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29)

<70화>

루시아는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슬쩍 줄리안을 쳐다봤다.

“어머니. 지금은 행복하세요?”

“행복하고말고. 이렇게 귀여운 아들, 딸이 있고, 듬직한 남편이 있는데 행복하지 않을 건 뭐 있겠니.”

줄리안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결혼했음에도 행복하다면…….

“저도… 행복해질 수 있겠죠?”

“……갑자기 왜 우리에 대해 물어보나 했더니 불안해서 그랬구나?”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직도 헤르윈을 좋아하니?”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루시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해도, 헤르윈처럼 열렬히 사랑하진 못할 거예요.”

“……내가 너처럼 열렬한 사랑을 한 적 없어서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사랑을 해보신 적 없으시다고요?”

“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네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 누군가를 좋아한 적 없었어. 연애는 몇 번 해봤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연애대상이라고 생각했던 루시아는 도저히 줄리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줄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니까 사귀어 준 거야. 내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아.”

“그, 그럼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거죠?”

줄리안은 안절부절못하는 토끼 같은 딸을 보고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네 아버지가 내 첫사랑이란다.”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좋아해도 상관없다고…….”

“그때는 그때고 나중에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그이를 사랑하고 있더구나. 하지만, 루시아.”

줄리안이 살며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어쩌면 헤르윈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을 캐스퍼 후작이랑 나눌 수도 있겠지.”

“……그렇겠죠?”

“그럼. 캐스퍼 후작이 너를 불행하게 만들 사람은 아니잖니.”

루시아는 천천히 베른을 떠올렸다.

‘루시아를 사랑하게 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꼭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제 베른이 제 손을 잡고 했던 약속이었다. 그의 금안에서 굳은 결심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선명히 떠오르던 헤르윈의 얼굴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네, 맞아요. 이제 그를 믿어야겠죠.”

무언가 결단을 내리는 듯한 딸을 보며 줄리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실연의 아픔에 허덕이며 슬퍼하던 모습에 비하면 많이 나아 보였다.

“둘 다 여기 있었군.”

“여보, 왔어요?”

뒤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한이 나타났다. 그는 줄리안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렸을 때부터 늘 봐오던 부모님의 애정행각이라 새삼스러운 건 없으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한차례 들어서 그런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왜 그러니?”

루시아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자 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

“응?”

“어머니 얼마나 사랑하세요?”

“뭐?”

요한은 갑작스러운 딸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그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지.”

요한을 뾰족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루시아가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어머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간 아버지 절대 용서 안 할 거예요. 아셨죠?”

“대체 내가 뭘 했길래 그러니? 당신도 웃지만 말고 무슨 말 좀 해봐요.”

“아하하하! 어쩔 수 없어요. 딸이 당신 과거를 알아버렸거든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여전히 베른은 어리둥절했고, 줄리안은 웃음을 참지 못했으며, 루시아는 입을 앙다물며 제 아버지를 노려봤다.

그럼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사이좋은 부모님을 보며 루시아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두 여자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요한은 영문도 모른 채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 * *

“슬슬 날짜를 잡아야겠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베른은 달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번 파티에서 루시아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마음에 두는 사람이 따로 있을지라도, 서로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녀라면 어떻게든 미래를 함께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도 슬슬 마음 정리해야지…….”

1년 동안의 칩거 생활 동안 완전히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셀린느를 보자마자 바로 흔들렸다.

이 이상 감정에 휘둘려 치기 어린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 가문을 위해서라도 루시아를 배우자로 들여야 한다.

“오늘 온다 했으니 한 번 얘기해봐야겠군.”

마침 오늘 루시아가 집무실에 오기로 했다. 그녀가 오면 약혼식 일정을 상의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비밀을 감추느라 루시아를 만날 때마다 조금 껄끄럽고, 괜히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털어놔서 그런지 한층 마음이 가벼웠다.

“약혼식은 여름이 지나고 나서 하는 게 좋으려나.”

똑똑-

약혼식에 대해 생각하던 그때, 밖에서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후작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나가마.”

루시아라 생각한 베른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바로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응접실로 모셨겠지?”

“네, 그렇습니다만…….”

베른이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응접실로 가자 뒤에서 우물쭈물하던 하인이 입을 열었다.

“셀린느 르마리오 자작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의외의 이름이 들려오자 가벼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베른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하인은 잘못을 저질렀다 생각하여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누구……?”

“죄, 죄송합니다, 후작님! 자작부인께서 꼭 후작님을 뵙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명령만 하신다면 곧바로 내쫓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보고 싶다 했다고?”

