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리스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남자가 바뀌셨군요, 베키 양.”
아리스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베키였다. 루카스가 사랑한다 노래 부르는 그의 연인.
이번에도 그녀는 루카스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불장난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방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루카스를 두고 바람피운다는 생각에 아리스타는 주먹을 꽉 쥐며 살벌하게 베키를 노려봤다.
“뭐야. 날 못 알아본 줄 알았는데, 다 알고 있었단 말이야?”
한편 베키는 팔짱을 낀 채 아리스타를 삐뚜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숨으려고 했던 저번에 비해 지금은 낯이 두꺼울 정도로 당당했다.
이성을 잃기 직전인 아리스타의 눈엔 잘게 떨리는 베키의 손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리스타는 얼굴을 차갑게 굳힌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겁니까?”
잠깐 긴장하던 것도 잠시, 베키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럽니까?”
“뭘 하긴…! 루카스 오라버니를 두고 다른 남자들이랑 엄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번엔 저번과 상대가 또 다른 것 같더군요.”
아리스타가 자신을 벌레만도 못하다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자 베키가 비웃음 가득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남자랑 붙어먹었다는 이야기를 루카스한테 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당연하죠. 당신 같은 사람에겐 오라버니가 천배 만 배는 더 아깝습니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아리스타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떠나려는 아리스타를 붙든 건 베키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내 바로 직전에 사귀던 여자도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헤어졌었거든. 그때, 루카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니?”
처음 듣는 사실에 아리스타의 손이 움찔 떨렸다.
“저번에 있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을 텐데 또 같은 일로 루카스를 상처 입힐 수는 없잖아. 그치?”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오라버니 상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람을 피워요?”
“뭐, 입은 맞췄을지 몰라도 내 마음만은 오로지 루카스의 것이야. 다른 남자에게 마음은 주지 않는다고.”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그녀의 말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가치도 없는 궤변이었다.
“넌 절대 루카스한테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할 거야.”
“제가 왜 말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오라버니께 당신의 민낯을 샅샅이 밝힐 겁니다.”
“풉.”
베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우스꽝스럽게 웃는 그녀를 보며 아리스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맺힌 눈물을 훔치며 베키가 음산하게 아리스타를 올려다봤다.
“루카스가 네 말을 믿어줄 리 없잖아.”
확신의 찬 말투가 아리스타를 흔들었다.
“네가 아무리 루카스를 오래 봤다고 해도 너는 고작 친구 동생에 불과해. 그에 비해 나는 루카스 애인이라고. 루카스가 나한테 얼마나 목을 매는지, 넌 모르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면 되는 일인데 어쩐지 아리스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을 그저 동생 친구라고만 했던 루카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너, 루카스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리스타의 보랏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아리스타를 보고 베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루카스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만약 내 행동을 까발린다고 해도 네가 질투심에 못 이겨 그러는 거라 생각할걸?”
들을 가치도 없이 추측만 가득한 말뿐이었다.
하지만, 베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루카스가 자신을 믿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라버니는 늘 애인이 우선인 사람이었어.’
베키 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여자들과 교제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쏟아 부었다.
그의 사랑을 받는 여자들이 부러우면서도, 자신이 그 자리에 낄 수 없다는 것을 아리스타는 깨달았다.
그는 늘 자신을 그저 친한 동생의 친구로만 봐왔으니까.
‘정말 오라버니가 내 말을 믿어줄까?’
1분 전만 해도 확신에 차 있었는데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저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핀다고 해도 루카스는 현재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가 진실을 모른다고 해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봐. 장담 못하겠지? 루카스가 나 말고 네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
아리스타는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베키가 삐뚜름한 웃음을 지으며 아리스타를 스쳐지나갔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러면 루카스도 행복할 테니까.”
베키는 일부러 구두소리를 크게 내며 아리스타에게서 멀어졌다. 뒤를 흘긋 보니 아리스타는 못처럼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와 거리를 두고 나서야 베키는 천천히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들키진 않았겠지…….”
아리스타를 마주쳤을 때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만 알았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를 또 마주칠 줄이야. 게다가 저번에 있었던 일을 아리스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반쯤 도박으로 밀어붙였던 거였는데 다행히 먹혀들었다. 생각보다 순진해서 다행이었다.
‘아니,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건가.’
어렴풋이 느꼈지만 역시나 아리스타는 루카스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 점을 약점으로 파고들었더니 아주 보기 좋게 넘어갔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제 말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만큼 루카스를 좋아한다는 뜻이겠지.”
픽- 베키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베키는 서서히 웃음을 지우며 파티장을 벗어났다.
* * *
덜컹- 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 셀린느가 넋을 놓은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 위로 다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나를 다 잊은 걸까?”
눈물이 샘처럼 솟아올랐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니, 지금까지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분명 저를 보고 흔들렸던 것 같은데 모두 제 착각이었던 걸까?
셀린느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베른이랑 도망갈걸…….”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당시에는 캐스퍼 후작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고, 아버지는 계속 결혼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캐스퍼 후작저에서도 자신을 인정하고 베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모두 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한창 베른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때에. 베른 몰래 캐스퍼 후작이 찾아온 적 있었다.
‘베른과 헤어지거라.’
‘네? 그게 무슨…….’
