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똑똑-
“후작님, 아그네스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때마침 하인이 노크를 하며 루시아의 도착을 알렸다.
루시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셀린느는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베른에게서 떨어져 그와 눈을 단단히 마주쳤다.
“다음에 또 올게.”
넋을 놓은 베른을 남겨두고 셀리느는 자리를 떠났다.
하인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셀린느는 애써 무시하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이곳으로 오고 있는 루시아와 마주쳤다.
“당신은…….”
커진 눈동자와 당황한 듯한 눈빛. 그저 우연히 마주한 사람을 보는 것치고는 많이 놀란 것만 같았다.
셀린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루시아는 모든 걸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파티장에서 일부러 베른을 데리고 간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자작부인께서 방문하셨군요. 베른을 만나러 오신 걸까요?”
루시아가 놀란 기색을 감추며 선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나를 자극하려고 베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른 걸까?’
셀린느는 루시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베베 꼬아서 생각하기에는 루시아의 말간 얼굴에서 꿍꿍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자신과도 같은 마음이면 편할 텐데…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포기 못해.’
셀린느는 알게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굳어진 입가에 겨우 미소를 띠었다.
“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답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저는 이만…….”
루시아는 인사와 함께 셀린느를 스쳐지나갔다.
“아그네스 영애.”
갑자기 셀린느가 루시아를 붙잡았다.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자 셀린느는 무언가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 자작부인이 아닌 셀린느 제인슨으로 불러주십시오.”
“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셀리느는 제 할 말만 한 채 후작가를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은 루시아는 셀린느가 사라진 자리를 멀거니 쳐다봤다.
“자작부인으로 부르지 말라고?”
르마리오가 아닌 제인슨이라고 말한 걸로 봐서는 결혼 전 성인 것 같은데, 예전 성을 쓴다는 건 혹시 이혼했다는 건가?
‘이혼이라는 게 그리 쉽지 않을 텐데.’
파티가 끝난 지 겨우 일주일 언저리밖에 되지 않았다. 파티에서는 분명 자작부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에 이혼을 했다고?
‘이상하네…….’
영 이상한 부분이 많았지만, 베른과의 약속이 우선이기에 궁금증을 뒤로하고 루시아는 걸음을 옮겼다.
“베른. 오다가 르마리오 자작부인을 마주쳤는데 어떻게 된…….”
응접실로 들어서던 루시아는 멀거니 서 있는 베른을 보고 멈칫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것도 잠시 베른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빛을 보고 루시아가 베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베른. 베른! 정신 차려요!”
베른이 흠칫 떨었다. 그제야 그의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루시아……?”
“네, 저예요. 자작부인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냥 던진 말인데 베른이 눈에 띄게 동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루시아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자작부인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루시아에게 무슨 말이라도 했습니까?”
“별말은 안 했는데… 저보고 다음부터 자작부인이 아니라 제인슨으로 불러 달라 하더군요. 혹시 자작부인께서 이혼이라도 한 건가요?”
“하아…….”
베른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루시아는 당황하며 얼떨결에 베른의 손을 잡았다.
“어디 안 좋아요? 그럼 일단 소파에 앉아서…….”
“……르마리오 자작이 사고로 사망했다는군요.”
베른을 부축하던 루시아가 멈칫했다.
“더 이상 르마리오 자작부인이 아니라 이제 자유의 몸이라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말만으로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루시아는 단번에 파악했다. 그녀는 무릎을 굽혀 베른과 눈높이를 맞췄다.
“헤어지던 날, 제게 했던 모진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다며 절 붙잡았습니다. 저를 아직도 사랑한다고…….”
얼굴을 가린 큰 손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루시아는 말없이 베른의 어깨를 감싸며 그를 토닥였다.
“제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만약 셀린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베른. 날 봐요.”
루시아가 조심스레 베른의 얼굴을 감싸며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이슬이 맺힌 금안이 천천히 루시아를 담았다.
“괴로운가요?”
“……괴롭습니다.”
“베른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이미 셀린느와는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사랑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지.
이미 깊은 상처를 받은 상태에서 상대방을 다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제 눈에 베른이 깊이 상처받은 모습이 보였다.
“베른. 우리 약혼해요.”
“……네?”
“우리 약혼해요. 베른.”
베른의 얼굴을 감싼 작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베른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루시아…….”
“다시 사랑하기 힘들다면… 너무나 괴롭다면, 저랑 약혼하면 돼요. 어차피 약혼을 약속한 사이이니 새삼스러운 것도 없죠.”
“하지만, 그럼 루시아는…….”
다른 여자에게 흔들리는 자신이 그녀는 불안하지 않을까?
지금도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루시아는 담담히 제게 약혼을 말하는 걸까?
그때, 마주한 벽안이 일렁거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호수처럼, 저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베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에 베른이 저를 도와주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엔 제 차례인 것 같네요. 제가 베른의 방패가 되어줄게요.”
