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파티를 다녀온 다음날. 루시아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이 부은 것이 느껴졌고, 목은 가뭄처럼 텁텁하여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무래도 어제 흘린 눈물의 여파인 듯했다.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지만, 한차례 제 감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세상에, 아가씨. 눈이 너무 많이 부으셨어요!”
마침 방으로 들어오던 세인이 침대에 비몽사몽 앉아있는 루시아를 보고 기겁했다.
그에 루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많이 심해?”
“네, 마님께서 보시면 많이 놀라실 것 같아요.”
“그럼, 안되지.”
이 꼴을 부모님이 보셨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기에 루시아는 물수건으로 눈의 붓기를 가라앉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어제 저택에 도착했을 때부터 루시아는 이미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차마 묻지 못했었다.
눈가를 차가운 수건으로 문지르던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별일 없었어.”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투라 세인은 조금 당황했다.
“정말요?”
“응. 그냥… 베른이랑 솔직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놨을 뿐이야. 오히려 속 시원한걸!”
루시아가 수건을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근래 옅게나마 껴있던 먹구름이 그녀의 얼굴에서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는 또 아가씨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했습니다.”
“에이, 일이 있긴 무슨.”
“하지만, 어제 파티에 가시기 전에 도련님과 잠깐 언성을 높이셨잖아요.”
확실히 루카스가 베른의 전 애인을 들먹여 잠깐 다투기는 했었다.
‘어쩌면 오빠 덕분에 일이 잘 풀린 걸지도 모르겠네.’
베른과 셀린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그들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란 것은 알지 못했으니까.
“오빠는 지금 어딨어?”
“평소처럼 일하러 나가셨습니다.”
“그래?”
나중에 루카스가 오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한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며칠 쏟아지는 약속 때문에 하루 편히 쉴 날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부로 모든 일정이 끝나 드디어 쉴 수 있었다.
계속 바쁘게 살다가 갑자기 쉬는 시간을 갖게 되자 어색했다.
괜히 몸이 근질거려 여기저기 방을 서성거리던 루시아는 이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테라스로 나가 화창한 날씨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제 덥네.”
여름에 들어선 이후로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림자에 숨어 멍하니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루시아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입 맞춘 상대는 베른이었지만, 눈을 감고 있는 순간만큼은 정말 헤르윈과 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망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지옥 같았어도 그때만큼은 황홀할 정도로 좋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헤르윈을 떠올리던 루시아는 손을 순식간에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뭔가… 비참하네…….”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을 혼자 상상하는 것 자체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역시 시간이 약인 걸까?”
인정하기 싫어도 시간이 점점 흐름에 따라 헤르윈에 대한 미련마저 놓아버린 기분이었다.
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와 자신 사이에 선 하나가 그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어떻게든 그 선을 넘어 헤르윈에게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제는 가만히 멈춰 서서 영원히 닿지 않을 헤르윈을 보는 것에 그쳤다.
그저 머리로만 헤르윈을 놓은 것이 아닌, 마음으로도 서서히 그를 놓아주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미래에 헤르윈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헤르윈을 생각하며 넋을 놓던 루시아는 바깥에 사람들이 모인 것을 발견했다.
줄리안이 하녀들을 데리고 정원에서 티타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 어머니를 보던 루시아는 문득 자신의 부모님 역시 정략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처음엔 어색한 사이셨을까?’
지금은 서로 없고 못사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그런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현재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고,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마 근시일 내에 베른과 정식으로 약혼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될 텐데 과연 자신 또한 지금의 부모님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궁금했다.
루시아는 해답을 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머, 루시아.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건 오랜만이구나.”
줄리안은 제게 다가오는 루시아를 발견하며 그녀를 반겼다.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느라 저택에 있을 새가 없었죠. 괜찮으시면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안 될 거 뭐 있겠니.”
줄리안은 당연히 흔쾌히 자리를 비키며 루시아에게 여분의 찻잔을 건넸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구나.”
“그러게요. 초여름이라 그런지 날씨가 유독 좋은 것 같아요.”
“더운 건 싫지만, 여름의 화창한 하늘만큼은 참으로 좋지. 나중에 캐스퍼 후작을 불러서 같이 나들이라도 갈까?”
베른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하던 루시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럴까요, 그럼?”
당연히 안 된다고,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말이냐며 반대할 거라 예상했던 딸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웬일이니?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약혼할 사람이잖아요. 가족들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흐음…….”
줄리안이 잠시 제 딸을 쳐다봤다. 전에는 베른과 약혼 이야기만 꺼내도 어색해하더니, 지금은 꽤 익숙해진 것 같았다.
“후작과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구나. 한층 마음을 연 것 같아 다행이야.”
잠시 말이 없던 루시아가 설풋 웃었다.
“네, 맞아요. 서로 솔직하게 얘기를 털어놓으니 조금은 편하네요.”
차를 홀짝이던 루시아가 줄리안을 쳐다봤다.
