 때의 넌, 늘 사랑에 빠진 눈을 하고 있었거든.”
“……내가?”
“그래. 다른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관심도 없으면서 오직 모든 시선은 루시아에게 쏠려있었지. 루시아에게 이변이 생기면 다른 누구보다 네가 가장 먼저 알아차리잖아.”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루시아를 보는 헤르윈의 눈빛이 훤히 보였다.
그의 시선은 늘 루시아를 쫓고 있었다.
루시아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귀신같이 알아내고, 비슷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번에 루시아를 찾아냈으며, 루시아의 사소한 반응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정작 루시아와 눈이 마주칠 때는 조금 퉁명스럽게 변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붉은 눈동자는 오직 루시아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는 나를 좋아한 게 아니야. 지금 네 답만 봐도 결과가 확실히 보이잖아.”
“그럼 내가 네게 느꼈던 감정은 대체 뭐지?”
“글쎄… 굳이 따지자면 동경 아닐까?”
동경과 사랑은 한 끗 차이. 동경도 사랑 못지않게 상대방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감정이다. 사랑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상대방을 이성으로 보느냐 아니냐일 것이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헤르윈의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는데도 정작 본인만…….
죽어가는 목소리로 헤르윈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기준치가 높았는지도 모르겠군.”
“기준치?”
“내 기준은 늘 루시아였어.”
제게 모든 것을 퍼주는 루시아. 버거울 정도로 헌신적인 루시아. 맹목적일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는 루시아.
자신은 루시아만큼이나 그녀를 좋아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시아가 주는 모든 것을 나도 똑같이 해 줄 수 있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루시아와 다르니까. 다른 감정을 들게 하니까 너를 좋아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어쩌면 루시아는 자신만을 좋아했으니, 그녀가 늘 곁에 있을 거라 자만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네.”
“하… 그러게. 바보 같네.”
허탈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물기가 서려 있었다.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리스타는 헤르윈이 조금은 불쌍했다.
“루시아를 좋아하지?”
“아니… 사랑해.”
아리스타를 좋아했다고 말했던 것에 비해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감정이 녹아있었다.
“루시아를 사랑한다면서, 이대로 혼자 술이나 퍼마시고 주저앉아있을 셈이야?”
헤르윈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루시아는 영영 다른 남자한테 가버릴 거야. 그럼 더 이상 네게 기회는 없어.”
“그건…….”
헤르윈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는 입을 꾹 다물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그래도 될까?”
“뭐?”
“루시아는 더 이상 내게 의지하지 않아. 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렸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루시아에게 다가가도 될까? 루시아가 행복하다면 나는…….”
베른과 입 맞추는 루시아를 보았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싫다고 밀어냈으면서. 이제 와 좋아한다고 말하면, 루시아가 과연 자신을 믿어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입을 떼는 것조차 무서웠다.
“시작도 안 했으면서 벌써부터 약한 소리야?”
따끔한 일침이 헤르윈의 귓가에 꽂혔다.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시작도 안 해보고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모든 것을 놓쳐버리면 그때는 더 후회할 텐데?”
“……….”
“이번엔 네 차례야. 네가 먼저 용기를 내라고.”
아리스타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제게 환하게 웃어주던 루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상상은 하기도 싫었다.
“아리스타, 고마워.”
헤르윈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는 헤르윈의 뒤를 사용인들이 쫓아갔다.
홀로 남겨진 아리스타는 제 앞에 텅 빈 소파를 보고 중얼거렸다.
“후회라…….”
헤르윈에게 한 말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에게도 포함되는 말이었다.
아리스타는 천천히 후회라는 단어를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