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집안 구경을 마치고,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며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파티 이후 2주 만의 만남이었다. 약속을 잡으려 해도 이래저래 일들이 있어서 오늘 겨우 만나게 된 것이다.
“설마 집으로 초대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인 외에는 아무도 안 계시나요?”
“아버지께서는 외부에 일이 있으셨고, 오빠도 친구와 약속이 있다 하여 집을 비웠습니다. 설령 가족들이 다 있다고 해서 부담을 드릴 생각으로 초대한 것이 아니니 긴장 푸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안심되네요. 안 그래도 저를 좀 탐탁잖게 여기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 조금 긴장하던 찰나였습니다”
베른이 머쓱하게 말끝을 흐리자 루시아는 그에게 미안해졌다.
“부끄럽네요. 아무래도 제가 고명딸인지라 귀하게 자란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베른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저와 관련된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하하, 참으로 다정하시네요. 가족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시는 모양입니다.”
베른이 귀엽다고 웃었지만,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큼, 크흠. 제가 베른을 오늘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있어요.”
루시아는 말을 돌리면서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루시아가 손짓하자 세인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저번에 줄리안과 함께 분류했던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수많은 초대장을 보고 베른이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이게 다 초대장입니까?”
“예, 저번 파티에서 약혼한다고 말한 게 효과가 컸나 봐요. 덕분에 이렇게 많은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 정도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군요.”
“그래서 추리고 추린 몇 군데만 갈 생각이에요. 이걸 보여드린 이유는 다름 아닌 베른의 의견을 묻고 싶어서고요.”
“제 의견 말이죠?”
초대장의 대부분 목적은 루시아 아그네스가 아닌 캐스퍼 후작의 약혼녀이다.
구두계약으로 맺은 약혼에 불과해도 남들이 보기에 루시아는 엄연한 캐스퍼 후작의 약혼녀이다.
미래의 캐스퍼 후작 부인이 될지도 모를 루시아에 대해 사람들은 알려고 할 것이고, 루시아 또한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귀족 사회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한 일들이 대다수라 분명 캐스퍼 가문과 친화적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을 터.
멋모르고 캐스퍼 가문과 적대적인 이들과 친분을 쌓으면 안 되니 그에 조심하려는 것이다.
베른도 루시아의 말을 이해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시아가 먼저 선별해놓은 초대장들을 살폈다.
“이곳에는 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선선대에 걸쳐 저희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 가봤자 별로 환영받지 못할 거예요. 초대장을 보낸 게 의아스러울 정도군요.”
“여기에는 꼭 가셨으면 합니다. 최근 이곳과 공동사업을 추진해서 얼굴만이라도 잠깐 비추면 좋을 것 같아요.”
베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좀 더 그와, 그의 가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루시아는 쏟아지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됐어요.”
“아닙니다, 루시아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저야말로 미리 말해줘서 고마워요. 저도 가끔 이런 초대장이 오곤 하는데 제가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
“음, 저는 딱히 없습니다.”
손을 내저으려던 루시아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무언가를 떠올리고 멈칫했다.
이내 그녀는 입을 달싹였다.
“굳이 있다면…제 소문일까요?”
안경 너머로 베른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모습을 보니 그가 자신의 소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루시아는 확실했다.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언제쯤 제 소문에 대해 물어볼까 궁금했는데, 설마 제가 먼저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루시아…….”
“제 소문은 잘 아실 거라 생각하고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루시아를 부르던 베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연민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다만, 이 일을 꺼낸 이유가 사람들이 저에 대해 하는 말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소문이 소문인지라 베른에게 이상한 말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랍니다.”
루시아가 초연한 모습으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헤르윈을 오랫동안 좋아한 전적이 있고, 그에 관한 소문이 사교계에 허다하니 사람들은 분명 베른에게 루시아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조롱일 확률이 훨씬 높다.
자신은 익숙해서 괜찮다고 해도 베른은 아니다. 그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괜히 그에게 미안해서 루시아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때, 사부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릎 위에 있던 제 손에 거대한 손이 얹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어느새 베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안타까운 눈빛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어, 의자에 앉은 루시아를 올려다봤다.
베른의 눈엔 루시아가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것이 익숙한 형상을 겹쳐 보이게 만들었다.
베른은 루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손은 꽤나 차가웠다.
“루시아. 루시아, 잘못이 아닙니다.”
“……….”
“그러니 사과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어요. 저는 제 의지로 루시아를 고른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 따위 제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해요.”
안경 너머로 보이는 금안은 흔들림 없이 강직했다. 그것이 단정한 그의 마음을 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꾸밈없이 오로지 그의 진심만이 느껴져 루시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베른은 참, 사람이 올곧네요.”
루시아는 다시 시선을 내려 제 손을 잡은 베른의 손을 쳐다봤다.
헤르윈의 따뜻하고 거친 손에 비하면 굳은살이 적어 부드럽고, 차가웠다.
외형도, 성격도, 체온마저 헤르윈과 정반대인데 그의 따뜻한 마음만큼은 헤르윈과 너무나도 닮았다. 그래서 눈물 날 것 같았다.
