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딸랑-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볼일을 마치고 루시아는 밖으로 나왔다. 슬슬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라 햇살이 따사로웠다.
티파티가 끝나자마자 루시아는 바로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러 베른의 어머니, 티아나에게 보낼 꽃을 골랐다.
수국을 좋아하신다 들었기에 하얀 수국과 파란 수국을 섞은 꽃다발을 자택에 보내도록 주문해 두었다.
원래는 점심 전에 보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티파티가 늦게 끝나 예상보다 늦고 말았다.
“그래도 하루가 안 지났으니 괜찮겠지?”
베른이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신신당부하여 그 이상의 것은 준비하지 않았다. 하긴, 아직 약혼도 하지 않은 사이에 시부모의 생일을 챙기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마차보관소로 가려던 루시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급히 들르느라 미처 몰랐는데 이곳은 테르반 거리였다.
황실 아카데미와 인접한 곳.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여길 자주 나왔었는데.
“뭔가 상당히 오랜만이네.”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었다. 그동안 거리의 상당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추억에 잠겨 루시아는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학창 시절 자주 들렀던 케이크 집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다가갔다.
예전보다 더 유명해졌는지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 사 갈까?”
루시아는 가게를 기웃거리며 대기 줄에 합류했다.
꺄르르
앞에서 아카데미에 다니는 듯 보이는 아이들이 서로 재밌는 얘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주된 관심사는 연애사였다. 주로 짝사랑이나, 누군가의 연애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어른이랑 별다를 건 없나.’
티파티에서 했던 얘기와 별반 다를 게 없어 조금 기분이 미묘했다.
“꺄아악! 저기 좀 봐!”
“헉! 선배님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부럽다! 나도 선배님이랑 얘기하고 싶어!”
뒤에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호들갑에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말하는 대상은 앞줄에 위치한 무리인 것 같았다.
세 명의 남자를 둘러싸고 여자들이 몰려있었다.
처음엔 일행이라 생각했는데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달라붙는 것 같았다.
“인기가 많은가 보네.”
호기심이 발동한 루시아는 까치발을 들어 앞을 보려 애썼다.
하지만 키가 작은 루시아의 눈엔 남자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위로 솟은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헨리?”
검은 머리카락과 유순한 눈매에 자리 잡은 붉은 눈동자를 보고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남자가 고개를 퍼뜩 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와 루시아의 벽안이 딱 마주쳤다.
“……루시아 누나?”
역시 헨리가 맞았다. 반가움에 루시아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헨리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루시아보고 대체 누구냐고 중얼거렸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어. 너희들끼리 알아서 먹어.”
헨리가 친구들에게 대충 대꾸해주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모두 헨리의 환한 얼굴을 보고 주춤 길을 텄다.
“세상에! 누나! 오랜만이야!”
루시아를 만나서 기쁜 건지 헨리가 루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헨리 품에 폭 안기게 된 루시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헨리를 올려다봤다.
“누나가 여긴 어쩐 일이야? 누나 집은 여기서 멀잖아!”
“근처에 들를 일이 있어서 왔어. 그나저나 너…….”
루시아는 헨리를 밑에서부터 위로 찬찬히 훑어봤다. 헨리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 왜 이렇게 많이 컸어? 작년에 봤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헤르윈이랑 키가 얼추 비슷한 것 같아.”
“형이랑 비슷하긴 해. 형이 조금 더 크긴 하지만.”
“세상에… 나보고 누나 누나하고 따라다니던 꼬맹이가 이렇게 크다니.”
어릴 적 헨리를 떠올린 루시아가 작게 웃었다.
“너 기억나? 어렸을 때 나랑 결혼할 거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잖아.”
“앗! 누나! 그게 언제 적 일인데!”
헨리가 부끄러운지 괜히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이제 자신보다 작고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자그마한 루시아를 보고 귀를 붉혔다.
“지금도 유효하지만…….”
“응? 뭐라고 했어?”
작게 중얼거리던 헨리는 저를 말간 얼굴로 쳐다보는 루시아를 보며 헛기침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크흠! 그래서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일은 다 끝난 거야?”
“응. 볼일 끝나고 가려 했는데 알고 보니 여기가 테르반 거리이지 뭐야. 졸업하고 여기에 온 건 처음이라 추억도 회상할 겸 여기 케이크도 사 갈 겸 잠깐 줄 선 거야.”
헨리랑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다.
“헨리,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사줄게.”
“뭐? 아니야, 됐어. 내가 사줘야지.”
“이럴 때는 누나 찬스 쓰는 거야.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루시아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걸 눈치챈 헨리가 하는 수 없이 메뉴를 주문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계산을 마친 루시아가 헨리에게 케이크 상자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래. 맛있게 먹어.”
예전처럼 헨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루시아는 손을 올리려다 까마득히 위에 있는 헨리를 보고 멈칫했다. 헨리는 루시아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눈치채고 허리를 숙였다.
루시아의 쓰다듬을 받고 헨리가 활짝 웃었다. 어렸을 때와 그대로인 미소에 루시아는 멈칫했다.
“헤르윈도 너 좀 본받아야 할 텐데. 헤르윈은 너무 무뚝뚝해.”
“에이, 그래도 형 정도면 누나 앞에선 많이 풀어지는 거야.”
“음? 그런가?”
