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카데미 1학년 때 둘도 없는 절친이었지만, 상대방의 배신으로 다시는 얼굴조차 보지 않게 된 사람. 바로 비앙카였다.
“루시아…….”
비앙카 또한 놀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와 침묵이 흘러 물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복잡했던 머리가 비앙카를 보자마자 도화지처럼 새하얘졌다. 허나, 그도 잠시 냉정함을 되찾고 침착해질 수 있었다.
아카데미 이후 티파티나 크고 작은 행사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서 그만 당황하고 말았지만, 그녀도 귀족이니 이런 큰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랜만이네.”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던 찰나, 비앙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먼저 피하거나, 길을 잃었다는 등의 핑계를 댈 줄 알았는데 설마 그녀가 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루시아는 얼떨떨하게 그녀를 따라 인사했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처음에 눈을 크게 떴던 비앙카가 초연한 얼굴로 루시아의 빈 옆자리를 쳐다봤다.
“옆에 자리 있어?”
“어?”
“없으면 앉는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비앙카는 루시아 옆에 털썩 앉았다. 바로 가까운 자리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떨어진 자리라 차마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혼란스러운 루시아와 달리 비앙카는 대화를 이어나갈 심산인지 다시 말을 건넸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시아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게 지냈지.”
“그렇구나…….”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비앙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애들은 잘 지내고?”
“……응.”
“헤르윈은? 여전히 헤르윈이랑 사이좋게 지내?”
“……….”
“아니면 둘이 약혼이라도 했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헤르윈과 약혼했냐는 말이 비아냥처럼 들려 루시아가 비앙카를 째려봤다. 비앙카는 무덤덤하게 루시아의 눈빛을 받아 채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딱히 이유는 없어. 그냥 궁금한 것뿐이니까.”
많은 사람들을 깜빡 속일 정도로 비앙카는 연기에 능숙했기에 지금도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그녀의 얼굴에선 독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비앙카가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제도로 올라오는 게 간만이라 아무것도 모르거든. 아카데미도 2학년에 들어가기 전에 때려쳤으니 사람들이랑 연고도 없고.”
그녀가 아카데미를 자퇴했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자퇴했는지는 모른다. 워낙 친구들이 그녀의 일을 쉬쉬하기도 했고, 구태여 자신이 직접 알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뭐 자업자득이지. 너희들한테 못된 짓을 저질러 놓고 마음 편히 지낼 리가 없는데. 새로 친해진 애들도 친구를 배신한 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에서야 그녀가 자퇴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비앙카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눈이 멀어선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엔 옅은 후회와 쓸쓸함이 묻어났다.
크리스틴과 삼자대면을 했을 때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에 와서야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안 비웃네?”
돌연 비앙카가 고개를 돌려 말을 툭 내뱉었다. 어리둥절한 루시아를 보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사람이 그리 물러 터져서 어떡할래? 나 같았으면 보자마자 뺨을 때리거나 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런 짓을 왜 해.”
“왜 하긴. 리디아 공녀나 크리스틴이었다면 분명 그랬을걸?”
전혀 웃기지도 않은데 비앙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있지 않아, 그녀는 웃음을 멈추며 다시 루시아를 쳐다봤다.
“……그때는 미안했어.”
“……….”
루시아는 비앙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착해서 영 물러터진 것 같아도 칼 같을 때는 칼 같았다.
그걸 아는지 비앙카도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어. 그냥 다시 만나게 되면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할 말은 끝났는지 비앙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떠나려 하자, 루시아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왜……!”
비앙카가 멈춰서 루시아를 돌아봤다.
“왜 나를 배신했던 거야?”
과거에 그 이유를 들었지만, 비앙카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네가 헤르윈을 좋아했다는 건 알아. 그런데 헤르윈을 좋아했다면 내가 아니라, 아리스타를 표적으로 삼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은 순전히 헤르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꿉친구에 불과한 자신보다 헤르윈이 짝사랑하는 아리스타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 타당했다.
그런데 비앙카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아리스타가 아닌 루시아를 철저히 무너뜨리려고 했다.
루시아는 그녀가 자신을 목표로 삼은 진짜 이유를 듣고 싶었다.
비앙카는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야, 헤르윈이 너를 좋아하니까.”
“……뭐?”
믿기지 않을 말이 비앙카 입에서 흘러나왔다.
크게 놀란 루시아와 달리 비앙카는 평온했다.
“처음에는 소꿉친구인 너도 거슬려서 너랑 리디아 공녀를 헤르윈 곁에서 한꺼번에 없애버리고 싶었어.”
비앙카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아리스타를 폄하하고, 그녀를 함정에 빠트리려 했던 일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계획만 성공하면 두 사람 모두 헤르윈 옆에서 떨어져 나가니 내 입장에선 일석이조지.”
“그런데 왜 갑자기…….”
루시아로 표적을 바꾼 걸까?
“내가 말했잖아. 헤르윈이 리디아 공녀가 아닌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도통 비앙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헤르윈은 내가 아니라 아리스타를 좋아해.”
“거짓말 안 해도 돼. 난 진작에 마음을 접었어.”
루시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비앙카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억울해 보이는 루시아의 표정을 발견하곤 비앙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거짓말이 아니라…….”
“내가 이런 거짓말을 왜 해.”
비앙카가 경악한 얼굴로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잠깐, 그러면 너희 둘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약혼은? 분명 네가 약혼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갑자기 비앙카가 흥분해서 놀랐지만, 루시아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헤르윈이랑 그런 사이 아니야. 난 약혼할 사람이 따로 있어.”
