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29)

<49화>

황녀와 아레스를 시작으로 하나둘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찰나, 옆에 있던 베른이 허리를 굽히며 춤을 청했다.

“아가씨,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습니까?”

능글맞은 말투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초승달 눈매를 발견한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루시아는 베른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홀 가운데로 들어섰다. 베른이 오른손과 허리를 잡아 오자 루시아는 거기에 맞춰 그와 호흡을 맞췄다.

음악에 맡겨 춤을 추던 그때, 사람들 사이에 있는 헤르윈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루시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헤르윈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떨쳐냈던 긴장감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루시아의 호흡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자 베른이 살포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루시아, 나만 봐요.”

패닉에 빠졌을 때 도와줬던 것처럼 그는 다정하게 눈을 맞춰왔다. 마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라는 것처럼. 루시아는 홀린 듯 순순히 그를 따랐다.

천근 추를 단 것처럼 무겁던 발걸음이 어느새 가벼워지고, 부담스러웠던 사람들의 시선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괜찮은가요?”

“네. 덕분에요. 베른은 참 눈치가 빠르네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먼저 도움을 주시고.”

“루시아는 자세히 보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요. 그런데 정작 속마음은 보여주질 않으니 제가 눈치껏 행동할 수밖에 없죠.”

“제가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인가요?”

“하하, 제가 말했잖아요. 자세히 봐야 한다고. 음, 뭐라 해야 할까.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 보인달까요.”

베른이 음악에 맞춰, 루시아를 가볍게 안아 들곤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처음에 루시아 친구분들을 만났을 때.”

루시아의 입가가 일순 경직됐다. 베른은 그걸 포착하며 웃음기를 지우고 그녀를 바라봤다.

“좀 불편하신 것 같던데. 제 말이 맞나요?”

“그…….”

당황하면 안 되는데 멍청하게 말려들고 말았다. 아니, 그때는 헤르윈을 너무 과하게 의식해서 누가 봐도 불편해 보였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베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10여 년 넘게 짝사랑했던 남자 때문에 어색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루시아가 곤란한 기색으로 입을 달싹이자 베른은 옅은 숨을 내뱉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저,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루시아의 벽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베른은 다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루시아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분명 제게 도는 소문을 알고 있을 텐데, 어쩌면 헤르윈과 만났을 때 대충 무슨 일인지 눈치챘을 텐데 어째서 그는 아무것도 안 물어보는 걸까?

처음엔 그의 배려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째서 저를 선택하신 거죠?”

가볍게 내뱉은 말이지만, 오로지 순수한 진심이 담겨있었다.

베른도 느꼈는지 그는 짐짓 얼굴을 굳혔다. 생각에 잠기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와 많이 닮아서… 그래서 루시아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순 없었다. 그저 그의 금안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음악이 끝나자 멈춰 섰다.

“답이 됐을까요?”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가장자리로 돌아오니 베른이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반은요. 나머지 반은 궁금하지만, 저도 묻지는 않을게요.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고맙습니다.”

베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서야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곤란해할 걸 뻔히 알면서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큰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그와 함께할 미래에 중요하지 않은 일일 테니 말이다.

“루시아.”

루시아는 저를 부르는 낮은 중저음을 듣자 몸을 굳혔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바로 헤르윈이었다.

루시아 옆에 있던 베른이 조용히 눈을 번뜩였다.

“다음은 나와 춤추자.”

헤르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루시아에게 춤을 신청했다.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한 번씩 그와 춤추고는 했기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를 피하고 싶은데…….

루시아가 제 앞에 내밀어진 헤르윈의 손을 보고 망설일 때, 베른이 앞으로 나섰다.

“베른?”

“실례지만, 지금 루시아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는 게 어떨까요?”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흉흉한 눈빛으로 베른을 노려보던 헤르윈은 루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다정해졌다.

“정말, 몸이 안 좋아?”

“그게…….”

루시아가 헤르윈과 베른을 번갈아 바라봤다.

헤르윈은 그녀가 답하기만을 기다렸고, 베른은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고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

루시아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미안해, 헤르윈. 방금 전에 춤출 때 발을 삐끗했나 봐.”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베른이었다. 언젠가는 헤르윈과 제대로 얘기해야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굳어있던 헤르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루시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혹시 심하게 다쳤어? 그러면 내가…….”

