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29)

<65화>

“하하하! 그렇다니까요?”

“아이참, 영식도 짓궂으시군요.”

파티에 참석했을 친구들을 찾던 브라이언은 처음 본 아름다운 여자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말을 꺼낼 때마다 웃음을 터트리는 여성을 보며 브라이언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 혹시 같이 다니시는 사람이 없다면 저랑…….”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는 여성이 무슨 말을 할진 뻔했다. 데이트 신청을 기다리던 브라이언은 이내 그녀의 안색이 서서히 창백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나, 나중에 시간 될 때 같이 다니도록 해요. 그럼, 저는 이만……!”

“앗! 잠시만요!”

귀신이라도 본 건가? 분명 분위기는 괜찮았는데.

부리나케 도망가는 여자를 보고 브라이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 뭐가 있나?”

뒤를 돌아보던 브라이언은 기척도 없이 서 있는 헤르윈을 마주쳤다.

“아잇, 깜짝이야! 야, 너 언제 왔어?”

“……방금.”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던 것도 잠시, 브라이언은 헤르윈을 흘겨봤다.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화가 난 건가 싶을 정도로 낯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간 그와 함께해온 브라이언은 지금 헤르윈이 우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번에 갔을 때도 그러더니.’

볼일도 볼 겸, 크리스틴의 초대장을 건네주러 헤르윈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죽상이야? 누구한테 차이기라도 했어?’

기분 좀 풀어주려고 던진 말에 그는 더더욱 얼굴을 굳히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헤르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헤르윈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눠보려 온 거였는데,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브라이언은 볼일만 마치고 크리스틴의 초대장을 그에게 건넸다.

‘크리스틴이 이번에 파티를 열어. 루시아랑 다른 애들도 다 가기로 했는데 너도 올 거지?’

‘……루시아가 간다고?’

무슨 말을 건네도 반응이 없던 헤르윈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다 죽어가던 붉은 눈빛에 활기가 맴돌자 브라이언은 의아스러웠다.

‘그래. 캐스퍼 후작이랑 같이 참석한다더라.’

혹시 루시아에게 반응하는 건가 싶어 캐스퍼 후작을 들먹이니 헤르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나도 가야지.’

순순히 초대장을 받는 손길과 다르게 그의 눈빛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헤르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에 비하면 얼굴이 좀 폈네.’

그때는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비실비실거리더니 지금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물론, 어두운 저 낯빛은 여전했지만.

“아! 헤르윈, 브라이언! 너희 여기 있었구나?”

“에단! 아리스타도 함께 있었네?”

에단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가 아리스타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이리 많은 사람들이 온 걸 보면 크리스틴이 공을 많이 들였나 봐.”

“크리스틴이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이잖아. 그러니 준비를 많이 했겠지. 보니까 사람들도 크리스틴 사업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대상단을 이끄는 디오레스 가문의 외동딸이 처음으로 벌인 사업이니 당연했다.

“여러분! 와줬군요!”

기운찬 목소리와 함께 크리스틴이 다가왔다. 파티의 주최자인 만큼 그녀는 아름답게 치장한 상태였다.

늘 눈꺼풀 아래에 감춰놨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드러내고, 풍성한 꽃다발을 한아름 들고 있으니 마치 요정처럼 보일 정도였다.

“세상에, 크리스틴! 너무 예쁘다!”

“이야, 이거 누군지 몰라보겠는데? 너무 예뻐서 남자들 눈이 돌아가는 거 아니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리스타와 에단에게 칭찬을 들은 크리스틴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그때, 크리스틴의 시선에 브라이언이 걸렸다.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낯간지러운 말을 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한 금안이 저를 뚫어볼 것처럼 쳐다보자 크리스틴은 볼을 긁적였다.

“좀 이상한가요……?”

“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브라이언이 드물게 허둥지둥거렸다.

“크흠. 예, 예뻐…….”

여자라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남자 같은 행동에 에단과 아리스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너 그게 지금 무슨 반응이야.”

“크리스틴. 네가 예쁘긴 예쁜가 봐. 저 천하의 브라이언이 수줍어하다니! 저 모습을 두고두고 박제해야 할 텐데.”

“시끄러! 수줍긴 누가 수줍어한다는 거야!”

브라이언이 조용히 하라고 경고해도 두 사람은 더 포복절도했다.

크리스틴은 멀거니 브라이언을 쳐다봤다. 그의 귓불이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맨날 저를 놀리기만 하던 그가 새로운 반응을 보이자 크리스틴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한편, 친구들이 시끄럽게 떠들든 말든 헤르윈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크리스틴이 물었다.

“찾으시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요?”

