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29)

<43화>

생각지 못한 제안에 베른이 당황했다.

“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후작님도 돌아가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혹시, 다른 일정이 있으세요?”

“그건 아닙니다만…….”

“여봐라, 저택에서 캐스퍼 후작가까지 거리가 먼 것이냐?”

우물쭈물하는 베른을 뒤로하고 루시아가 마부에게 물었다.

“자택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아마 20분 정도 더 가야 있을 겁니다.”

20분이면 결코 멀지 않은 거리. 대답을 들은 루시아가 베른을 쳐다봤다.

“그렇다네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머뭇거리던 베른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베른이 올라서자 세인은 마부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차가 움직이고 약간 경직된 분위기가 흘렀다.

어색한 공간 속에서 베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영애. 덕분에 자택까지 편하게 갈 수 있게 됐네요.”

“뭘요. 어차피 가는 길이라면 같이 가는 게 좋으니까요.”

“영애에게 민폐만 끼친 것 같아 면목 없습니다.”

“지각하신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더 이상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과는 진작에 받았잖아요.”

베른은 침착하게 대답하는 루시아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루시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하하하, 큼.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왠지 영애와 대화하면 할수록 첫인상과 좀 다르게 느껴져서.”

베른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작고 여리여리하셔서 성격도 그러실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털털하셔서 놀랐습니다. 저보다 연하라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그래서 불만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낯간지러운 말에 루시아는 잠시 놀라다가 머쓱하게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와 대화할 때마다 느꼈지만, 그는 참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말재주를 지녔다.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불쾌하지도 않았다.

루시아는 부끄러움을 털어버리고 베른을 잠시 살펴봤다.

이제 보니 외모도 꽤나 준수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맞선 상대 중에서는 가장 유려한 외모였고, 지적이고 다정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스타일의 남자였다.

‘헤르윈과는 정반대네.’

헤르윈은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인상이 차가운 편이었고, 검술로 다져진 몸 덕분에 지적이기보다는 야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친한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 매력도 있긴 하지만…….

자연스레 베른에서 헤르윈으로 생각이 옮겨가자 루시아가 머리를 내저었다.

맞선 상대를 앞에 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니 무례한 행동이었다.

헤르윈에 대한 마음을 많이 접었다고는 해도 오랜 기간 머릿속에 각인된 흔적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루시아는 괜히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낯이 좋지 않습니다.”

베른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자 루시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잠깐 두통이 일어서…….”

“저런, 집에 들어가시면 푹 쉬십시오. 곧 여름이라고 해도 이런 날씨에 감기라도 걸리면 호되게 앓습니다.”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흔들리던 마차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갔다. 창밖을 살피니 낯선 저택이 보였다.

“다 왔군요.”

캐스핀 후작저에 도착한 모양이다. 베른이 마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나중에 또 뵙길 바라겠습니다.”

베른은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가 가는 것을 확인하고 마부석에 앉아있던 세인이 마차로 들어왔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다.

“아가씨, 이번엔 성공인가요?!”

“마차에 태운 걸 보면 얼추 예상이 되지 않아?”

혹시 부정적인 답이 나올까 조마조마하던 세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정말 다행이네요! 설마 마지막 한 명까지 이상한 사람이었으면 어떡하나 걱정 많았어요!”

“그래, 적어도 앞선 세 명보다는 좋은 사람이더라. 네 말대로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이번에도 꽝이었으면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앞선 세 사람도 대충 핑계를 덧붙여 별로라고 말했는데 이번 네 번째도 거절한다면 결혼하기 싫어서 피하는 걸로 보일까 봐 걱정했었다.

“아가씨, 혹시 페네우스 공자님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던가요?”

루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오늘은 헤르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왔어. 사교계에 퍼진 소문도 말이야.”

“어머, 정말요? 그것만으로도 합격이네요.”

“어째 나보다 네가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그동안 앞서 본 사람 모두 그 이야기를 꺼냈었잖아요. 그걸 얘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합격 아닌가요? 제가 봤을 때는 캐스퍼 후작님 같은 사람은 앞으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봤자 첫 만남에 불과하니 나중에라도 물어볼 순 있겠지만, 제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물어볼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 같은데.’

진중하게 사과하는 그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네 말대로 사람이 나쁘진 않지. 이변만 없으면 계속 이 사람이랑 만나고 싶어.”

“그거참 다행이네요. 부디 첫인상 그대로 쭉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루시아는 말을 흐리며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대로 베른과 약혼하고, 결혼까지 해 쭉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걸까?

루시아의 머릿속에는 하얀 드레스와 베일을 쓴 자신의 옆으로 신랑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졌다.

처음에 헤르윈이었던 얼굴은 이내 베른의 얼굴로 바뀌었다.

두근거렸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아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가슴은 뛰지 않아도 이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상상이었다.

