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상했다. 3주면 루시아가 편지를 보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평소 그녀가 보내던 양을 생각하면 적어도 3통은 쌓였을 거라 생각했는데…….
헤르윈은 결국 설렁줄을 흔들어 집사를 불렀다.
“정말 내게 온 편지를 전부 들고 온 것이지?”
“네, 맞습니다. 혹시 기다리시던 거라도 있으신가요?”
루시아의 이름을 말하려던 헤르윈은 잠시 멈칫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제도 저택에서 보낸 것들도 전부 온 것이 맞는가?”
“네. 주기적으로 제도에서 편지들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분명 도련님의 편지 중에 있을 겁니다.”
집사의 말에 편지를 다시 살피니 이중으로 우표가 붙은 봉투가 몇 개 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루시아는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마음 한켠이 허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편지를 보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도련님, 혹시 찾으시는 것이 있다면 도와드릴까요?”
아직 떠나지 않은 집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헤르윈은 정신을 차렸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내가 착각했다. 이만 가 봐.”
“네. 혹시 또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찾아주십시오.”
탁-
집사가 나가고 헤르윈은 복잡한 심정으로 편지들을 훑어봤다.
대체 왜 루시아는 편지를 보내지 않은 걸까?
어린 시절부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땐 꼭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정확히는 답장을 해주기도 전에 루시아가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보내곤 했지만 말이다.
“아, 혹시…….”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북부로 오기 전, 루시아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었다.
다시 웃는 얼굴로 보자고 말하긴 했지만, 아직 마음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이 납득 됐다.
우는 얼굴로 자신을 뿌리치는 루시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 같은 불편함이 느껴졌다.
대체 그녀는 왜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루시아는 정말 좋은 친구지만, 그녀가 자신과는 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난처했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처럼 매몰차게 선을 긋기에는 이미 그녀는 제게 소중한 존재였다.
루시아와는 남이 되기 싫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면서도 냉정하게 대하질 못했다.
무너져내린 루시아의 얼굴이 떠오르자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잔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아직 젖어있는 머리를 털며 헤르윈은 편지로 신경을 돌렸다.
편지는 헤르윈과 친해지기 위해 보낸 사교계 행사의 초대장이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루시아 외의 친구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에단, 브라이언, 크리스틴 그리고 아리스타까지.
헤르윈은 찬찬히 그들의 편지를 읽어 내렸다. 안부를 묻는 그저 평범한 편지에 불과했다.
그 안에 친근함과 함께 언제쯤 돌아오냐는, 몸조심하라는 말들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타의 편지를 읽었다. 아리스타의 단정한 필체를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읽어보니 중요한 소식이 있었다.
“약혼이라…….”
곧 제국 전체에 퍼질 세기의 약혼 소식. 바로 황녀와 리디아 공자, 아레스 리디아의 약혼식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전에 아리스타가 황실과 약혼 이야기가 오간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하긴, 미혼인 황자가 없으니 아리스타보다는 아레스의 약혼이 훨씬 현실성 있었다.
그래도 아리스타가 황실과 인연을 맺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땐 조마조마했다.
그 누가 와도 아리스타가 아깝기 그지없으니까.
만약 가문의 명으로 그녀가 정략결혼을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문무와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인물이 그녀의 짝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자신과 아리스타가 이어지는 상상은 해본 적 없다. 어차피 가문의 관계상 아리스타와 이어질 수 없으니까.
이제 막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헤르윈에게 결혼은 지금으로서 머나먼 이야기에 불과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그 날 저녁. 헤르윈은 처음으로 제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황녀님께서 약혼식을 올린다고.”
“네, 그래서 조만간 다시 제도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덕에 목표치보다 많은 몬스터를 토벌했으니 이제는 돌아가도 상관없다.”
허락의 말과 함께 하일이 음식을 음미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두 부자의 대화를 듣고 스칼렛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드님이 너무 바쁘셔서 다시 가야 한다니 안타깝군요. 내 이럴 것 같아서 성에 자주 들러서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얘기했던 건데.”
“죄송해요, 어머니. 다음에는 더 오래 머물게요.”
“당신도! 어찌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에 던질 수가 있어요! 적어도 하루는 성에서 푹 쉬어야 할 것 아니에요.”
“몬스터 토벌을 도와달라고 한 건 맞지만 그곳으로 바로 간 건 헤르윈의 의지였소.”
스칼렛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하일이 화살을 헤르윈에게로 돌렸다.
헤르윈이 너무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하일은 스칼렛의 비위를 잘 맞춰달라는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제도에 가면 또 언제 돌아올 거니?”
“글쎄요. 일단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무미건조한 대답에 스칼렛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는 그만 북부로 돌아오는 것이 어때? 슬슬 공작위를 계승해야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계속 제도에 있었으니 돌아올 때도 되긴 했지.”
하일이 스칼렛 말에 맞장구쳤다.
예상은 했지만, 설마 바로 북부로 돌아오라고 말할 줄은 몰랐다. 헤르윈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에 약혼 먼저 하면 좋을 텐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약혼이라…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니 지금부터 찾는 것도 나쁘진 않지. 혹시 제도에서 마음에 드는 여식은 없었니?”