“루시아가 왔나 해서.”

“루시아라면 도착했습니다.”

헤르윈이 멈칫하며 크리스틴을 돌아봤다.

“방금 전에 루시아랑 캐스퍼 후작이랑 인사하고 오던 길이에요.”

“둘이 같이 있었어?”

“네. 저기 있었는데… 어머, 없네요?”

루시아와 만났던 곳을 가리키던 크리스틴은 몇 분 새에 사라진 루시아를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곳으로 갔나 봐요. 보니까 캐스퍼 후작과 여기저기 인사하는 모양이었어요.”

“그렇구나. 고마워. 나 잠깐 루시아 좀 만나고 올게.”

헤르윈은 고맙다는 짧은 인사 후에 서둘러 루시아가 있었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참, 이상하군요.”

“뭐가?”

“아니, 헤르윈 말이에요. 꼭 무언가 다급한 것 같지 않아요? 루시아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아…….”

루시아와 헤르윈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아리스타는 작은 탄식을 흘렸다.

일부러 자리까지 비켜줬었는데. 설마 아직도 풀지 못한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닐걸?”

그때, 브라이언이 말했다.

“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

브라이언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크리스틴을 쳐다봤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브라이언은 헤르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헤르윈은 크리스틴이 알려준 곳에 도착했다. 큰 키를 이용하여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루시아를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자신이 왜 루시아를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헨리가 찾아와 루시아의 약혼을 이대로 두고 볼 거냐고 했을 때 그제야 헤르윈은 제 마음의 동요를 인정했다.

‘나는 루시아를…….’

단순히 친구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를 향한 감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루시아를 사랑하는 거라면, 여태까지 아리스타를 좋아했던 제 감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아가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퍼줄 듯이 그녀를 사랑하는가?

의문만이 남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냉정을 되찾으려는 이성과 다르게 몸과 마음은 이미 루시아에게 쏠려있었다.

아리스타와 만났을 때도 그녀에게 눈길이 가지 않았고, 루시아만을 애타게 찾았다.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는 제 마음의 천칭을 느끼며 헤르윈은 루시아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만나고 싶어.’

만나서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래야만 실타래처럼 단단히 얽혀버려 복잡하기만 한 제 감정이 풀릴 것만 같았다.

홀을 다 둘러봤는데도 루시아가 보이지 않자 헤르윈은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정원으로 갔나?”

벌써 집으로 돌아가진 않았을 테니 남은 곳은 이제 실외뿐이었다. 헤르윈은 정원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파티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정원을 둘러보던 헤르윈은 분수 쪽으로 향했다.

타닷-!

그때, 반대편에서 오던 한 여성이 헤르윈과 어깨를 부딪쳤다.

“아, 죄, 죄송합니다…….”

코 주위의 주근깨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런데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는지 절망 어린 표정으로 구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헤르윈이 당황하던 것도 잠시, 여인은 서둘러 그를 지나쳤다.

여성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헤르윈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루시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루시…….”

루시아를 발견하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헤르윈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분수대에 걸터앉은 루시아에게 베른이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그런 베른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그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앞이 흔들렸다.

‘나… 왜 이러는 거지?’

둘이 곧 약혼할 사이니 저런 입맞춤쯤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보다 더한 건 물론, 나중에는 자식까지 가질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아.’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베른을 루시아에게서 떼어내고 싶었다. 베른 말고 자신이 루시아와…….

끝없이 이어지던 생각에 헤르윈이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방금 전, 자신이 한 상상을 떠올렸다.

“나는 루시아를 좋아하는 건가…….”

그녀와 입 맞추는 사람이 베른이 아니라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아리스타를 좋아한다 생각했을 때도 그녀와의 스킨쉽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한 적 없었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헤르윈은 얼굴을 굳히며 입 맞추고 있는 두 사람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억겁 같은 시간 끝에 두 사람의 입맞춤이 끝나고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 순간, 루시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베른은 우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괜찮아요, 루시아…괜찮아.”

베른이 서글프게 우는 루시아를 다독였다.

그 모습에 헤르윈은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에게 입 맞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미친 듯이 화가 나면서도, 만약 자신이 저기에 있다고 한들 루시아가 제게 의지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루시아는 더 이상 저를 의지하지 않고,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자신의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줘…….’

마지막으로 루시아가 울었을 땐, 제게 마지막 고백을 했었다.

우는 루시아를 위로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거부했으니까.

루시아의 버팀목이 되어주지도 못하고, 위로해주지도 못하며, 울리기만 하는 제게 과연 그녀 옆에 설 자격이 있는 걸까?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내 그가 있던 자리에는 풀 눌린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