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 헤르윈이 창가에다가 머리를 기대며 무료한 얼굴로 창밖 풍경을 구경했다.
그런 헤르윈을 제롬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며칠 전, 헤르윈이 친구를 핑계로 상담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넋을 놓는 일이 많았다.
그때 자신의 대답이 너무 단호했었나 싶어 제롬은 초조했다.
‘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현재 헤르윈이 마차를 타고 시내로 나온 이유는 아리스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예전에 한 약속이라 멋대로 취소할 수 없는 걸 알지만, 루시아를 좋아하는 인간이 느긋하게 다른 여자를 만나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덜컹-!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헤르윈은 느릿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말한 시간대에 다시 와.”
“네, 그… 도련님!”
떠나려는 헤르윈을 제롬이 붙잡았다.
“……괜찮으신 것 맞죠?”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던 헤르윈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왜 이렇게 나를 쳐다보나 했더니. 내가 걱정되기라도 해?”
“당연하죠. 며칠 전부터 영 이상하셨는데 걱정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뭘 걱정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괜찮아. 그러니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제롬은 시무룩한 모습으로 마차를 닫고, 마부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제롬이 사라지고 헤르윈은 아리스타와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거리를 거닐며 헤르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전에 제롬은 자신이 루시아를 좋아하는 거라고 못 박아 얘기했다.
그래서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는 건가 싶어 오랜 시간 고민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뚜렷한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루시아를 좋아하는 거라면 응당 그녀처럼 행동해야한다 생각했다.
루시아는 정말 모든 것을 다 퍼줄 것처럼 행동하고, 녹아내릴 것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자신은 그녀처럼 행동한 적 없을뿐더러, 그런 눈빛을 보낸 적도 없었다.
‘아리스타는 조금 다르지만.’
루시아의 기준대로 자신이 아리스타에게 그리 행동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하지만, 아리스타에겐 특별한 어떤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다.
물론 지금은 처음 자각했을 때보다 그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지만, 아리스타는 여전히 특별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배울 점이 많았으며, 같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타와 결혼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결혼하면 앞으로의 미래가 즐겁겠지만, 일단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가문끼리의 이해관계도 그렇고, 같은 공작 가문끼리 혼약을 맺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특별한 사람이기에 좋은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웬 이상한 놈이랑 결혼한다고 하면 화날 것 같다.
아리스타에 대해 생각하던 헤르윈이 무언가 떠올리곤 우뚝 멈춰 섰다.
‘루시아도 그래서 그런가.’
그녀가 약혼하는 게 왜 영 탐탁잖고,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서운했던 건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그래, 그런 거였어.’
루시아도 자신에게 있어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다. 무려 기억도 희미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알고 지낸 친구이니 약혼한다는 소식에 그런 감정이 든 것이다.
이제야 꽉 막혔던 속까지 뻥 뚫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함에 기분이 저절로 날아갈 것 같았다.
‘난 루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그런 결론을 내니, 더 이상 캐스퍼 후작을 마땅찮게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루시아의 약혼을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이렇게 쉬운 것을.”
“쉬워? 뭐가?”
헤르윈이 움찔 떨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아리스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오늘은 검 쇼핑을 목적으로 모인 거라 그녀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헐렁하면서도 단정한 바지, 단추 한두 개 풀어헤친 셔츠, 질끈 묶은 머리. 그리고, 허리춤에 들린 검까지.
지극히 아리스타다웠다. 사실, 그녀나 헤르윈의 차림새나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놀랐잖아. 언제 왔어?”
“방금 전에. 그러는 너야말로 이런 곳에 서서 뭐 해? 하도 안 와서 찾으러 다녔잖아.”
“아…….”
헤르윈이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약속 장소인 분수대가 보였다. 생각에 빠져 미처 목적지까지 가지 못했다.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헤르윈을 잠시 쏘아보던 아리스타가 씩 웃었다.
“미안하면 나 단검 하나 사주라.”
“단검? 갑자기 웬 단검?”
“아버지께서 무기 좀 그만 사라고 요즘 잔소리가 장난 아니시거든. 용돈도 대폭 줄어들어서 이번에 검 하나밖에 못 살 것 같아.”
아리스타가 얼굴을 찡그리며 진저리치자 헤르윈이 물었다.
“공작님께선 아직도 그러셔?”
“아직도 그러긴. 늘 그러셨지. 아마 해가 두 쪽이 나도 아버지는 늘 같으실걸?”
아리스타가 절대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며 음흉한 얼굴로 웃었다.
아리스타는 헤르윈만큼이나 검술에 미쳐있는 인간이다.
