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겨우 세 번밖에 만나지 않았고, 약혼을 확정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가까워져도 되는 건지 잠시 의문이 들었다.
그 누구와도 교제를 해 본 적 없었기에 지금 적절한 속도로 단계를 밟아가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거리를 걷던 루시아는 베른을 응시했다.
‘대체 왜 나를 고른 거지?’
그가 편지를 통해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루시아는 의아했었다.
물론 맞선을 봤을 당시 좋은 감정으로 헤어졌으니 애프터 신청하는 게 당연한 걸 수도 있지만, 베른이라면 굳이 자신을 약혼녀 후보로 두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살에 갓 후작이 된 남성. 외모 준수, 지적 매력 겸비에 다정한 성격까지. 형제자매도 없어 후작위가 위태로울 일도 없다.
그야말로 누구나 노릴 법한 훌륭한 신랑감. 그렇다면 맞선 제의가 여럿 들어왔을 텐데 그중에서 자신을 고른 것이 루시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 또한 나쁘지 않은 신붓감이지만 사교계에 퍼져 있는 소문 때문에 꺼려 할 여지는 충분했다.
하지만 베른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사교계에 퍼진 소문이나 헤르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다른 여자들이랑 저울질이라도 하는 건가?’
어쩌면 자신이 모를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여성과 만남을 가지며 누가 더 미래 배우자로 적합한지 확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저.”
빤히 베른의 얼굴을 쳐다보던 루시아는 그의 입이 벌어진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베른은 민망하다는 듯 곤란한 기색이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계속 쳐다보시기에…….”
“아! 아,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죄송합니다.”
몰래 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를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보다.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연신 사과했다. 베른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너무 사과하지 마세요. 혹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루시아는 말하길 주저했다. 딱 잘라 싫다고 말하려 해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얼굴을 보고 생각에 잠겼기에 대충 둘러댈 수 없었다.
“혹시 저 말고도 다른 여자들과 만남을 가지시나 해서…….”
“네?”
깜짝 놀랐는지 베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말하고도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 잘 알기에 루시아는 민망했다.
“후작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후작님께 저 말고도 다른 약혼녀 후보들이 있지 않을까… 역시 무례한 생각이었죠? 죄송해요.”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예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시아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베른은 얼떨떨하게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동을 한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루시아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바람을 피는 건지 의심하는 건 딱히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니… 아!’
베른은 루시아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베른과 루시아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있는 단계. 딱히 사귀자고도, 약혼하자고도 어떠한 얘기도 오가지 않았다.
피차일반 어차피 약혼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니 서로 외에도 다른 후보자들을 물색해도 상관없었다.
실제로 여러 후보자들을 동시에 만나보고 약혼자를 고르는 사람도 존재하니까.
베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과 안절부절못하는 귀여운 표정이 보였다.
푸른 벽안과 눈이 마주치자 베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는 파렴치한 짓은 안 합니다.”
“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면… 저와 약혼 의사가 있어서 만남을 가지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베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며 선한 노란 눈동자를 피했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못된 상상을 한 것만 같아 창피했다.
“제가 영애에게 마음이 없다면 오늘 이리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았겠지요. 저희가 실제로 약혼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영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애께서는 어떠신가요?”
그의 말투 하나하나에 정중함과 배려가 묻어 있었다. 루시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겨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마음에 없는 상대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아닙니다.”
돌려 말했지만, 명확히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 대답으로 만족하는지 베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다행이네요, 영애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많았었는데.”
그가 농담을 던짐으로써 약간 경직됐던 분위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너무 성급하게 물은 것은 아니나 걱정했는데, 말하길 잘했다. 이제 비교적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영애께서도 받으셨습니까?”
“뭘 말씀이시죠?”
“황녀 전하의 약혼 파티 초대장 말입니다.”
“아, 네. 며칠 전에 초대장이 왔습니다.”
황녀와 리디아 공자의 세기의 약혼식. 제국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중요한 행사를 모를 리 없었다.
“약혼식을 간소화해서 약혼 파티만 치른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시다면 그때 저와 파트너로 가시겠습니까?”
루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따라 멈춰선 베른은 그녀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모일 대형 파티에 파트너와 함께 참석하는 것은 친한 친구 혹은 연인이 아닌 이상 극히 드문 일.
그 말은 즉, 그와 같이 참석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약혼 의사를 내비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그의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른 헤르윈의 얼굴이 제 입을 막았다.
루시아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아, 공허해졌다가 이내 이채가 돌며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맑아진 푸른 벽안이 베른을 쳐다봤다.
“잘 부탁드립니다, 후작님.”
“딱딱하게 후작님 말고 앞으로 베른이라고 불러주세요, 영애.”
“저도 영애 대신 루시아라고 불러주세요. 베른.”