“저, 어머니.”
“왜 그러니?”
“어머니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머니랑 아버지도 정략혼이셨죠?”
“그렇지?”
“처음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이어가셨어요?”
“음… 사랑이라…….”
줄리안이 과거를 잠시 회상하다가 루시아를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랑 루카스에게는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서 말한 적 없구나.”
생각해보니 정작 부모님의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던 것 같다.
“나도 그이도 가문끼리 추진한 중매로 결혼하게 됐단다. 루시아, 그거 아니? 당시 그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
“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직 어머니에게만 약하고, 어머니만을 사랑하던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정확히는 그이만의 짝사랑이었지.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말하지 않으마.”
루시아는 아버지가 짝사랑했던 상대가 누군지 무척 궁금했으나 줄리안은 그를 배려하여 말을 줄였다.
“그이와 처음 만났을 때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나.”
‘죄송하지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게는 마음을 따로 둔 상대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요한이 고개를 숙이며 맞선을 보러온 줄리안에게 말했었다.
“설마 아버지가 그런 말을…….”
“아하하하! 지금 생각해봐도 웃기지 않니?”
자칫 상처받을 만한 말인데도 줄리안은 어째선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 맞선만 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상대방이 사랑을 운운하니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처음엔 당황했지만, 어이없었지.”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바라고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니까요.’
서로 마주한 지 5분도 안된 자리에서 오간 대화치고는 꾸밈이 전혀 없었다.
“그때, 네 아버지의 얼굴이 얼마나 볼만하던지.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나 봐. 나는 그이가 누구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없었거든.”
“……정말로요?”
태연하게 말하는 줄리안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럼, 당연하지. 어차피 결혼도 부모님이 마음대로 정하실 텐데 내 의지가 뭐 필요하겠어. 그냥 결혼해서 남들처럼만 살면 되지.”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깜빡 죽고 못 사시잖아요.”
루시아의 말이 기분 좋은지 줄리안이 웃음을 흘렸다.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우리도 다른 사람처럼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었어.”
그저 기계적인 데이트와 진심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의례적인 대화만 오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그편이 더 편했는지 어느새 줄리안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약혼식을 올린 날에 그이가 짝사랑했던 여자가 나타났단다.”
‘나를 좋아한다 말할 땐 언제고, 결국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구나.’
‘그건…….’
‘정말 나를 다 잊은 거야? 내 곁에 평생 있겠다고 했잖아…….’
요한이 갑자기 사라져 그를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그와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나누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이에게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으면서 막상 제 손에서 벗어나는 게 싫었던 모양이야. 아주 별의별 말을 다 하면서 온갖 수작을 부렸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내가 한바탕 뒤엎었지.”
요한이 흔들리는 게 뻔히 보이자 줄리안은 곧바로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남의 약혼자한테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혼자 고상한 척은 그만두시죠. 당신도 이미 임자가 있는 몸 아닌가요? 남편분께서 지금 이 사실을 아시면 퍽이나 좋아하겠어요.’
“잠깐, 잠깐! 그 여자분, 이미 결혼하셨어요?”
줄리안의 말을 듣다 말고 루시아가 기겁하며 중간에 말을 끊어냈다.
“그래. 결혼한 지 꽤 되었지. 전에 그이가 한 말로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왜 아버지에게 그런…….”
“왜긴 왜야. 내가 가지긴 싫고, 남에게 주긴 아까운 거지. 그리고 듣자 하니 한 번도 그이의 사랑을 받아준 적도 없다고 했단다.”
줄리안에게 감정 이입을 한 건지, 요한에게 감정 이입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루시아가 입을 꾹 다물며 집중하자 줄리안은 마저 말을 이었다.
결국 여자는 줄리안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를 벗어났고 그 자리에는 줄리안과 요한만이 남았다.
‘저, 줄리안…….’
짝-!
요한이 말을 다 하기 전에 줄리안이 먼저 그의 뺨을 내리쳤다.
‘당신의 행동이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죠?’
‘……….’
‘당신이 저 여자를 사랑하든 다른 사람을 사랑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전에 저랑 약속하셨죠. 마음은 주지 못해도 배우자로서 잘 행동하겠다고. 그렇다면 행실 똑바로 하세요. 아무리 사랑에 정신이 팔린다고 해서 바람을 피우는 건 용서 못 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뺨까지 치고, 언성까지 높여서 요한이 불같이 화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굽히고 들어오자 줄리안은 속으로 상당히 놀랐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길로 파혼할 줄 알았어. 그런데 웬걸 그이가 갑자기 마음을 고치더니 더 이상 그 여자에게 흔들리지도 않고 내게 잘해주더구나.”
“그러셨군요…….”
“뭐, 그이가 잘해주니 나도 조금씩 마음이 간 거지. 그러다 너랑 루카스를 낳은 거고.”
부모님에게 이런 파란만장한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현재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