이채가 도는 두 쌍의 눈을 보고 헤르윈은 일부러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 꼭 그 얘기를 하셔야겠습니까?”
“어머,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잖아. 제도에 내려가면 또 한동안 올라오지 않을 텐데 언제 물어볼 시간이나 있겠어?”
스칼렛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잔소리했다. 이윽고 그녀는 은근한 기색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속삭였다.
“루시아랑 약혼하는 건 어때?”
“어머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면 루시아가 딱 아니야?”
퉁명스럽게 맞받아치는 스칼렛을 보며 헤르윈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흠, 루시아라. 나쁘지 않네.”
“역시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루시아처럼 귀엽고 착한 애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식으로 아그네스 가에 서신이라도 보내볼까?”
헤르윈의 의사를 제하고 하일과 스칼렛 두 사람이 루시아를 약혼녀로 들이자고 떠들어댔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뭐 하시는 거예요, 두 분 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그렇게 싫어해? 혹시 루시아가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스칼렛 말이 맞다. 루시아랑 약혼하는 게 어때서 그래.”
헤르윈은 잠시 멈칫했다. 두 사람의 말대로 루시아 정도면 훌륭한 신부감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녀와 자신이 약혼하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마침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보자꾸나. 내가 알기론 루시아가 너를 좋아한 지 10년은 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너는 정말로 단 한 번도 루시아를 이성으로 본 적 없니?”
스칼렛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대충 둘러댈 수가 없었다.
할 말을 찾으며 입을 달싹이던 헤르윈은 문득 루시아를 떠올렸다.
가슴팍에 올 정도로 작은 키에 동글동글 귀여운 외모,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착한 성정까지.
그녀의 모습과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선명히 그려졌다.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어주는 그녀의 미소는 어렸을 적부터 숱하게 봐 온 익숙한 웃음이었다.
그런 그녀를 이성으로 본 적이 있었던가?
글쎄, 모르겠다.
절대 멀어지고 싶지 않은 친한 친구임은 분명하나 이성까지는 잘…….
우수에 찬 붉은 눈동자와 복잡해 보이는 헤르윈의 표정을 보고 하일과 스칼렛은 서로를 쳐다봤다.
“……글쎄요. 그저 루시아는 제게 가장 소중한 친구일 뿐입니다.”
헤르윈이 겨우 답을 내놓았다. 헌데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이성으로 본 적 없냐는 질문을 이리 오래 고민하고, 진지하게 답할 일인가 싶어 스칼렛은 의아했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헤르윈이 루시아를 단순히 친구로만 보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몰아붙이면 무뚝뚝한 아들이 영영 입을 다물어 버릴 것만 같아 스칼렛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렴.”
다만, 조언 정도는 할 생각이다.
“루시아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할 거란다. 그 아이가 다른 사람 손을 잡고 떠났을 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정한 친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알아서 잘 생각해보렴.”
헤르윈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동요를 멈추고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스칼렛의 눈엔 보였다. 그가 지금 적잖아 당황했다는 것을.
* * *
“재밌었네요. 요즘 가장 유명한 연극이라 해서 기대했었는데 상상 이상입니다. 영애는 어떠셨나요?”
“네, 저도 좋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랫소리가 참 듣기 좋더군요.”
루시아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베른과 나란히 극장을 빠져나왔다.
2주 전, 처음으로 베른과 만남을 가지고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약속을 잡았다.
오늘이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가 재밌는 연극을 예매했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역시 그가 예매한 것은 ‘사랑의 이면’이었다.
바로, 헤르윈에게 마지막 고백을 하기 전에 봤던 그 연극이었다.
한 번 더 보는 거라 조금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번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영애는 어느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까?”
“음, 전반적으로 다 좋았지만 역시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제 사랑을 찾아 떠나는 부분이 좋았어요.”
사실 그보다는 여주인공에게 선택받지 못한 남자 주인공이 씁쓸하게 퇴장한 부분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그 장면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자신의 대답은 누구나 마음에 들어할 만한 장면이었으니까.
“그런가요? 저는 여주인공에게 선택받지 못한 또 다른 남주인공의 독백이 더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베른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단 것을 알게 되자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두 사람이 행복해지면 질수록 남겨진 사람은 처절히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게 참 슬프더라고요.”
쓸쓸히 말하던 베른은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가 넋을 놓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베른이 머쓱한 웃음으로 선한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너무 어두운 이야기였나요? 보통은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을 좋아하니 어쩔 수 없…….”
“아니요. 답이 의외여서 조금 놀랐습니다. 이상했던 건 아니에요. 후작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옅은 미소를 품은 것을 보자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베른이 조심스레 팔뚝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루시아는 잠시 그의 팔을 내려다보다가 살포시 단단한 팔뚝에 손을 얹었다.
베른은 숲에서 만난 사슴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루시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가 자신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루시아는 그의 속도에 맞춰 마음의 벽을 낮췄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