“네. 조금 다급해 보이셨습니다.”

셀린느가 여길 찾아와?

그것만으로 베른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녀가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은 그녀와 헤어지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서로 연락도 한 번 한 적 없고 저번 파티를 제외하고는 우연이라도 마주친 적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

‘이런 시기에…….’

루시아와 약혼하겠다 마음먹은 다음에 찾아오는 걸까?

바로 코앞에 있는 문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저 문 너머로 셀린느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돌아가라 이를까요?”

한참을 멍하니 있던 베른은 하인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 차렸다.

“아니다. 손님을 내쫓을 순 없지. 이만 물러가라.”

“네, 알겠습니다. 혹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인이 자리를 떠나고 베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겨우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문을 등지고 앉아있는 주홍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뒷모습만 봤을 뿐인데도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기로 다짐한 지 고작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불가항력으로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 제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셀린느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순한 눈매에 자리 잡은 부드러운 녹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베른!”

셀린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베른에게 달려왔다.

베른이 미처 피하기 전에 셀린느가 그를 힘껏 껴안았다.

꼭 연인이었을 때처럼 행동하자 베른은 당황스러웠다.

“흐윽, 베른… 베른……!”

셀린느를 밀어내려고 하던 베른은 돌연 셀린느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 하나하나가 창처럼 변하여 제 가슴에 박혔다.

저도 모르게 셀린느의 눈물을 닦으려고 하던 베른은 퍼뜩 루시아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속절없이 밀려드는 제 감정들을 최대한 부정하며 셀린느를 떼어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베른…….”

“서로 임자가 있는 몸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고 하여도 지금은 이런 행동 자제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자작부인.”

“나 이제 자작부인 아니야!”

셀린느의 어깨를 잡던 베른의 손이 움찔 떨렸다.

“자작이… 르마리오 자작이 출장을 갔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어. 그러니 이제 내게 남편은 없어!”

“그게 무슨…….”

“결혼하고 2년 안에 배우자가 사망하면 자동으로 결혼은 무효처리가 된다더라. 결혼한 지 아직 2년도 안 됐으니 난 이제 자유의 몸이야. 더 이상 자작부인이 아니라고!”

베른이 미처 다 이해하기도 전에 셀린느는 정신없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르마리오 자작이 사망했다고? 그러면 더 이상 셀린느의 곁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녀가 더 이상 다른 남자의 것이 아니라는 건가?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베른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밑을 내려다봤다.

셀린느가 절박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옆에 있으면 네 발목만 잡을 것 같아서…그래서 네게 모진 말을 했어…….”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진심에 베른의 두 눈이 정처 없이 떨렸다.

헤어지던 날, 재산을 보고 접근한 거라고, 사랑한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냐는 셀린느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전부 거짓말이야?”

겨우 베른이 입을 떼자 셀린느가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베른의 눈이 더욱 커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만 사랑해…….”

셀린느와 헤어지고 난 뒤로 미동도 없던 가슴이 다시 움직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셀린느가 베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울먹였다.

“시간이 지나면 네게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부 내 착각이었어. 네 손을 잡고 도망치지 않은 것을 매일매일 후회해.”

가슴팍을 통해 느껴지는 흐느낌이 자신의 마음과도 같았다.

베른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팔을 들어 셀린느의 등을 껴안았다.

“이제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아니, 더 이상 내 마음에 거짓말하기 싫어!”

처절하게 울부짖는 셀린느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동안 고생했던 제 마음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나도 너를…….”

“베른, 제발 다시 나와 만나면 안될까? 아그네스 영애와는 헤어지고 나와……!”

홀린 듯 셀린느를 꼭 껴안으며 입을 열려던 베른은 루시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현실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감각에 베른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내 셀린느를 황급히 때어내자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셀린느의 얼굴이 보였다.

“……베른?”

“하아, 하아…….”

창백한 낯과 죄책감에 물든 베른의 얼굴을 보고 셀린느의 입가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설마 아그네스 영애 좋아해?”

베른이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모든 태도가 루시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셀린느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입을 꾹 다물며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래도 상관없어.”

“셀린느…….”

“경험해 봐서 알아. 내 곁에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그 절망감과 외로움. 한 번으로 족해. 네가 이제는 아, 아그네스 영애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셀린느가 떨리는 손으로 베른의 옷깃을 꽉 잡으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제 입술에 느껴지는 말랑하고 달콤한 감각에 베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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