그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울적하여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 * *

키에에엑-!

곳곳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비명과 사람들의 고함, 그리고 서걱거리는 날 선 소리까지.

짙은 혈향이 나는 이곳은 바로 북부였다.

새로운 몬스터 무리를 발견한 북부 기사단이 눈에 보이는 대로 몬스터를 도륙했다.

일반적인 붉은 피와 달리 녹색의 진득한 피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끼익! 끼이익!

서걱-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몬스터가 도망치는 것을 발견한 헤르윈이 붉은 오러를 칼에 휘감으며 단칼에 몬스터를 베어냈다.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몬스터 사체를 보고 헤르윈은 얼굴에 튄 피를 거칠게 닦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자님!”

헤르윈이 대충 칼에 묻은 녹색 피들을 닦아낼 때, 그의 곁으로 기사들을 통솔하는 대장이 다가왔다.

과거, 검술을 배울 적에 도움을 많이 주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이야, 매번 도련님의 오러를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옵니다. 그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오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째, 칭찬이 과한 것 같은데?”

알랑거리는 말투에 헤르윈이 피식 웃었다.

“하하하! 도련님 덕분에 일이 수월해져서 그렇지요.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시간도 더 걸리고, 피해도 훨씬 컸을 겁니다.”

빈말은 아니다. 실제로 헤르윈이 합류한 뒤로부터는 토벌 속도도 빨라지고, 기사들의 피해도 줄어들었다.

“너무 띄워주지 말게나. 나는 그저 하나의 기사로 이곳에 온 것뿐이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으로 가시면 다시 공자님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눈도장이라도 찍어두는 거지요.”

과하게 손을 삭삭 비비며 일부러 몸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장난으로 보였다. 헤르윈은 실없다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임시 천막으로 향했다.

헤르윈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경례했다.

“페네우스 공자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네. 또 발견된 몬스터 무리는 없나?”

“네, 이 근방에 있는 모든 몬스터는 사살했습니다. 그래도 잔당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현재 순찰 중입니다.”

“그렇군.”

헤르윈은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살폈다. 지도에 기록된 몬스터의 분포도와 토벌한 기록을 보니 확실히 처음 토벌대에 합류했을 때에 비하면 많이 줄어 있었다.

“공자님, 저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 기사가 건네주는 두루마리를 펼쳐보자 그 안에는 이만 돌아오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이곳에만 벌써 3주 넘게 있었던가.’

저택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전쟁터로 온 헤르윈이었다. 부모님이 서운해 하실 만했다.

헤르윈은 하는 수 없이 짐을 꾸리고 말 하나를 빌렸다.

“나는 이만 돌아가마. 뒤를 부탁하지.”

“네! 염려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련님! 돌아가서 제 활약에 대해 잘 말씀해주세요! 아시겠죠?”

중간 중간에 들려오는 농담에 헤르윈은 작은 웃음을 보이며 말을 몰고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하니 정문 앞에 서 있는 스칼렛이 보였다. 그녀는 말을 몰고 오는 헤르윈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니, 안에 계시지, 왜 나와 있으세요.”

“우리 잘나신 아드님 얼굴 잊어버릴까 봐 나와 있었답니다.”

스칼렛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헤르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고귀한 공자는 어디 가고 웬 거렁뱅이 한 명이 서 있었다.

“대체 꼴이 이게 뭐니? 그러게 이 엄마가 중간중간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했잖아!”

“그건 비효율적이잖아요. 저택을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몬스터 한 마리를 더 잡겠어요.”

“어쩜, 네 아버지랑 똑같을까? 그런 것까지 닮지 않기를 바랐는데.”

헤르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내젓는 스칼렛의 어깨를 살살 토닥였다.

“헨리가 그나마 어머니를 제일 많이 닮았잖아요. 그거라도 위안 삼으세요.”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구나.”

이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건지. 스칼렛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헤르윈을 쳐다보다가 그의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지금 당장 씻고 와!”

“넵.”

이 성에서 스칼렛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헤르윈은 고분고분 그녀의 말을 따르며 자신에게 따라붙는 사용인들에게 짐과 겉옷을 건넸다.

문득 복도를 거닐던 그는 옆에 있는 집사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혹시 그동안 내게 온 편지는 없었어?”

“있습니다. 씻고 나오시면 바로 읽으실 수 있도록 방에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헤르윈은 가벼워진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섰다. 갑자기 그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의아해하던 집사는 서둘러 그의 편지를 가지러 내려갔다.

헤르윈은 그간 3주 동안 밖에서 뒹굴고 구르며 생긴 묵은 때를 깨끗하게 벗겨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섰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수건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책상에 올려져 있는 편지들을 보고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서둘러 책상에 다가갔다. 그리고 편지를 하나하나 살피던 그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이윽고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루시아 편지가 없네?”

수많은 편지 중에는 루시아의 편지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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