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29)

<53화>

크리스틴의 편지를 받고 난 후, 루시아는 언제 만나도 상관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바로 이틀 뒤로 약속을 잡았고 현재, 루시아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크리스틴이 말한 장소에 도착하니 크리스틴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티온’ 대상단의 마크가 새겨진 레스토랑이 눈에 띄었다.

이름을 밝히자 안내인이 VVIP 룸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는 먼저 도착한 크리스틴과 아리스타가 있었다.

“내가 좀 늦었나?”

“아니야, 아직 약속 시간까지 남았는걸. 나도 방금 도착했어.”

“어서 와요, 루시아!”

아리스타가 아직 시간 많다며 여유롭게 말했고, 크리스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시아를 열렬히 반겼다.

루시아는 조잘조잘 말이 많은 크리스틴이 귀여워 얌전히 그녀에게 끌려갔다.

아리스타가 방 구경을 다 끝냈는지 크리스틴에게 물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 저번에 새로운 사업을 한다더니 이게 그 일환이야?”

“네! 맞아요. 이번엔 제가 아버지께 직접 권한을 부여받았어요.”

“오오, 정말? 그럼 이게 네 첫 사업이겠네?”

크리스틴이 부끄럽다며 두 손으로 달아오른 볼을 감쌌다.

“정말 잘됐다. 안 그래도 아버지 뒤를 잇고 싶다고 했잖아. 축하해, 미리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사실 루시아는 핑계고, 이걸 알리려고 우릴 여기까지 부른 거 아니야?”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루시아 옆으로 아리스타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렇게 두 사람만 모은 건 당연히 여자들만의 긴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죠.”

크리스틴이 허리에 두 손을 짚으며 입술을 쭉 내밀다가 이내 키득거렸다.

“자랑하고 싶은 것도 없잖아 있어요.”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VVIP 첫 손님이신 만큼 신랄한 평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전부 제가 쏘겠어요!”

위풍당당한 크리스틴에게 루시아와 아리스타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윽고 그들은 거리낌 없이 다양한 가짓수의 음식을 주문했고, 본격적인 담화를 시작했다.

물론 그 첫 시작은 루시아의 맞선 이야기였다.

종업원이 물러가자마자 크리스틴과 아리스타가 눈에 불을 켜며 저돌적으로 물었고 이 장면을 예상한 루시아는 두 손 두 발을 들며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헤르윈에게 차여서 맞선을 봤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베른과 만나기 전에 스쳐 지나간 최악의 맞선남 3명에 대해서 얘기하자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쩜 그 3명 다 무례할 수가 있어요? 듣는 제가 다 화가 나요!”

“네 아버지 성격상 이상한 사람들을 맞선 상대로 고르지 않았을 텐데… 참, 어떤 의미로…….”

크리스틴이 화를 내고 아리스타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루시아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대단하지?”

크리스틴과 아리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캐스퍼 후작이 지각했다는 걸 듣고 참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앞의 3명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네.”

“그 사람들 어느 가문이랍니까? 절대 상종을 안 해야겠어요!”

“뭘 그렇게까지 해.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라 잘 기억도 안 나.”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니 그들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뭐, 어쨌든 내 맞선 스토리는 여기서 끝이랍니다. 별거 없지?”

“별거 없기는, 이런저런 일이 많았구만.”

“맞아요! 캐스퍼 후작이라도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치. 그나마 베른을 만나서 다행이지.”

루시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씁쓸하면서도 어쩐지 편안해 보였다.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느낌이 동시에 나타나니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루시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지?”

옅은 감상에 빠지던 루시아가 근심에 찬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이 루시아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럼.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이야. 너희들보다 조금 더 빨리 할 뿐이지.”

“하지만, 루시아. 헤르윈이랑은…….”

“크리스틴!”

아리스타가 황급히 크리스틴을 불렀다. 그러자 크리스틴의 낯이 창백해지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헤르윈의 이름이 안 나오나 했다. 그들의 걱정과 달리 루시아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미안해요, 루시아. 제가 괜한 말을 해서…….”

“괜찮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일은 없었어. 애초에 내가 헤르윈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했던 것뿐이고, 사귀고 뭐고 한 것도 없는걸. 헤르윈이랑은 계속 친구로 지내자고 얘기했어.”

루시아가 애써 밝게 얘기해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도통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루시아는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걱정하기보다는 이제 너희도 긴장해야 될 텐데? 슬슬 집에서 약혼 얘기 꺼내지 않아?”

약혼 얘기가 나오자 두 사람 모두 질색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외면하려는 모양이지만, 루시아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끄응… 맞아요. 요즘 부모님께서 은근슬쩍 결혼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곤 해요. 그럴 때마다 모른 척하고는 하는데… 언제 강제로 맞선을 볼지 모른답니다.”

맞선 보기 직전의 루시아처럼 크리스틴이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그와 달리 아리스타는 편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번에 아레스가 약혼해서 그런가 비교적 여유로워. 아무래도 황실이랑 사돈 맺은 게 좋긴 좋나 봐. 지금은 약혼 얘기가 쏙 들어갔어. 부모님 입꼬리가 도통 밑으로 내려갈 생각을 안 한다니까?”

“그래? 각자 사정이 있구나? 만약 맞선을 하게 되면 너희는 어떤 사람이랑 만나고 싶어?”