“뭐?”
“아니, 분수에도 맞지 않게 헤르윈 옆에 있다고 뭐라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그리고 헤르윈이 나를 좋아한다니.”
“잠깐, 잠깐, 잠깐.”
흥분한 루시아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비앙카가 중간에 끊어냈다. 비앙카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헤르윈이랑 약혼한 게 아니라. 약혼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비앙카의 반응이 너무 격렬하여 루시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째서? 아니, 도대체 왜? 헤르윈이 그걸 가만둬?”
“……내 약혼인데 헤르윈이 뭔 상관이야.”
“허…….”
지금 기가 찬 게 누군데. 루시아는 황당했다.
비앙카는 입을 가리며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헤르윈에 대한 마음을 다 접었어?”
루시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꾹 다물린 그녀의 입을 보고 놀란 비앙카의 표정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내 그녀는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아직 헤르윈을 좋아하는구나.”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루시아가 변명을 하기 전에 비앙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이대로 만족해? 한평생 다른 사람이랑 살 자신 있어?”
그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비앙카가 처음으로 하게 되자 루시아의 벽안이 흔들렸다.
“나는…….”
답하길 머뭇거릴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루시아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내 익숙한 머스크향을 느끼자마자 듬직한 가슴팍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여기 있어선 안 될 얼굴이 보였다.
“네가 대체 왜 여깄어?”
목울대를 긁는 듯한 짐승 같은 목소리가 살기를 퍼트렸다.
헤르윈이 루시아를 감싼 채 비앙카를 밀친 것이다.
얼떨결에 불한당이 된 비앙카가 당황한 눈으로 루시아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헤르윈을 쳐다봤다.
루시아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저 흉흉한 붉은 눈동자에 집어 삼켜질 것만 같았다.
비앙카가 작은 조소를 날렸다.
“이래도 내 오해라고?”
비앙카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헤르윈의 품에 안긴 루시아를 바라봤다.
“난 더 이상 네 친구도 뭣도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내가 했던 말 잘 생각해봐. 과연 누구 말이 맞는지.”
“루시아는 너한테 할 말 없어. 그러니까… 꺼져.”
헤르윈의 살기를 제대로 마주한 비앙카가 움찔 떨다가 그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비앙카! 비앙카!
그때, 어디선가 비앙카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앙카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립스, 나 여기 있어!”
일행을 향해 크게 외친 비앙카는 루시아와 헤르윈을 돌아봤다.
“……잘 지내.”
그 말만을 남기고 비앙카는 떠나갔다. 저 멀리 비앙카가 한 남자를 다정하게 만나는 모습을 보였다.
칼립스라는 이름과 그녀와 함께 있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본 건지 생각하던 찰나, 끌어당기는 힘에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괜찮아?”
“응? 으응…….”
코앞까지 다가온 헤르윈을 보고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하게 답했다.
“제기랄. 이런 곳에서 저 녀석을 마주할 줄이야.”
헤르윈은 루시아가 비앙카와 마주친 것이 상당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아니, 살기를 담고 있는 것을 보니 그보다 더한 악감정이 실려 있었다.
“캐스퍼 후작이랑 같이 나가더니 왜 너 혼자 여기 있어?”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는 헤르윈을 넋 놓고 보던 루시아는 어깨에 얹어진 뜨거운 온기를 뒤늦게 알아차리곤 퍼뜩 그에게서 멀어졌다.
“잠깐 마실 걸 가지러 갔어. 그리고, 비앙카는 우연히 마주친 거고.”
갈 곳을 잃은 헤르윈의 손이 공중에 머물다가 주먹을 꽉 쥐며 밑으로 내려갔다.
“그렇구나……”
정적이 흘렀다. 헤르윈은 흘긋 루시아를 살폈다.
제 시선을 피하는 루시아의 모습에서 자신을 꺼려 하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선을 그으려는 그녀의 태도에 섭섭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고민도 했지만, 결국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헤르윈은 입을 열었다.
“정말 비앙카 그 녀석이랑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맞지? 혹시 협박당했다거나, 그 녀석이 위협하는 그런 건…….”
“없었어. 정말, 우연히 마주친 게 끝이야.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 처음으로 본 건걸.”
“……그럼 다행이고.”
또 제 말을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다. 헤르윈은 이번에 섭섭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시무룩해진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약해진 루시아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그렇고. 너야말로 여기 어쩐 일이야? 길이라도 잃었어?”
“그게…….”
순간 헤르윈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붉은 눈동자가 진지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너를 찾아왔어.”
이번엔 루시아의 벽안이 흔들렸다.
이 같은 상황이 올까 봐 열심히 피해 다녔던 건데. 결국 이렇게 되다니. 적어도 하루 정도의 시간을 줬다면 술렁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순 없다. 루시아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뭔데? 말해 봐.”
평온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부디 이 심장 박동이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들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너, 정말로 캐스퍼 후작이랑 약혼하는 거야?”
예상범위 내에 있는 질문이었다.
“그래. 아직 확실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 사람도 서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아니, 하지만… 맞선으로 만난 거라며. 그러면 내가 북부에 있는 기간 중에 만났다는 소리인데. 그 짧은 시간 내에 약혼까지 생각했다고?”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맞선을 봤던 거니까.”
“……맞선은 언제 본 건데.”
침착함을 유지하는 루시아와 달리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모자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루시아는 안절부절못하는 헤르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툭 내뱉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