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폭풍과도 같던 밤이 지나고, 루시아의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황녀의 약혼 파티에서 베른과 약혼할 것이란 걸 대대적으로 알려서 그런가, 여기저기서 각종 사교계 행사의 초대장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식으로 약혼을 하면 바빠질 것이라고 줄리안이 언질을 줬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의 말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정식으로 약혼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바쁜 걸 보면 진짜 약혼했을 때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아… 가기 싫다.”
“어머, 얘는 이거 가지고 죽는소리를 하면 어떡하니?”
초대장 선별을 도와주던 줄리안이 루시아를 타박했다. 그녀는 지친 루시아와 달리 얼굴 만연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역시 캐스퍼 후작가라 그런지 스케일이 남다르네. 안 그래도 요즘 후작의 몸값이 많이 오르던 찰나였거든.”
“몸값이요?”
루시아의 물음에 줄리안이 호호 웃으며 자신이 즐겨 찾던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그녀 나이대의 모임은 대부분 자식들의 결혼이 가장 큰 이슈라서 어떤 영식이 좋은지, 어떤 영애가 괜찮은지 서로 얘기하곤 했다.
단연 베른은 그들의 평가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래, 후작은 고작 너랑 3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작년에 후작위를 물려받았잖니. 전대 캐스퍼 후작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어쩔 수 없이 물려받게 된 거긴 하지만 말이야.”
24살밖에 안 된 청년이 작위를 계승하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그뿐이야? 형제자매도 없어서 작위를 뺏길 위험도 없어. 외모 괜찮지, 성격 좋지, 능력 좋지, 어리기까지 한 미혼 청년이다? 이런 사람 쉽게 못 찾아.”
줄리안의 주접을 하나하나 듣다 보니 모두 일리 있었다.
세간의 평가도 평가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는 단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완벽한 사람이었다.
착하고, 배려심 많고, 잘 이해해주고, 상냥하기까지. 결혼 상대로는 손색없다.
‘그와 반대로 나는…….’
루시아가 본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손가락을 폈지만 그보다 어리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장점을 찾을 수 없었다.
루시아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어머니, 대체 후작은 왜 저를 고른 걸까요?”
“응?”
초대장을 살피던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우리 딸이 얼마나 훌륭한 신부감인데. 뭐가 불안해? 아니면 후작이 뭐라고 말하기라도 했어?”
“……아니요. 제가 마음에 든대요.”
“본인이 마음에 든다는 데 뭐가 걱정이야.”
“음, 그냥 뭔가 퍼즐이 안 맞춰진다고 할까요? 왜 저를 골랐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냥 제가 자기랑 많이 닮아서 선택했다고 하더라고요.”
“많이 닮아?”
베른과 루시아를 나란히 상상한 줄리안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혹시 네가 착해서 그런 거 아닐까? 맞네, 생각해보니 너랑 성격이 좀 닮았어.”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난번 파티장에서 물었을 때 여태 갖고 있던 궁금증의 90%는 풀었지만, 나머지 10%는 풀리지 않았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톱니바퀴가 전부 맞물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가씨, 친구분께 편지 왔습니다.”
세인이 들어와 이제 막 도착한 편지를 전했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크리스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루시아는 바로 그 자리에서 편지를 확인했다.
첫 번째 장에는 짧은 인사 문구와 사소한 이야기가, 그녀가 편지를 보낸 궁극적인 이유는 마지막 장에 적혀있었다.
『 파티장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워요.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있답니다.
루시아만 괜찮다면 아리스타도 불러서 여자들만의 모임을 가지고 싶어요.
이번 모임에서 서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눠 봐요!
답장이 오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파티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시간은 극히 짧아서 맞선을 보게 된 경위까지 알려주지 못했다.
필체가 조금 흐트러진 것을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여자들만의 모임이라.’
아무래도 여자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헤르윈이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인 것 같다.
크리스틴의 배려에 루시아가 작게 웃었다.
“누구한테 온 거니?”
루시아가 웃음을 보이자 줄리안이 관심을 보였다.
“크리스틴이요. 조만간 모임이라도 가지자네요.”
모임이라는 말에 줄리안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헤르윈도 참석하는 건…….”
“아니에요. 이번엔 여자들 모임이에요.”
“아,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눈에 띄게 안도한 줄리안을 보고 루시아는 입안이 조금 씁쓸해졌다.
그와 소꿉친구인 만큼 부모님 또한 헤르윈을 오랫동안 봐와서 그를 꽤나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헤르윈을 싫어하게 되는 것만 같아서 걱정이었다.
“자, 분류는 다 했다.”
드디어 초대장 분류를 끝낸 줄리안이 뿌듯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쪽은 굳이 안 가도 되는 모임, 이쪽은 가도 나쁘지 않은 모임, 이쪽은 웬만하면 꼭 가는 게 좋은 모임이란다. 네가 한 번 보고, 어디로 갈지 고르렴.”
중요도에 따라서 총 3가지로 보기 좋게 나누니 해야 할 일이 확 줄어들었다.
“고마워요, 어머니. 저도 한번 확인해 볼게요.”
“그래. 나중에 또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렴. 이런 일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줄리안이 자신의 소싯적 모습이 떠오른다며 잠시 추억에 빠져들었다.
똑똑-
문이 열리며 루카스가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빠, 어쩐 일이야?”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어머니도 여기 계셨군요?”