베른은 저를 가득 담고 있는 벽안을 지그시 쳐다봤다.
불과 5분 전, 자신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던 셀린느에 비하면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루시아의 눈동자에는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만큼 그녀는 자신을 동정하고 공감해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려 했다.
베른은 홀린 듯 천천히 루시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저라도 괜찮으신 건가요…….”
“괴로워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나중에 제가 흔들릴 땐, 그땐 베른이 저를 붙잡아주시면 됩니다.”
이대로 루시아에게 기대기만 해도 될지,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 이상으로 셀린느가 일으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이대로 휩쓸린다면 1년 동안 칩거했던 그때처럼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그 모든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베른은 겨우겨우 손을 뻗어 저를 구원해주려는 작은 손을 붙잡았다.
“부디, 부디…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베른.”
제 품에 들어온 베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꼭 사랑에 허덕이던 제 모습과 겹쳐 보여 루시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래, 이것으로 됐어.’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전엔 모든 행복이 사랑에서만 비롯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행복의 형태는 여러 가지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든 행복을 위해 나아갈 거란 걸.
‘헤르윈이 아니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어.’
베른과 약혼하기로 했으니 이제는 헤르윈이 아닌 베른과 앞으로 있을 미래를 꿈꾸며 나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베른과 함께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저번엔 베른이 도와줬다면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루시아는 베른에게서 제 모습을 투영하며 저와 똑같은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 * *
탁-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제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 휘적휘적 손을 뻗었다.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붙잡고 빈 잔에 술을 따르려 했지만, 유리병은 텅 비어 있었다.
“……없네.”
눈이 풀릴 대로 풀린 헤르윈은 유리병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푹신한 카펫 위에 유리병이 나뒹굴었다. 헤르윈의 발밑에는 적지 않은 수의 유리병이 뒹굴고 있었다.
파티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주일 동안, 그는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냅다 들이켜 마시고 있었다.
헤르윈은 원래 술과 그리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술을 멀리하면 멀리했지, 절대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일주일 내내 술만 마시고 있으니 이상했다.
결국 셋째 날에 보다 못한 제롬이 그만 마시라고, 제발 식사라도 하고 마시라 애원해 봤지만, 헤르윈은 독불장군처럼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헤르윈은 그저 텅 빈 제 술잔을 쳐다봤다.
술을 한계치 이상 마시다 보니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헤르윈은 손에 쥔 손수건을 보며 자수가 놓인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루시아가 제게 마지막으로 고백하면서 준 선물이다. 이걸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루시아를 떠올렸다.
8살, 그녀가 처음으로 공작성에 놀러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전에도 아주 어렴풋하게 루시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 기억나긴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생생하게 떠오르는 날은 바로 8살 때였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했더라.”
통통한 볼과 짧은 단발, 그리고 하늘처럼 티 없이 맑았던 벽안. 그 모든 게 완벽했다.
“아, 맞아…….”
드디어 루시아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랐다. 헤르윈이 픽 작은 웃음을 보였다.
“요정 같다고 생각했지.”
요정이 인간 세상에 잘못 떨어진 줄 알았다.
숱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어린 시절 그녀의 얼굴이 선명히 기억났다.
처음에는 눈높이가 비슷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그녀의 정수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귀여웠던 얼굴은 점점 여인의 것이 되었다.
아카데미에 다녔을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남자가 루시아에게 접근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루시아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를 좋아했던 남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루시아에게 대시할까 떠드는 놈도 있었고, 제게 루시아를 소개시켜달라고 조르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을 조용히 처리하느라 애를 먹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이미 아카데미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루시아를 좋아해왔는데 왜 아니라고 착각했을까? 왜 그녀를 그저 친구라고만 생각했을까?
진짜 친구라면 이런 욕망과 허탈감이 들지 않을 텐데.
루시아와 베른이 입 맞추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헤르윈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잠자리를 가지고, 나중에는 아이까지 낳을 거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루시아를 보고 싶지 않았다. 요정처럼 귀여운 그녀와 똑 닮은 아이가 제 핏줄이 아니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괴로움을 없애려 그리 술을 마셨건만, 잠깐 제정신을 찾은 사이 온갖 잡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헤르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롬. 제롬……!”
헤르윈은 설렁줄을 흔들어 제롬을 불렀다.
“제롬! 술 한 병만 더 갖고 와……!”
아무리 기다려도 제롬은 오지 않았다.
의아해진 헤르윈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봤다.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롬이라 생각한 헤르윈은 문을 벌컥 열었다.
“왜 이렇게 답이 늦…….”
미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헤르윈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있는 사람은 제롬이 아니라-
“……어머니.”
바로 헤르윈의 어머니이자 페네우스 공작부인, 스칼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