“여태까지 제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은 것도 분명 저를 배려해서겠죠?”
베른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루시아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태도에서 긍정적인 마음이 느껴졌다.
“고마워요. 덕분에 제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루시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내뱉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저번에 제가 베른과 닮아서 고르셨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 어느 점이 저랑 닮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 털어놓지 못한 게 많거든요.”
베른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붙잡은 루시아의 손을 쓸어내렸다.
“저도… 숨기는 게 몇 가지 있답니다. 루시아가 생각하는 만큼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에요.”
베른이 눈을 감고 루시아의 손에 입을 맞췄다. 손에 닿는 촉감을 통해 그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소 해맑고, 고민 없어 보이던 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언젠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그가 숨기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저도요.”
루시아는 위로 대신 베른의 손 위에 남은 손을 겹쳐 올렸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가식 없이, 진심으로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 * *
부웅-! 서걱! 부웅- 부웅-!
맹렬한 바람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공중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검을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는 사람은 헤르윈이었다.
족히 3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검만 휘두르자 제롬은 슬슬 그가 걱정됐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짓거리냐고, 미치기라도 했냐고 깝죽거리기라도 했을 텐데 요 며칠 헤르윈의 기분은 가히 최악이었다.
그의 성격상 난동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진 않지만, 전방 1m 주위로 일렁거리는 어두운 아우라 때문에 그 누구도 헤르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부웅-!
드디어 검이 공중에 멈춰 섰다.
헤르윈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도저히 상쾌하지가 않아.’
파티를 다녀오고 나서부터 정체불명의 불쾌감이 몸 곳곳을 기어 다니고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루시아를 생각하는 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상했고, 그녀와 함께 있던 베른을 떠오를 때면 불쾌함만 증폭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잡생각 들지 않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별반 효과는 없었다.
분명 몸을 움직이면 상쾌했었는데 지금은 피곤하기만 할 뿐, 상쾌하다거나 뿌듯함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 멈췄던 루시아의 생각이 다시 머리를 잠식하자 미칠 것 같았다.
“……제기랄!”
“깜짝이야!”
헤르윈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던 제롬이 그가 칼을 던지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제롬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윈이 그를 쳐다봤다.
“언제 왔어?”
“도련님이 검 잡으셨을 때부터 있었거든요?”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제롬은 낮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고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도련님 요즘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면 제발 저희 좀 봐주세요.”
헤르윈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제롬은 그간 쌓인 것들을 토로했다.
“요즘 도련님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니 저택 전체가 암울하잖아요. 제가 다 숨이 턱턱 막힙니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 시간씩 검을 휘두르니 미친 거 아니냐고 사람들이…헙.”
조잘조잘 깝죽거리던 제롬이 뒤늦게 제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게 말이죠. 제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고요. 그만큼 도련님께서 이상…….”
“……내가 그렇게 미친 놈 같았나.”
화날 거라고 생각해 미리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제롬은 뜻밖의 힘 빠진 목소리를 듣고 눈을 번뜩 떴다. 헤르윈은 이젠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련님, 화나신 건 아니죠?”
“안 났어.”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제롬이 땀을 삐질삐질 흘릴 때, 헤르윈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네? 아아, 네! 무엇인가요?”
“내 이야기는 아니고, 내 친구의 이야기인데…….”
제롬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헤르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 녀석에게 오랜 소꿉친구가 있거든? 그 소꿉친구가 내 친구를 오랫동안 좋아해왔단 말이야. 그런데 며칠 전에 소꿉친구가 갑자기 약혼자를 데리고 왔어.”
‘이건 분명… 도련님 얘기겠지?’
자기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고 한 거겠지만, 제롬은 이것이 헤르윈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소꿉친구는 분명 친구를 좋아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약혼자를 데리고 왔나 봐. 그리고 친구한테 이제는 정말 친한 친구로 지내자고 말했다더군.”
“크흠, 그렇군요. 친구분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인가요?”
“혼란? …그래, 혼란이라면 혼란이겠네.”
헤르윈은 자신의 이상증세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하신 거죠?”
“궁금한 점?”
“네, 저한테 상담이라도 하고 싶어서 말씀하신 것 아니었어요? 궁금한 게 있어야 제가 답을 해드리죠.”
헤르윈은 벙찐 얼굴로 있다가 이내 자신이 무슨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건지 생각했다.
그런데 머리가 복잡해서 대체 무슨 답을 얻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헤르윈이 갈피를 찾지 못하자 제롬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정리하자면, 친구분께 소꿉친구가 있는데, 그 소꿉친구가 친구분을 오랜 기간 좋아해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약혼자를 데려왔다는 거죠? 그래서 친구분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거고요.”
“응.”
“그렇다면 친구분은 소꿉친구라는 사람이 자신을 오랫동안 좋아해왔다는 걸 알았는데도 그동안 소꿉친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던 건가요?”
“그렇지?”
“그런데 이제 와서 소꿉친구가 약혼자를 데려오니까 혼란스럽고요?”
헤르윈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경멸 가득한 눈빛을 보고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소꿉친구가 지쳐서 나가떨어진 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