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29)

<46화>

황녀와 아레스의 약혼 파티 당일. 파티 참석 준비로 오랜만에 아그네스 백작가가 분주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줄리안이 루시아가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루시아는 그곳에서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한창 치장하고 있었다.

평소의 발랄한 분위기를 벗어나, 차분하고 성숙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그에 맞춰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리고, 베른이 선물한 토파즈 귀걸이를 착용했다.

제 배로 낳은 자식이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루시아의 모습에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늘 어리고 귀엽기만 했던 딸이 한층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딸, 당장 내일 결혼한다고 해도 깜빡 속겠구나. 너무 아름다워.”

“언제 오셨어요?”

화장하느라 눈을 감고 있던 루시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줄리안은 작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에. 다 되어 가니?”

“네, 마님.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하녀들을 더욱 손놀림을 바삐 하여 루시아의 화장을 마무리했다.

성숙한 드레스에 맞춰, 그녀의 화장은 과하지 않고 본연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선명히 드러내는 데에 집중했다.

루시아는 오늘따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런 루시아를 주변에선 너무나도 아름답다며 칭찬했지만, 그들의 호응에 맞춰 미소를 지어 봐도 자신이 지금 제대로 웃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실을 매달아 조종하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루카스도 오늘 파티에 참석한다고 했으니 파티에 가면 오랜만에 네 오빠를 볼 수 있을 거란다.”

“오빠가 돌아왔어요?”

루카스를 보는 건 거의 반년만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놀라던 것도 잠시 그가 왜 지금 돌아온 건지 납득했다.

“하긴, 오빠는 지금 리디아 공자의 보좌관을 하고 있죠? 공자님 약혼 파티인데 빠지는 게 더 이상하겠네요.”

“루카스도 어서 결혼하면 좋으련만 매번 연애에서 끝이 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제발 이번에 교제하는 영애와는 약혼이라도 했으면 좋겠구나.”

딸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니 남은 아들이 걱정됐다. 여자는 꾸준히 만나는 것 같은데 정작 약혼이나 결혼 얘기가 오가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여기 있었군.”

그때, 요한이 나타났다. 그는 줄리안을 부르려던 것도 잠시, 아름답게 꾸민 제 딸을 보고 멈칫했다.

“여보, 오늘 우리 딸 너무 예쁘지 않아요?”

“……그래, 너무나도 아름답군.”

요한이 천천히 다가와 루시아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그는 손을 거두었다.

곱게 화장한 얼굴과 세팅된 머리를 도저히 만질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루시아 귀에 걸린 귀걸이를 톡 건드렸다.

“처음 보는 물건이구나.”

“며칠 전에 베른이 선물해 준 거예요. 그래서 이번 파티에 끼고 가려고요.”

요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인가 보구나.”

“역시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루시아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요?”

소녀처럼 기뻐하는 줄리안을 보고 루시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베른이 나를 좋아한다고?’

글쎄, 약혼녀로서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맞지만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약혼녀가 될지도 모를 여인에게 최선을 다할 뿐.

누군가는 그 사실이 서운하게 느낄지 몰라도 루시아는 그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호감이 갔다.

물론 이성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말이다.

사실 이 귀걸이를 착용한 이유에는 베른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저 스스로의 다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는 동화를 꿈꾸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지독한 각오.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귀걸이의 무게를 느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슬슬 시간이 됐으니 우리는 이만 가지.”

시간을 확인한 요한이 줄리안을 에스코트했다.

“우리는 먼저 가보마. 후작과 천천히 오렴.”

“네, 파티에서 봬요.”

요한과 줄리안이 먼저 떠나고 루시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조용히 쳐다봤다.

어쩐지 말 한마디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자 세인을 포함한 모든 하녀가 조용히 루시아의 뒤에서 대기했다.

“아가씨, 캐스퍼 후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요한과 줄리안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한 시종이 베른의 도착을 알렸다.

루시아는 천천히 방을 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입구에는 베른이 서 있었다.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평소 쓰던 것과 다른 안경을 착용한 그는 보석으로 세공된 안경 줄로 포인트를 줬다.

거기에 귀걸이와 세트로 맞춘 것 같은 토파즈 브로치가 가슴팍에 달려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다정한 금안이 오늘따라 더욱 지적으로 보였다.

회중시계를 확인하던 베른은 발소리를 듣곤 고개를 들었다.

계단으로 내려오는 루시아를 발견한 그는 그녀의 귀에 걸린 귀걸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습니다, 루시아.”

“베른이야말로 오늘 너무 멋있어요.”

사랑이 담기진 않았지만, 진심 가득한 말이었다.

루시아가 내민 손을 조심스레 쥔 베른이 장갑이 씌워진 그녀의 손에 작은 입맞춤을 하며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제가 선물한 귀걸이를 착용하셔서 기쁩니다.”

“오늘 같은 날에 베른이 선물해 준 이 귀걸이 말고 뭘 쓰겠어요.”

“하하, 그런가요? 고심 끝에 고른 건데 제 선택이 탁월했네요. 밝은 노란색이 루시아의 분위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그런가 싶어 루시아는 귀걸이를 톡 건드렸다. 보석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파티장에서 헤르윈과 마주칠 거라는 생각에 조금씩 동요하던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았다.

“이번 파티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루시아는 어떤가요?”

베른의 질문에 루시아는 벽안을 낮게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저도 기대됩니다.”

그녀의 벽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 * *

황실에서 열린 대규모의 약혼 파티.