“제가 알아서 잘 보살피겠습니다.”

베른이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루시아와 헤르윈 사이를 갈라냈다.

헤르윈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베른이 계속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채 루시아를 지켰다. 루시아는 눈치껏 자신을 도와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헤르윈은 아무 말도 없이 베른의 뒤에 서 있는 루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결국 뒤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루시아, 나중에 얘기하자.”

“응, 알겠어. 이해해줘서 고마워.”

루시아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베른에게 기대며 발을 절뚝거리는 연기를 했다.

얼추 헤르윈에게서 멀어졌나 싶어 뒤를 돌아보려 하자 베른이 재빨리 속삭였다.

“아직 보고 있어요. 정원으로 나가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른이 이끄는 대로 향했다.

한편, 혼자 남겨진 헤르윈은 멀어지는 루시아를 무력하게 쳐다봤다.

그녀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베른 캐스퍼 후작…….”

맞선을 통해 만나게 됐다고 했나. 베른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듣기로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제 앞을 가로막아서 그런가?

북부에 있던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고 싶었던 것뿐인데. 무슨 불한당이 다가오는 것 마냥 앞을 가로막으니…….

‘그래. 그래서 기분 나빴던 거군.’

이제야 왜 그토록 베른이 탐탁지 않았던 건지 알 수 있었다.

베른은 그렇다 쳐도 루시아는 왜 자신을 피하는 건지 모르겠다.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녀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저 그녀가 베른의 손을 잡아서 모른 척했을 뿐.

베른에게 기대던 루시아를 떠올리자 무척이나 불쾌해졌다. 속에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라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제 편이라 여겼던 친구가 다른 사람의 손을 들어줘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들자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고개를 들어, 루시아와 베른이 향했던 곳을 쳐다봤다.

루시아와 짧게라도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 * *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정원 깊숙한 곳으로 오고 나서야 베른이 멈춰 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뒤를 돌아, 헤르윈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본 그는 근처에 있는 분수로 향했다.

“혹시 진짜로 발목을 다친 건 아니죠?”

루시아를 분수대에 앉히고, 베른이 조심스레 그녀가 절던 오른발을 가리켰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 그냥, 말 맞춘다고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정말요? 계속 다리를 절어서 진짜로 다친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헤르윈을 속이려면 연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루시아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자 베른이 웃음을 보였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자신을 연적처럼 노려보던 헤르윈을 떠올렸다.

“……제가 괜히 나선 건 아닌가 걱정이네요. 어쩐지 페네우스 공자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 일부러 그랬던 건데. 제 생각이 맞나요?”

루시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베른은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왕 여기에 나온 거 조금만 더 이곳에 있도록 해요. 혹시 목마르진 않나요?”

“조금…. 아, 저 때문에 일부러 가시는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아닙니다. 마실 걸 가져올게요. 잠깐 여기서 쉬고 계세요.”

루시아가 괜찮다고 말해도 베른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루시아는 한참동안 베른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계속 장착하던 미소를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아는 구두를 벗어 욱신거리는 발을 만지작거렸다. 새 구두를 신었더니 뒤꿈치와 발가락이 빨갛게 물들었다.

새 구두에 익숙해지기 위해 엉망진창이 된 발처럼 자신 또한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아무리 단단히 각오했다고 한들,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겨웠다.

베른의 약혼녀 행세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이것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들 뿐.

‘헤르윈도 오늘따라 이상했지.’

마음이 흔들리는 것에는 그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친구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약혼자를 데려오면 놀라는 것이 당연한데, 오늘따라 유독 헤르윈만이 친구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꼭 배신감이라도 느낀 것처럼…….’

멍하니 발을 내려다보던 루시아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마음을 접지 못한 것인지. 헤르윈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할 때도 됐을 텐데 13년 동안 여러 번 해왔던 상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제멋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시원한 물소리를 내는 분수를 내려다봤다.

물방울이 튀어, 물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분수에 비친 제 얼굴이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바스락-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베른이 온 건가 싶었지만, 그가 돌아오기에는 조금 일렀다.

“누구-”

누군지 경계하며 뒤를 돌아본 루시아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풀숲에서 나온 사람을 보고 루시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비앙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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