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하아…….”
루시아의 입에서 짙은 탄식이 흘러나오자 세인이 안절부절못했다.
“저, 아가씨…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시면 맞선은 뒤로 미룰까요?”
“됐어. 어차피 봐야 할 거. 얼른 만나고 얼른 끝내는 게 낫지.”
“하지만…….”
루시아는 세인이 제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구겼던 인상을 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연달아 받다 보니 많이 예민해졌나 봐.”
“아뇨, 아뇨! 전 괜찮습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
“무리라…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그래도 내가 시작한 일이니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잖아?”
“아가씨…….”
루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세인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세인의 낯이 더욱 어두워졌다.
덜컹-
좋은 타이밍에 마차가 멈춰 섰다. 루시아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 돌아갈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
“네,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랄게요.”
세인을 실은 마차가 떠났다. 루시아는 애써지었던 미소를 슬쩍 내려 맞선 장소에 들어섰다.
‘좋은 결과라.’
저 말만 벌써 4번째인데 과연 이번엔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을까?
카페에 들어선 루시아는 상대방이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그동안 보았던 맞선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요한이 고르고 골라서 선별한 후보자들이었을 텐데 어떻게 하나같이 다 별로였을까
성격적인 문제는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 둘은 음흉한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얕잡아 보는 것 같기도 했지.’
다시 되짚어보니 세 명 모두 자신을 얕잡아 봤다.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도 같았다.
대체 왜 그런 걸까?
가문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 일면식이 없던 사이인데 초면에 얕잡아보는 건 상당히 흔치 않다.
‘혹시…….’
돌연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루시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헤르윈을 오랫동안 좋아해서 그런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이 가장 납득이 갔다.
루시아가 헤르윈을 오랜 기간 짝사랑했다는 건 사교계에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의도치 않은 공개 고백 때문에 소문이 퍼지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 고백을 할 정도로 대담하면서,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순애보를 순진하거나 단순하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이런 소문 자체가 결혼 시장에선 치명적으로 작용하니 루시아를 ‘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맞선 상대, 헤리엇 솔레드가 그리했던 것처럼.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못마땅했다.
헤르윈을 좋아했던 10여 년의 시간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다.
루시아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씁쓸해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루시아는 무심한 눈으로 맞은편을 바라봤다. 네 번째 상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꽤나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아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2시. 현재 시각은 2시 6분.
겨우 6분밖에 안 지났지만, 상대방이 늦은 건 처음이었다.
루시아는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또다시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2시 20분이 되어도 상대방은 나타나지 않았다.
느긋하게 앉아있던 루시아가 팔짱을 끼며 시종일관 시계를 쳐다봤다.
“……거절인가.”
친구와의 약속도 아니고 맞선인데 이렇게까지 늦다니 배짱 한번 좋다. 아니면 만나기 싫다고 시위하는 걸지도 모르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 그녀는 분침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좋아, 30분까지만 기다리자.”
30분까지 기다리다가 오지 않는다면 만날 의사가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걸로.
얼른 30분이 되기를 기다리며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귓가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카페를 드나들면서 문에 달린 종소리가 청아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딸랑- 딸랑-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분침은 이미 숫자 6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시아는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시만요!”
그때, 떠나려는 루시아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앞에 있는 이를 쳐다봤다.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남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시아 아그네스 양 맞으시죠?”
숨이 차는지 남자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땀에 살짝 젖은 얼굴과 콧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안경, 그리고 유한 눈매 속에 자리 잡힌 짙은 금안이 보였다.
마차에서 그림으로 미리 익혀둔 네 번째 맞선 상대였다.
10분도 아니고 30분이나 늦어 화가 나려던 것도 잠시,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자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네, 제가 루시아 아그네스입니다.”
“첫 만남에 이렇게나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어느새 숨을 고른 남자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멀끔해진 모습으로 루시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짧은 입맞춤을 했다.
“저는 베른 캐스퍼입니다. 30분이나 늦었는데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각하게 된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루시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루시아가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지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오랫동안 오지 않으셔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사실 오다가 사고가 나서 좀 늦었습니다.”
“사고요?”
“네, 마차끼리 좀 충돌이 있어서 말이 부상을 입는 바람에…….”
생각보다 큰 사고에 루시아가 화들짝 놀랐다.
“이런,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마차를 끌 수가 없어서 좀 늦어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다시 사과해오자 루시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사고가 있었다면 차라리 사람을 보내시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약속을 다시 잡았을 텐데.”