어렸을 적에는 귀족 예절이나 소양을 익히는 것보다 검을 휘두르는 걸 더 좋아하여 공작 부부가 억지로 그녀를 책상 앞에 앉혀야 할 정도라 들었다.
게다가 머리도 짧게 자르곤 검사가 되겠다며 고집부리는 바람에 공작 속을 많이 썩였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는 하루아침 만에 검을 멀리하고 본격적으로 예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여느 영애와 다를 바 없이 드레스를 입고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보였을 때, 공작부인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니 과거의 그녀가 얼마나 말괄량이였는지 말 다했다.
아무튼, 지금은 어렸을 적에 비하면 덜하지만, 리디아 공작은 여전히 그녀가 검을 멀리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리스타 인생에서 검은 절대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이러한 아리스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헤르윈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단검이 뭐냐, 롱소드 하나 사 줄게.”
“진짜? 거짓말 아니지? 나 이런 거 잘 거절 안 한다고?”
뜻밖의 소득에 아리스타가 눈을 밝혔다. 헤르윈은 그쯤은 괜찮다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리스타는 헤르윈에게 어떤 것을 사달라고 할지 고민해야겠다며 콧노래를 불었다.
헤르윈은 앞서 나아가는 아리스타를 보다가 루시아를 떠올렸다.
‘응, 역시 아니야.’
루시아를 좋아하는 건지 헷갈렸었는데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아리스타를 보니 강한 확신이 들었다.
헤르윈은 자신을 부르는 아리스타의 목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루시아의 잔상이 어느덧 흐릿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딸랑-
부티크 가게 문이 열리고, 베른과 루시아가 다정한 모습으로 나왔다.
베른의 손에는 가게에서 산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이런 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의도치 않게 많은 도움을 받았네요.”
베른이 어색하게 웃자, 루시아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죠. 부인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까요?”
“그럼요. 적어도 제가 고른 것보다 훨씬 기뻐하실 겁니다.”
베른의 어머니인 티아나 선대 후작부인의 생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베른이 어머니의 선물로 무엇을 살지 고민하자 루시아가 시간을 내어 그가 선물을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확실히, 그녀의 안목이 베른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이런 일은 언제든지 환영이랍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다음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른이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여 가슴에 손을 얹자, 루시아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부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도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할까요?”
티아나의 선물을 고르면서도 루시아는 잠깐 고민했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한 것이 아니라 베른의 어머니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과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 또 챙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실 것 같아서 사실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네?”
의외의 답변에 루시아가 당황했다. 확실히 그는 처음에 도와주겠다던 루시아의 말에 바로 답을 하지 못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식으로 약혼도 안 했는데 부모님의 선물을 골라달라고 하는 건 좀 이르지 않나 싶어서…….”
“아…….”
루시아가 탄식했다. 베른은 루시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따로 생일 파티를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어머, 정말요?”
1년에 단 한 번밖에 없는 특별한 날을 파티도 없이 지나가는 것은 상당히 의례적이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싶어서 루시아가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었다.
“별건 아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겨우 1년밖에 안 지나서요. 어머니께서 아직도 실의에 빠져 계십니다.”
루시아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하고 숙연해졌다. 전대 후작이 사망함으로써 베른이 후작위를 물려받게 된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마, 올해까지는 다소 조용하게 넘어갈 것 같아요.”
“괜한 걸 물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딱히 숨길 만한 일도 아닌데요, 뭘.”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부인의 생일에 맞춰, 꽃을 하나 보내드려도 되겠습니까?”
“꽃 말인가요?”
“네, 그래도 1년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생일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잖아요.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지셨으면 해서요.”
베른이 루시아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의 금안이 조금씩 흔들렸다. 하지만, 안경에 가려져 루시아는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한층 더 가까워진 분위기 속에서 루시아는 베른에게 티아나가 무슨 취향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꽃들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베른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길을 거닐던 찰나, 베른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루시아, 잠시 괜찮으면 이곳에 들러도 될까요?”
베른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보자 그곳에는 보석점이 있었다.
루시아가 헤르윈에게 마지막 고백을 했던 날 들렀던 그 보석점이었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지만, 애써 동요를 감췄다.
“그럼요. 들어가 봐요.”
베른과 같이 가게에 들어선 루시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날로부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난 터라 안에 비치된 상품들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일전에 헤르윈에게 사줬던 넥타이핀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루시아는 앞에 우뚝 멈춰선 베른의 등에 그만 코를 박았다.
“앗!”
루시아의 짧은 비명에 베른이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그녀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멈추신 건지…….”
코를 문지르던 루시아는 베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눈을 서서히 키웠다.
“헤르윈… 아리스타?”
베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헤르윈과 아리스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