“그래. 누나 앞에선 가끔 웃지 않아?”
헤르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 루시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봐. 집에 있을 때는 일절 웃지 않아. 오죽하면 엄마가 자기가 냉혈한을 낳은 거냐며 툴툴거리실 정도인걸?”
그 정도로 헤르윈이 무뚝뚝한 건가 싶었지만, 친구들 앞에서도 풀어지는 걸 보면 그다지 자신이 특별한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활짝 웃을 거야.”
루시아의 말을 듣고 헨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형이 누나 앞에서 웃는다고 말한 거잖아.”
“응? 헤르윈이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소리야?”
“그럼 아니야?”
떨떠름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헨리는 어리둥절했다.
“그럴 리가. 헤르윈은 나를 안 좋아해.”
“뭐? 그럴 리가 없는…….”
“진짜야. 헤르윈은 나를 안 좋아해. 그리고 헤르윈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잘 웃어주는걸?”
루시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헨리는 점점 얼굴을 굳혔다.
“네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헤르윈이 아직 말을 안 해줬나 보구나?”
“뭘 말이야?”
“나 약혼해.”
헨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약혼…한다고?”
“그래. 캐스퍼 후작님이랑 할 예정이야. 방금 전에도 후작님의 어머니께 드릴 꽃다발을 샀으니까.”
어지간히 놀랐는지 헨리가 입을 뻐끔거렸다.
“……형이 그걸 가만히 두고만 봤어?”
“왜 자꾸 헤르윈 이름이 나오는 거야?”
“그야 형은……!”
헨리는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의 얼굴이 너무 씁쓸해 보였다.
“약혼식에 너도 초대할게. 와 줄 거지?”
“……응.”
불만스러운 감정이 헨리의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루시아는 하는 수 없이 피식 웃으며 헨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나는 헤르윈이 너한테도 말한 줄 알았어.”
“……집에 안 들어간 지 꽤 돼서 몰랐어. 언언제 결정한 거야?”
“거의 두 달은 됐을걸?”
“두 달이나 됐는데 그 새끼는…….”
낮은 욕지거리를 듣고 루시아가 흠칫 떨었다. 자신이 알던 천사 같은 헨리가 맞았나 싶었다.
얼굴을 굳히며 조용히 분노하는 헨리에게서 문득 헤르윈이 겹쳐 보였다.
‘헤르윈이라…….’
5일 전, 자신을 저택까지 데려다줬을 때 그의 반응을 보면 역시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앙카도 그렇고, 헨리도 그렇고 왜 다들 헤르윈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자신은 늘 헤르윈에게 차이기만 했는데.
“아,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헨리,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벌써 4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루시아가 퍼뜩 정신 차렸다.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됐어. 저기 네 친구들 있잖아. 주말인데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아야지.”
자신을 따라오려는 헨리를 거절하며 루시아는 손을 흔들었다.
서서히 멀어지는 루시아를 보고 헨리는 웃는 얼굴을 지웠다.
“헨리, 아는 분이셔?”
루시아와 헤어진 것을 본 친구들이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살기를 띠우는 그를 보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너, 너 갑자기 왜 그래?”
“사이 좋아 보이더니 싫어하는 사람이었어?”
“그런 거 아니야.”
“……하긴, 네가 그리 활짝 웃을 정도였는데.”
“나는 이 녀석이 그리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봤어!”
루시아가 헤르윈이 헨리를 본받아야 한다 했지만, 그건 헨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헨리는 오직 제 가족과 루시아 앞에서만 유한 모습을 보였다. 똑닮은 형제라 헤르윈과 다를 바 없다고 스칼렛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친구들이 옆에서 떠들든 말든 헨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멀어지는 루시아의 뒤통수를 볼 뿐이었다.
“이 멍청한 자식……!”
헨리가 애꿎은 바닥을 차자 친구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거 우리한테 하는 말 아니지?”
“야! 너 어디 가!”
헨리가 돌연 어딘가로 가자 뒤에서 친구들이 불렀다.
“잠깐 집에. 너희 먼저 아카데미로 돌아가. 나는 볼일이 있으니까.”
친구들을 뒤로하고 헨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헨리 도련님 아니십니까? 이 시간엔 어쩐 일이신가요?”
마침 저택에 있던 제롬이 헨리를 반겼다.
“형은 지금 집에 있어?”
“네. 지금 집무실에… 잠깐만요! 도련님!”
대답을 들은 헨리가 사무실로 향하자 제롬이 서둘러 그를 붙잡았지만 헨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 주인님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신데.”
요 며칠 헤르윈의 기분이 많이 안 좋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헨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혹시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싶어 제롬은 서둘러 헨리의 뒤를 따라갔다.
쾅!
“형!”
헤르윈 집무실에 들이닥친 헨리가 씩씩거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조용히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헤르윈이 스르륵 일어났다.
“헨리? 네가 여긴 어쩐 일로…….”
“루시아 누나가 약혼을 한다고?”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들려오는 말에 헤르윈이 흠칫 떨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 말을 하려고 노크도 없이 들어온 거야?”
“나한테 왜 말을 안 했어! 누나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말하지 않을 속셈이었어?”
“루시아를 만난 거냐?”
“내 말에 대답이나 해.”
왠지 모르게 잔뜩 화가 난 동생을 보고 헤르윈이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