황녀의 약혼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앞서 일찍이 도착한 헤르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파티장에 나타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강인한 턱선과 베일 것 같은 콧날, 흑발 사이로 보석처럼 번뜩이는 반항적인 붉은 눈동자.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외모의 소유자에다가 옷태로도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과 복근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었다.

외모는 물론이고, 가문까지 훌륭하니 헤르윈은 수많은 미혼 남자 중 몇 없는 최상 등급 신랑 후보였다.

많은 여성이 이번 파티를 빌미로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는 특유의 차가운 태도와 철벽으로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승부욕을 자극해 여성들은 의욕을 불태웠다.

그때, 무심하던 헤르윈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의 미소를 보고 몇몇은 쓰러지는 소리를 내고, 몇몇은 그의 미소를 만들어낸 인물을 질투하며 헤르윈이 다가가는 사람을 지켜봤다.

그 상대는 아리스타였다. 오늘 황녀와 약혼하는 아레스의 동생이자, 헤르윈 못지않게 인기 많은 여인이었다.

멀리서 봐도 한 폭의 그림 같은 두 사람을 보고 그들을 노리던 남녀들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헤르윈과 아리스타는 오랜만의 재회에 인사를 나눴다.

“왔네? 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나라의 큰 행사인데 빠질 수 없잖아. 우리 부모님은 참석하지 못하시니 나라도 와야지.”

아리스타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를 듣고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몬스터를 토벌한다더니 그럼 북부에 갔다 온 거야?”

“응, 어젯밤에 도착했어.”

“호오, 그래? 북부에선 어땠어?”

“어떻긴 뭘 어때. 그냥 몬스터만 주구장창 잡고 왔는데.”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리스타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까, 그 몬스터들이 어땠냐고. 많이 강했어? 주로 어떤 종류의 몬스터들이었어?”

“……하, 참. 내 안부보다 그게 더 중요하지?”

“당연한 거 아냐? 제국 내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는 곳은 북부밖에 없잖아.”

자신이 몬스터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이 어이없던 것도 잠시, 기대 가득한 아리스타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나름 검 휘두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리스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정 그러면 너도 나중에 같이 몬스터 토벌하러 갈래?”

“정말?”

아리스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초롱초롱해진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헤르윈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그러자 기분이 상했는지 아리스타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웃음은?”

“아니, 참 알기 쉽구나 싶어서.”

“지금 내가 쉬운 여자라 이거야?”

“그게 아니라. 검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하는 말이야. 네 관심사는 오직 검뿐이잖아.”

헤르윈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아리스타가 턱을 치켜세웠다.

“아리스타 리디아에게 검 빼면 시체뿐이지.”

“그 정도야?”

“당연하지! 태어날 때부터 내 손엔 검이 있었다고. 너 오늘 약속 잊으면 안 된다? 꼭 몬스터를 보고 싶단 말이야.”

“몬스터와 힘겨루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거나 저거나 같은 말이지.”

아리스타가 장난꾸러기처럼 배시시 웃었다.

“너희 여기 있었구나?”

그때, 대규모 파티에 걸맞게 화려하게 꾸민 브라이언과 에단, 크리스틴이 나란히 다가왔다.

그들은 헤르윈을 보자마자 어디 다친 곳 없냐며 안부를 물었다.

“보다시피 다친 곳은 없어.”

“다행이네요. 몬스터 토벌에 나선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내 말이. 자진해서 몬스터 토벌하는 별종은 네 녀석 말고는 없을 거다.”

에단이 크리스틴 말에 동의하며 혀를 내둘렀다. 헤르윈은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아리스타를 흘겨봤다. 그녀는 어쩌라는 눈빛으로 답했다.

“아리스타, 오늘 네 오빠의 약혼 날인데 소감이 어때?”

“어쩌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내 약혼식도 아닌데, 뭐.”

브라이언의 질문에 아리스타가 떫은 것을 씹은 마냥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그 녀석이 약혼한 덕분에 당분간 부모님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겠어. 이제 약혼해야 하지 않겠냐며 얼마나 잔소리하던지.”

“저도 요즘 그것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결혼적령기에 들어섰으니 걱정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전 아직 놀고 싶은걸요.”

아리스타의 고충을 이해하는지 크리스틴이 곤란한 기색으로 맞장구쳤다.

“주변에서 하나둘 약혼하니까 부모님들이 더 그러시는 것 같아. 동기들 중에선 결혼한 애들도 몇몇 있잖아.”

“맞아, 슬슬 혼담이 들어오더라고. 과연 우리 중에선 누가 가장 먼저 결혼할까?”

브라이언이 툭 내뱉은 질문에 모두 하나같이 헤르윈을 쳐다봤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날 봐?”

“아니, 그냥 네가 먼저 갈 것 같아서.”

“응, 응.”

농담으로 받아들인 헤르윈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자도 없는데 결혼은 무슨. 내가 봤을 때는 에단, 네가 먼저 할 것 같은데?”

헤르윈의 말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헤르윈이 가장 먼저 할 것 같다며 서로 속삭였다.

“그런데 루시아가 좀 늦네. 아직 안 왔지?”

“네, 계속 둘러보고 있는데도 좀처럼 보이질 않네요.”

루시아 이름이 나오자 헤르윈의 낯이 어두워졌다. 분명 북부에서 떠나기 직전,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

편지가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사흘 전쯤에 그녀에게 편지가 갔을 테니 굳이 답장하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영 기분이 찝찝했다.

헤어지기 직전,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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