루카스가 줄리안의 볼에 짧은 키스를 날렸다. 줄리안은 아들의 인사를 받아들이다가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나. 둘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라도 나누렴.”
“고맙습니다.”
줄리안의 배려를 알아챈 루카스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할 얘기라고? 뭔데 그래?”
루시아가 초대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루카스는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어쩌다가 캐스퍼 후작이랑 약혼하게 된 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왔어.”
루시아가 멈칫하며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루카스의 얼굴은 진지했다.
자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하는 질문인가 했는데, 그런 가벼운 감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부모님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어?”
“간략한 상황 정도만. 그 이상은 몰라. 물어봐도 대충 얼버무리셨고, 파티 이후엔 일하느라 제대로 얘기할 시간도 별로 없었어.”
“……그래서 그냥 나한테 물어보는 거구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묻고 싶은 거 다 물어봐. 대답해줄게.”
루카스는 입을 달싹이다가 여태껏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쩌다가 맞선을 보게 됐는지, 정말 베른이랑 약혼이라도 할 생각인지 등의 질문을 던졌다. 루시아는 그에 솔직하게 답했다.
대충 전반적인 상황을 알게 된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난 네가 헤르윈이랑 약혼할 줄 알았어.”
루시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쓸쓸하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래?”
“응. 지금은 모르겠지만, 넌 헤르윈을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물론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어도 너랑 헤르윈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니 결혼하면 당연히 그 녀석이랑 할 거라고 생각했지.”
아카데미 시절 의도치 않은 공개 고백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헤르윈에게 고백한 적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건 알아도 그녀가 꾸준히 고백해왔다는 것은 모른다.
그리고 그건 루카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해가 안 가. 헤르윈처럼 좋은 상대가 있는데 왜 굳이 맞선을 보는 건지. 물론 캐스퍼 후작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저 왜 그런 선택을…….”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겠어.”
루시아는 횡설수설하는 루카스의 말을 끊어냈다. 루카스는 멋쩍은 얼굴로 루시아가 답하기만을 기다렸다.
“사실부터 말하자면. 나, 차였어.”
루카스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눈을 서서히 키웠다. 그의 미간이 점차 찌푸려지기 전에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그동안 헤르윈한테 많이 고백했었거든.”
“……고백을 했었다고? 그것도 많이? 얼마나?”
“……그냥, 오빠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너무 많이 고백해서 그런가, 오히려 헤르윈은 내가 이성으로 안 보였나 봐.”
루시아가 애써 웃었지만, 루카스는 차마 그녀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웃지 못했다.
“맞선을 본 건 아버지랑 약속을 해서 그래. 아버지가 더 이상 내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헤르윈이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맞선을 보겠다고 했지.”
“그 말은…….”
뒷말을 잇지 못했지만, 루카스는 왜 루시아가 맞선을 보게 된 것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니 후회는 없어. 그러니 오빠도 아버지 원망하지 마. 오히려 지금은 아버지가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해줘서 감사한 걸?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헤르윈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했을 거야.”
루카스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핏줄이 솟을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는 루시아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평소보다 훨씬 무섭게 느껴졌다. 루시아는 루카스의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 봤다.
“오빠, 화난 건 아니지? 난 괜찮아. 벌써 시간이 꽤 흘렀는걸.”
루카스는 잠시 루시아를 쳐다봤다. 지금 슬프고 화날 사람은 그녀일 텐데 자신을 먼저 챙기는 그녀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루카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경직됐던 몸의 힘을 풀었다.
“……그래, 네가 만족하면 됐어.”
“정말이지?”
“그럼!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 난 사실 내가 여태까지 약혼 한 번 안 해서 나한테 올 화살이 너한테 간 건가 싶었다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 설마. 오빠 나랑 고작 2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내 친구들은 전부 약혼을 했으니까 그러지. 이번엔 아레스도 황녀님이랑 약혼했고.”
“그래도 그런 이유로 내게 맞선을 권하신 건 아닐 거야. 오빠도 아빠 성격 알잖아. 나 엄청 예뻐하시는 거.”
“그래, 잘 알지.”
루시아의 농담에 루카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루카스가 아무리 동생 바보라고 해도 딸 바보인 요한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오빠.”
“응?”
“오빠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응, 여자친구 있어.”
“정말? 저번에 헤어졌다더니.”
“이번에 새로 사귄 여자친구야. 아직 두 달밖에 안 됐어.”
“그래? 여자친구는 좋아해?”
“좋아하니까 사귀지. 안 그러면 왜 사귀겠어.”
계속해서 물어오는 질문에 루카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아는 루카스를 쳐다보다가 씁쓸해진 입을 달싹였다.
“나는 오빠가 꼭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루카스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탄식했다. 흔들리는 그의 벽안을 보고 루시아가 눈매를 휘었다.
“나는 비록 좋아하는 사람이랑 이어지지 못했지만, 오빠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
“루시아.”
“나랑 약속해 줄 수 있지?”
루시아의 벽안에 물기가 차오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눈매는 건조했다.
루카스는 벌렸던 입을 꾹 다물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할게. 꼭 지킬 테니 너도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뭔데?”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할 것. 이 두개만 꼭 지켜줘.”
평소에는 자신을 아끼는 루카스의 마음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기댈 곳이 있다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응, 행복해지도록 노력할게.”
각자의 약속을 꼭 지키기로 굳게 다짐하며 루시아와 루카스는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