처음엔 그가 이제 자신을 인정해주는 건가 기대했었지만, 그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웬만큼 아둔하지 않은 이상 내 말을 못 알아듣진 않겠지. 나는 지금 베른과 헤어지라 말하는 게다.’
‘저는 베른을 사랑합니다.’
‘네가 말하는 사랑은 배우자를 좀먹는 사랑인가 보구나.’
충격적인 발언에 셀린느는 얼어붙었다.
‘제인슨 남작이 끌어다 쓴 빚이 상당하더군. 설마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분명 우리 가문과 결혼할 줄 알고 무리해서 끌어다 쓴 것이겠지. 내 아들이 자네와 결혼하면 좋을 것이 뭐가 있지? 평생 돈을 펑펑 써대는 시댁의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할 텐데.’
맞는 말투성이라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자네가 아니더라도 내 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여자는 널려있어. 그러니 포기하게. 안 그러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할 테니까.’
묵직한 돈주머니를 쥐여주며 캐스퍼 후작은 떠났다. 후작이 떠난 이후로도 셀린느는 앉은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한마디도 따지지 못하는 저 자신이 초라하면서도, 자신이 베른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그래서 셀린느는 일부러 모진 말까지 하며 베른과 헤어지고 르마리오 자작에게 팔려 가듯 결혼했다.
시간이 지나면 베른은 자신 같은 여자를 쉽게 잊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 또한 최대한 밝은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행복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제 곁에 베른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베른의 칩거 소식이 간간이 들려올 때면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는 착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어둠에 빠져든 제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때에 캐스퍼 후작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연이어 베른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루시아 아그네스…….”
베른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인. 티파티에서 보았을 때 그녀가 무척이나 좋은 여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신과는 다르게 베른을 지지해줄 수 있는 가문의 여식이고,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래서 베른도 그녀에게 빠져든 것일까? 자신이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입을 맞춘 것을 보면…….
“하, 하하…….”
셀린느의 손가락 사이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먼저 놨으면서.”
베른은 매몰차게 돌아서는 자신을 끝까지 붙들었었다. 하지만, 베른의 행복을 위한다는 말로 그의 손을 놔버렸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어깨에 얹어진 것들이 버거워 도망쳐버린 주제에.
자신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했을 때 베른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묻고 싶어도 그는 이제 제 손에 닿지 않는다.
허하기만 한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마차가 저택에 도달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셀린느는 밖에서 재촉하는 마부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큰 저택이지만, 감옥이나 다름없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었다.
그나마 르마리오 자작이 일에 미친 사람이라 집에 자주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자였다면 진작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지금이 몇 신데 이제야 들어오는 게냐?”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려던 셀리느는 제 발을 붙잡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고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였다. 그녀는 셀린느가 못마땅한지 늘 별의별 트집을 다 잡으며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결혼한 지 몇 년째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돌아다니고 있어! 너는 일하러 나간 남편이 걱정되지도 않니?”
“……어머니 제가 좀 피곤해서 그런데 방에 들어가도 될까요?”
“피곤? 그래. 아~주 피곤하겠구나. 밖에서 피땀 흘려 번 서방님의 돈을 아주 펑펑 써대면서 파티에 참석하고 왔으니 아주 피곤하겠어.”
“하아, 어머니. 이번 파티는 그이를 대신해서 제가 참석한 것뿐이에요. 디오레스 가문에서 파티를 주최하는데 안 갈 순 없잖아요.”
시어머니도 그쯤은 잘 아는지 괜히 헛기침했다.
“크흠! 어쨌든 채신 잘하거라! 맨날 밖에 나돌아다니니 애는 들어설지 모르겠네. 비싼 돈 주고 들였구만, 여태 애도 가지지 못하고 뭐 하는 건지 원.”
한참을 모진 말을 쏟아낸 후에야 시어머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그나마 머리를 잡히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셀린느는 드디어 제 방에 들어갔다.
저놈의 외출 타령, 아이 타령. 지긋지긋하다.
밖에 자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필요한 모임에만 참석하는 건데 뭐가 저리 못마땅한 걸까?
“어쩌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싫은 것일 수도.”
시어머니는 제 앞에서 늘 아들이 좀 더 젊었으면, 돈이 더 많았으면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아무래도 40이 넘어가는 나이에 어중간한 재산을 갖고 있어서 젊은 여자를 신부로 데려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팔려 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그런 가문에 팔리다시피 온 자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미한 가문에 예쁘지도 않으니 제대로 된 짝을 찾기도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베른이 처음 청혼했을 때, 날아갈 듯 기뻤었는데…….
“만약 베른과 함께 도망쳤으면…….”
부족하게 살았어도 행복했을까? 이제는 너무나도 늦어버린 행복을 조금이라도 상상했다.
한참을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것도 잠시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곧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 의아했다.
“무슨 일이지?”
셀린느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살폈다.
“마, 마님! 정신 차리세요!”
“안 된다! 내 아들! 내 아들……!”
몇십 분 전만 해도 제게 버럭 소리 지르던 목소리가 구슬프게만 들렸다.
저도 모르게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셀린느는 천천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아아아! 아들!”
시어머니는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오열하고 있었고, 주변 하인과 하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죠?”
“작은 마님! 주인님께서……!”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셀린느는 얼어붙었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빛이 새어들었다.
이 소식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 기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