서로 이름을 부름으로써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아는 베른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
* * *
“오늘 데이트는 어땠어? 캐스퍼 후작이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 같던데.”
줄리안은 저녁 식사 도중 루시아에게 물었다.
루시아가 베른과 무탈하게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눈치였다.
누가 봐도 들뜬 줄리안의 표정을 보고 루시아는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았어요. 베른이 다정해서 같이 있으면 편하더라고요.”
“어머, 어머 벌써 서로 이름으로 불러? 어제까지만 해도 후작님이라고 하더니!”
“……뭐, 그렇게 됐어요.”
“큼, 나도 몇 번 본 적 있지만, 요즘 보기 힘든 성실한 남자야. 그래도 본심을 숨기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 잘 살펴보렴.”
루시아는 상석에 앉은 요한을 쳐다봤다. 그는 줄리안과 달리 베른이 탐탁잖은 것 같았다.
맞선을 보라고 제안하고, 직접 고르고 고른 후보가 딸과 잘 되고 있다는데 저 퉁명스러운 반응은 뭘까?
루시아가 의아해하자 줄리안이 속삭였다.
“네 아버지가 조금 속상해서 그렇단다. 아무래도 딸을 떠나보내는 게 심정이 조금 복잡한가 봐.”
“지금 루시아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요.”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줄리안은 능청스럽게 요한의 시선을 피했고, 그는 잠시 그녀를 흘겨봤다.
“그리고 저, 황녀 전하의 약혼 파티에 베른과 함께 갈 것 같아요.”
루시아는 조용히 그와의 약속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줄리안의 얼굴은 더없이 환해졌고, 그와 반대로 요한은 어두워졌다.
“후작이 먼저 제안했니?”
“네, 그래서 같이 가기로 했어요.”
줄리안이 박수를 치며 호들갑 떨었다.
“잘됐구나, 얘. 후작이 널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야.”
“흥, 우리 루시아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돈데 뭘 그리 잘됐다고.”
“당신은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요. 캐스퍼 후작이 루시아를 좋게 보면 다행인 거지. 들어보니까 잘 대해주는 것 같은데 뭐가 그리 불만이에요?”
요한은 반박할 말을 못 찾은 듯 침음을 흘리다가 그래도 사람 일 모른다며 좀 더 두고 봐야겠다고 고집부렸다.
줄리안이 이제 와서 루시아가 품을 떠나는 게 아깝냐며 투덜거렸다.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루시아는 슬그머니 식당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책상에 올려진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친구들이 보낸 건가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가던 것도 잠시, 익숙한 인장과 발신인을 보고 멈칫했다.
“……헤르윈.”
다름 아닌 헤르윈이 보낸 편지였다. 그의 편지임을 눈치챈 순간부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빨라지는 고동과 울렁거리는 속, 그리고 축축해지는 손까지. 루시아는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헤르윈을 떠올리면 마냥 좋기만 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마음이 불안정했다.
오랜만에 몸 전체를 뒤흔드는 감각을 느끼자 그 충격이 전보다 크게 다가왔다.
그래도 루시아는 애써 동요를 멈추며 편지를 뜯었다. 헤르윈 특유의 시원시원한 필체가 보였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저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와 자신은 북부에서 몬스터를 토벌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 내 할 일은 끝나서 오늘 다시 제도로 돌아갈 거야. 』
루시아의 손이 움찔거렸다.
편지를 썼을 당시에 출발한 것 같으니 편지가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곧 그가 제도로 돌아올 것이다.
『 며칠 뒤면 황녀 전하의 약혼식이라지. 그곳에 참석할 생각인데 너도 그렇겠지? 』
루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그 약혼식에서 다시 만나자.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봤으면 좋겠다. 』
그 문장을 끝으로 편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편지를 쥔 손이 무력하게 밑으로 떨어졌다.
“웃는 얼굴로…….”
과연 그를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을까? 아니, 한 달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걸까.
점점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루시아는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 하자는 거야, 루시아. 내가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고 했잖아.”
자신이 먼저 그런 말을 해놓고선 이제 와서 헤르윈을 원망하는 것이 기가 막혔다.
머리가 차갑게 식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헤르윈이 먼저 편지를 보낸 것은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헤르윈은 뒤늦게 답하곤 했다.
그가 먼저 편지를 보낼 때는 급한 일이 있을 때 뿐. 그 외에는 거의 없었다.
“헤르윈 나름대로의 화해 신호일까?”
싸운 적도 없으니 화해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선 마지막에 헤어졌을 때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때도 그답지 않게 거절당한 자신을 붙잡았었으니.
그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굳게 다짐한 제 결심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흔들린다고 해서 현재 처한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헤르윈과 재회할 파티장에 자신은 베른의 파트너로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헤르윈뿐만 아니라 모두가 자신과 베른의 관계를 알게 되겠지.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동화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더 이상 그녀의 벽안은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