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29)
  • <55화>

    “……지쳐?”

    “네. 생각해보십시오. 짝사랑하는 상대가 제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고백해도 안 받아주는데 지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헤르윈이 끼어들 새도 없이 제롬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러니 끝내 짝사랑을 접고 약혼자를 들인 거네요. 설마, 단순히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약혼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헤르윈은 루시아를 떠올렸다. 확실히 어쭙잖은 질투심 유발 때문에 맞선을 본 건 아닌 것 같았다.

    “소꿉친구분은 그렇다 쳐도, 친구분은 대체 왜 그런답니까?”

    “뭐가?”

    생각에 잠겨있던 헤르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제롬이 답답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왜 이제 와서 그 소꿉친구가 신경 쓰이는 거래요?”

    “그건…….”

    “내가 갖긴 싫고, 남에게 주긴 아깝다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가지신 건 아니죠?”

    제롬의 말을 듣고 울컥한 헤르윈이 소리 질렀다.

    “그럴 리가 없잖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도련님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제롬이 뒤로 물러서서 말하자 헤르윈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네, 알겠어요. 그러면 대체 어느 부분에서 친구분이 혼란스러워 하시는 건지 알려주세요.”

    “그러니까…….”

    헤르윈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그간 들었던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했다.

    루시아의 약혼자가 마음에 안 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자신을 피하는 것, 자신에게 맞선을 봤다고 말해주지 않은 것 등등을 말했다.

    그 수록 제롬의 표정은 떨떠름해졌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음… 제가 혹시 몰라 물어보는 건데, 친구분은 소꿉친구분을 안 좋아하시는 것 맞죠?”

    “응.”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확실한 거죠?”

    “그래. 그건 왜 자꾸 물어보는…….”

    “제가 봤을 땐 친구분이 소꿉친구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던 헤르윈이 입을 벌린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제롬은 친구라는 사람이 헤르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소꿉친구를 이제 와서 신경 쓰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게다가 소꿉친구가 데려온 약혼자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요. 그 사람이 무례하게 행동했어요? 아니면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확실하네요. 친구분은 소꿉친구분에게 마음이 있어요. 그것도 100%!”

    “하지만…….”

    납득하지 못한 듯 헤르윈이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제롬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꿉친구를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이기라도 해요? 왜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세요?”

    헤르윈은 입을 달싹이다가 끝내 말했다.

    “그야… 그 녀석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네? 도련님, 좋아하는 사람 있…! 읍! 아니, 아니. 친구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순간 말이 잘못 나가서 서둘러 말을 돌렸지만, 헤르윈은 넋이 나가 있어 제롬의 실수를 알지 못했다.

    “어.”

    “그러면 소꿉친구를 안 받아들인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받아들이지 않은 거지.”

    낮게 읊조린 헤르윈의 목소리가 거짓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제롬은 경악하다가 벌어졌던 입을 서서히 다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되네요.”

    장난기 가득하고, 톤이 높았던 제롬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그는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헤르윈을 쳐다봤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소꿉친구를 신경 쓰고, 그 약혼자를 꺼려하는 거죠? 아무런 관심도 없다면 친구가 좋은 사람이랑 약혼하는 상황을 응원해주는 게 정상인데.”

    헤르윈이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꿉친구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저 응원만 하면서 가만히 있으라 하세요.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 소꿉친구분만큼은 아닐 테니까요.”

    냉정하게 말하던 제롬이 얼굴을 풀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친구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건 확실합니까? 제가 봤을 때는 소꿉친구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

    헤르윈은 입을 열지 않았다. 명쾌한 답을 들었음에도 오히려 고민이 더 커진 모양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그가 현실로 돌아올 때까지 제롬은 묵묵히 그의 옆을 지켰다.

    헤르윈은 한참이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 *

    루시아는 긴장감을 애써 떨쳐버리며 앞서가는 레이란 자작부인의 뒤를 따랐다.

    현재 루시아가 있는 곳은 레이란 자작부인이 주최하는 티파티였다.

    자작이라 하여도 레이란 가문은 요즘 떠오르는 신흥 귀족 중 하나였고, 베른으로부터 꼭 갔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아 참석한 것이다.

    신흥 귀족이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그녀를 따라 들어간 유리온실에는 화려한 꽃들이 만연하게 피어있었고, 꽃보다도 더 귀한 인물들이 몇몇 눈에 들어왔다.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사교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혼자뿐만 아니라 루시아처럼 약혼녀의 신분에 있는 미혼녀도 존재했다.

    레이란 자작부인과 루시아가 나타나자 모두 하나같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여러분, 오늘은 제가 특별한 사람을 초대했습니다.”

    레이란 자작부인의 소개에 힘입어 루시아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루시아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작은 박수와 함께 몇몇은 그녀를 환영했고, 몇몇은 속닥거리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그네스라. 아그네스 영애가 벌써 이런 사교계에 들어설 때가 됐었나요?”

    “그 얘기 못 들었어요? 이번에 캐스퍼 후작이랑 약혼한다잖요.”

    “세상에, 캐스퍼 후작이요? 후작을 노리는 영애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그네스 영애랑 이어질 줄이야, 의외네요.”

    “그러니까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맞선을 통해 만났다고는 하더라고요.”