“사람을 보내는 거나 제가 가는 거나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친 곳도 없는걸요.”
정말로 괜찮은 건지 베른이 부드러운 미소로 루시아를 안심시켰다. 유하게 웃는 인상이 참 선해 보였다.
‘아니, 의심을 놓지 마.’
아렌 발테르도 인상은 좋지 않았는가. 이 남자도 지금은 웃고 있지만, 나중에는 다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루시아는 풀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선 지 40분 만에 첫 주문을 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른 맞선 상대와 그리했던 것처럼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호응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루시아는 베른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낮췄다.
친구와 가족 외에 이렇게까지 편한 대화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상대와는 애초에 대화가 편하지 않았다고 해도 세 번째 상대 아렌은 그의 본성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말이 잘 통했었다. 아카데미라는 연결고리가 있어서 서로 대화할 거리가 많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남자와는 같이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아니고,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대화가 잘 통했다.
“이거 제가 1살만 어렸어도 같이 아카데미에 다녔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베른이 헤르윈이나 자신의 소문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까 싶어 루시아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거 아시나요? 아카데미 제2의 도서관에 비밀의 방이 숨겨져 있다는 거.”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루시아는 얼떨떨하던 것도 잠시 그의 말에 답했다.
“아니요, 그런 게 있었다니. 미처 몰랐네요. 어쩌다가 알게 되신 건가요?”
“아…….”
베른은 잠시 멈칫하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그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제가 책을 좋아해서 도서관에 자주 드나들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교수님들에게 들키기 전까지 그곳을 개인 아지트처럼 사용했죠.”
“참 재밌는 추억이었겠어요.”
“네, 그 시절의 일은 잊기 힘들죠.”
잠깐 추억에 잠긴 베른이 옅은 미소를 짓다가 회상에서 빠져나와 루시아를 보고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아그네스 양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네요.”
빈말로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에게서 가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시아도 솔직하게 말했다.
“네, 저도 이런 편안한 대화는 오랜만이에요.”
“저 혼자만의 착각이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입니다.”
그는 남은 차를 음미하며 내려간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내 찻잔을 놓은 그가 입을 달싹였다.
“사실… 아그네스 양께서 제게 실망하시지 않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제가요?”
“네, 첫 만남인데 제가 30분이나 지각하지 않았습니까. 뛰어오면서도 혹시 영애께서 가버리신 것은 아닌지 불안했답니다.”
“없을지도 모르는데 뛰어오셨던 건가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계실지도 모르는 일이죠. 만약 영애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면 꼭 얼굴을 뵙고 사과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게 사람으로서의 도리니까요.”
베른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그의 단정한 성품과 곧은 마음가짐이 훤히 보였다.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기다리기를 잘했네요. 몇 분만 늦었어도 이런 멋진 분을 놓칠 뻔했으니 말이에요.”
“머, 멋지다니요. 치켜세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 후작님만큼 정직한 사람을 찾기 힘든 건 사실인걸요.”
담담하게 내뱉은 칭찬이 부끄러운 건지 그는 귓불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영애.”
그와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세인에게 말해둔 시간이 다가왔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곧 마차가 올 시간이거든요.”
“아, 그러십니까? 마차가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세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4시가 조금 넘어갔다.
“저, 영애.”
그때, 옆에서 베른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루시아는 시계를 집어넣어 그를 바라봤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또 만나주실 수 있으신가요?”
루시아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저를 쳐다보는 베른의 금안이 퍽 진지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긴장했던 베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감사합니다. 제가 저택으로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느 때나 상관없으니 후작님이 편하신 시간대로 일정을 잡아주세요. 물론 이번처럼 늦으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약간의 농담을 섞자 그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맞받아치듯 장난스럽게 기사처럼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1분도 지각하지 않도록 유의하겠습니다.”
“두고 보겠어요.”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린 두 사람 앞으로 마차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세인이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베른은 루시아의 손을 조심스레 쥐어, 그녀가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에스코트했다.
마차에 올라선 루시아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베른을 쳐다봤다.
“후작님, 타고 가실 마차는 있으신가요?”
“타고 온 마차는 말이 회복을 취한 다음에 저택으로 돌아가라고 명해놨습니다. 일단 마차 대여소로 가 봐야지요.”
잠시 고민한 루시아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제 마차를 타고 가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