“솔직히 사람이 이상하지만 않으면 어떻든 상관없어요. 저는 지금 결혼보다 사업이 더 중요하거든요. 아, 한 가지 원하는 게 있다면 제가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네요. 부인이 일하는 거를 탐탁잖아 하는 사람이 있다고들 하니까요.”

지극히 크리스틴다운 대답이었다. 대상단의 자녀인 만큼 그녀는 상단 경영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후계자 이야기가 오가고,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걸 보면 그녀는 결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결혼을 사업처럼 생각해서 최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쪽으로 배우자를 구할 것 같다.

“아리스타, 너는?”

아리스타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는 잠깐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다소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평생 함께할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았으면 좋겠어.”

의외의 답변에 루시아뿐만 아니라 크리스틴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아리스타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온 적이 없었다. 이제껏 그녀는 이성이나 사랑에 대해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아리스타,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크리스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짚으며 물었다. 아리스타는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잔뜩 흥분했던 크리스틴의 어깨가 내려갔다.

“아… 뭐에요.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알고 기대했잖아요.”

“하하,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알아서 뭐 하려고.”

“아니, 뭐. 그냥. 아리스타는 검이랑 결혼할 거라고 말할 줄 알았죠.”

“뭐? 내가 아무리 검을 좋아해도 그런 말은 안 해.”

아리스타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뒤를 이어 크리스틴도 웃기 시작하자 방은 순식간에 말간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곳에서 오직 루시아만이 아리스타를 지그시 쳐다봤다.

어쩐지 지금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누굴까?’

아리스타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나, 그녀가 아는 남자들을 생각하던 루시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머릿속으로 헤르윈의 얼굴이 선명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리스타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거라면…….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리스타라면 꼭 그럴 수 있을 거야.”

아리스타가 루시아을 돌아봤다. 루시아가 눈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아리스타를 거절할 남자가 어딨겠어.”

“루시아.”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고백해. 혹시 알아? 그 사람도 널 좋아할지?”

헤르윈이라면 아리스타의 고백을 분명 받아줄 것이다.

‘나랑 다르게 말이지…….’

루시아는 헤르윈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애초에 아리스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그녀와 자신은 출발 지점부터 다르다. 아리스타는 처음으로 헤르윈의 마음으로 들어갔고,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작은 것 같으면서도 큰 차이점이다.

맞선을 결심했을 때부터 헤르윈이 아리스타랑 교제하는 상상을 해왔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타격은 크지 않았다.

‘그래도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네.’

물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13년 동안 좋아했던 상대에게 애인이 생기는 일인데 당연하다.

“고마워, 루시아.”

아리스타의 감사 인사에 루시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의 말로 용기를 얻은 것인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안심된다. 꼭 네 말대로 할게.”

“……그래.”

루시아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위해 눈웃음을 지었다.

혹여라 제 속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까 조마조마했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두 사람은 루시아의 동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루시아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 * *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아.”

루시아의 초대로 아그네스 백작가에 온 베른이 말끔한 모습으로 꽃다발과 함께 나타났다.

선명한 분홍빛 장미의 향기가 코끝에 진하게 풍겼다.

마침 옆에 같이 있던 줄리안이 루시아가 장미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베른을 반겼다.

“아그네스에 오신 걸 환영해요, 후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베른은 전혀 당황하지 않으며 능숙하게 줄리안의 손에 작은 키스를 날렸다. 그러자 줄리안이 볼을 감싸며 감탄했다.

“저번에 뵀을 때는 너무 경황이 없던 것 같아, 소소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베른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쳐다봤다. 그러자 베른과 같이 따라온 그의 사용인들이 선물들을 날랐다.

아그네스 가족 구성원에 맞게 산 것인지 각기 다른 선물이 4개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작은 상자를 집은 베른이 그것을 줄리안에게 건넸다.

“이건 부인의 것입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어머, 뭘 이런 것까지. 저희는 준비한 게 없는데…….”

“제가 드리고 싶었던 것뿐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줄리안은 선물을 풀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루시아의 등을 떠밀었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안으로 들어오세요. 루시아, 잘 안내해드리렴.”

줄리안은 그 말을 남기며 둘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게끔 자리를 비켜줬다. 사용인들까지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순식간에 홀에는 베른과 루시아만이 남게 됐다.

너무 유별나게 행동하는 건 아닌가 싶어 루시아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베른. 어머니께서 저보다 더 들뜨신 것 같아서.”

“하하, 아닙니다.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 좋은걸요. 꽃은 마음에 드십니까?”

루시아는 제 손에 들린 장미 다발을 내려다봤다. 품에 꽉 찰 정도의 아름다운 분홍색 장미가 눈과 코를 즐겁게 했다.

“네, 향이 무척이나 좋네요.”

“이 꽃을 보니 왠지 루시아가 떠오르더라고요.”

베른이 굽혔던 허리를 펴, 한눈에 루시아의 모습을 담았다. 분홍 장미를 한아름 안고 있는 그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

순간 루시아에게서 무언가를 겹쳐 본 베른의 눈이 흐려졌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선한 미소를 지었다.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제 방에 장식하라 일러야겠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내미는 베른의 팔을 붙잡고 그를 본격적으로 집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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