    역시나 그들은 루시아 자체보다는 그녀가 캐스퍼 후작의 약혼녀라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익히 예상했던 일이라 루시아는 평정을 유지했다.

    사람들의 온 시선과 말소리를 들으며 루시아는 남은 빈자리에 앉았다.

    “캐스퍼 후작을 쟁취할 승리의 여인이 누구인지 참 궁금했는데 아그네스 영애께서 되셨군.”

    루시아의 옆으로 한 부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카리스마가 넘쳤고, 그만큼이나 거침이 없어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승리의 여인이라뇨. 과찬이십니다.”

    루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줄리안에게 베른의 평판에 대해 들었을 때는 그녀가 그를 높게 평가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워서 어쩌면 제 생각보다 베른이 인기가 많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니기는. 저 멀리 자네를 쏘아보는 다른 영애들이 보이지 않는가?”

    부인의 부채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20대 초반 여인들이 질투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부인이 웃었다.

    “하하하, 정말 몰랐나 보군. 앞으로 저런 시기와 질투들을 받을 텐데 어쩔 텐가.”

    “……어쩔 수 없죠. 약혼자가 잘난 것이 제 잘못도 아니고, 숙명이라고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숙명이라. 하긴, 멋진 사람을 배우자로 들이려면 그 정도 다짐은 있어야지.”

    루시아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도 그녀는 루시아에게 꾸준히 말을 건넸고, 처음엔 어색해하던 루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말을 능숙히 받아쳤다.

    아무래도 부인은 이곳 티파티의 중축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다가와, 어떻게든 대화에 끼어들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부인의 마음에 들었던 건지 다른 사람이 날선 질문을 하면 루시아가 대응하기도 전에 부인 선에서 알아서 잘라냈다.

    덕분에 감정 상할 일 없이 무단하게 티파티를 보낼 수 있었다.

    얼추 시간이 지나 점점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지칠 때쯤 루시아는 적당한 핑계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 아무도 없는 정원을 잠시 걸었다.

    “조금 지치네.”

    사교계에 입성한 지는 꽤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해 친한 친구들끼리만 친하게 지냈으니 당연했다.

    바스락-

    그때,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났다. 티파티 모임에 있던 얼굴이었다.

    주홍빛 머리카락과 진한 녹안. 그리고 얼굴에 박힌 작은 주근깨들이 발랄해보여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얼굴은 알아도 그녀와 통성명 한 번 해본 적 없어,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말이라도 먼저 걸어야 하나 속으로 고민하던 사이, 그 여성이 갑자기 성큼 다가왔다.

    “루시아 아그네스 영애 맞으시죠?”

    너무 가까이 다가와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제가 루시아 아그네스가 맞습니다만… 그쪽은 누구시죠?”

    루시아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하자 조급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던 여성이 퍼뜩 정신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제 이름을 말 안 했군요. 저는 셀린느 제이…아니, 로마리오라고 합니다.”

    말하다 말고 셀린느는 갑자기 자신의 성을 고쳐 말했다. 그것이 이상하던 찰나 그녀가 다시 다가왔다.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저돌적으로 다가왔던 것과 달리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쉽사리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내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용기를 냈다.

    “정말로 영애께서 캐스퍼 후작님의 약혼녀가 맞으신가요?”

    질문이 너무 터무니없이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루시아가 베른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른다고 하더라도 오늘 티파티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 당사자 앞에서 다짜고짜 약혼 여부를 묻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티파티 초반, 다른 영애들로부터 눈초리를 받았던 것처럼 셀린느도 루시아가 베른의 약혼녀가 된 것을 탐탁잖게 여기는 건가 싶었지만, 시기나 질투로 가득했던 그들의 눈빛과 달리 그녀는 초조해 보였다.

    불안, 초조, 슬픔, 그리고 조그마한 희망까지. 도저히 지금 상황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감정들이 그녀의 녹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영애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저 후작님과 정식으로 약혼한 건지 궁금해서…….”

    본인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았는지 셀린느가 주절주절 뒷말을 덧붙였다.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앙심을 품고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맞습니다. 베른과 약혼을 약속했습니다.”

    셀린느의 녹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녀의 동요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약혼식을 올리겠지요.”

    “……….”

    “답이 됐을까요?”

    셀린느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려, 입을 달싹였다. 그녀의 표정이 어딘가 익숙하여 루시아는 순간 직감했다.

    ‘베른을 좋아하는구나.’

    셀린느는 과거 자신의 모습과 똑같았다. 헤르윈이 아리스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절망감. 그때의 감정이 셀린느에게서 느껴졌다.

    루시아는 그녀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지금 이 만남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루시아가 자리를 피하자 셀린느가 그녀를 붙잡았다.

    셀린느의 눈에는 어느덧 물기가 차올라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루시아를 붙잡았음에도 쉽사리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한참을 기다리던 루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물어볼 것이 있나요?”

    “그러니까… 혹시 베른이 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다급하게 외쳤던 셀린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붙잡았던 루시아의 팔을 맥없이 놓았다.

    “아, 아닙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제가 한 말은 잊어주세요.”

    셀린느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 것이 보였지만, 루시아는 애써 그것을 모른 척했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욱이 그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 불편했다.

    루시아는 셀린느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마음 같아선 작은 위로라도 하고 싶었으나 제 행동이 셀린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 같았다.

    루시아는 결국 손을 거두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선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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