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후우.”
루시아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잠재우며 서둘러 카페를 벗어났다.
다행히 시몬은 따라오지 않았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분명 요한이 건네준 정보에는 여자가 있다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여자관계가 깨끗하다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의 정보가 잘못됐거나,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은밀하게 만나왔거나 둘 중 하나겠네.’
아니, 애초에 요한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후보자에 넣지도 않고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다.
첫 만남부터 꽝도 아닌 폭탄을 밟게 되자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
루시아는 걸음을 더욱 빨리하여 세인과 약속해둔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예정시간보다 빨리 나왔으니 마차가 오는 것보다 직접 가는 편이 빨랐다.
다행히 보관소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루시아는 화들짝 놀란 세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가씨! 설마 벌써 끝나신 건가요? 아직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엔 꽝이야. 자세한 얘기는 돌아가서 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세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던 루시아는 멈칫했다.
“가는 길에 매운 음식 하나만 사 가자.”
화가 났을 때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그녀가 매운 음식을 찾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맞선 상대가 어떤 행동을 보였길래 저 루시아가 화를 내는 건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바람대로 루시아는 중간에 특제 핫소스가 발라져 있는 닭꼬치를 사 들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사용인들 역시 루시아의 빠른 귀가에 놀란 반응이었다.
루시아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자, 세인은 그녀의 기분 전환을 위해 사 온 음식들과 입가심 디저트를 준비했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닭꼬치를 베어 문 그녀 옆으로 세인이 조심스레 앉았다.
“이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세인은 루시아를 훔쳐봤다. 보기만 해도 매워 보이는 것을 그녀는 잘만 먹었다.
“나보고 계약 결혼을 하자고 하더라고.”
“…계약 결혼 말씀인가요?”
“그래, 내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헤르윈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 생각한 모양이야. 마침 자기도 애인이 따로 있으니 서로 잘해보자고…….”
“무슨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다 있답니까!”
루시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인이 기함을 토하며 씩씩거렸다.
“대체 아가씨를 무슨 사람으로 보고 그런 제안을…! 게다가 여자라니! 난잡한 사람이로군요.”
“여자가 있다고 밝힌 것도 짜증 나는데 나랑 헤르윈을 자신이랑 동급으로 본 게 더 화나.”
애인이 따로 있다고 밝힌 것보다도 자신과 헤르윈을 엮어서 문란한 관계로 만들어버린 점이 화를 더욱 돋우게 만들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으로 빠지는 거야.’
분명 사교계에는 자신이 헤르윈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소문 정도만 퍼진 줄 알았는데 일각에서는 시몬이 말한 것처럼 난잡한 관계라고 소문난 걸까?
‘아니야, 그랬다면 내 귀에 들어왔겠지.’
사교계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맥은 있었다. 만약 그런 소문이 있었다면 어떤 경로로든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몬 혼자 도출한 생각일 가능성이 클 터.
“아가씨, 이대로 있지 마시고 정식으로 항의하세요! 그런 모욕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세인이 말했다.
“항의할 생각은 안 해봤지만, 아버지에게 말은 해야겠지?”
“그럼요! 절대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요한에게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잠시 상상했다.
머지않아 요한이 분노하는 모습을 떠올린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는 웬만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만약 제 예상대로 그가 진심으로 분노한다면 가문 대 가문의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일단, 두고 봐야겠어.”
“아가씨!”
“아직 후보자가 3명이나 더 있는걸. 그중에서 좋은 사람 만나면 되는 일이야. 괜히 일 크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버지한테 얘기하지 마. 이건 명령이야.”
“……네.”
명령이라는 말에 세인은 물러섰다.
루시아는 남은 닭꼬치를 모두 먹으며 생각했다.
‘설마 나머지 사람들 다 이상한 건 아니겠지?’
두 번째 맞선 날짜는 사흘 뒤. 부디 다음 상대는 정상이길 바라며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세인은 조용히 제 존재감을 줄이며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도록 했다.
세인이 눈치 보는 상대는 바로 루시아였다.
그녀가 지금 저기압인 이유는 바로 세 번의 맞선 모두 꽝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맞선 상대였던 시몬 데이하드 바로 다음 맞선 상대는 솔레드 자작가의 헤리엇 솔레드였다.
그는 루시아와 2살 차이로 이른 나이에 자작가를 물려받아, 현재 큰 사업을 진행 중인 인물이었다.
여기까지 별문제는 없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어머니께서 최근에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그런데 자식이라곤 저 하나밖에 없어서 케어를 잘 못해드리고 있지요. 영애께서 제 배우자가 된다면 부디 어머니를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의 손보다는 가까운 사람이 봐주는 것이 더 안심이 돼서요.’
분명 자료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병도 적혀 있긴 했지만, 그 옆에서는 따로 간병인을 두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방에게 이런 과한 부탁을 하지 않나.
‘자식은 몇 명 정도 생각하고 있으십니까? 앞서 말했다 싶어 제가 외동이라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제 자식만큼은 형제자매가 많았으면 하죠. 저는 최소 3명이 좋은데, 영애 생각은 어떠십니까?’
손도 잡아보지 않았으면서 자녀 계획을 묻질 않나.
‘현재 제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있어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피차일반 결혼해야 하는 거라면 약식으로 끝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냥 이번 달에 진행할까요?’
말 한마디 안 했는데 멋대로 결혼을 진행시키질 않나.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루시아는 정중히 그를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진심입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제가 왜 후회를 한단 말이죠?’
‘그야, 영애께서는 저처럼 괜찮은 신랑감을 찾기 힘드시잖아요.’
비아냥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심기를 자극했다.
‘아무리 제가 사교계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영애의 소문쯤은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남자를 10여 년 동안 좋아해 온 여자를 대체 어떤 남자가 반긴답니까?’
‘그건 자작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그런가요? 그래도 잘 생각해보십시오. 저처럼 영애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일 남자는 흔치 않습니다.’
시몬처럼 막장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성가신 사람이었다.
사람 속을 있는 대로 긁었으면서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유형. 그런 유형의 사람은 딱 질색이다.
두 번째 맞선 이후 루시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요한이 건네준 자료는 세세하긴 했지만, 그 안에는 상대방의 성향이 전혀 적혀 있지 않으니 변수가 너무 많았다.
결국 세 번째 맞선 때는 마음을 비우고 보러 갔다.
세 번째 상대는 발테르 백작가의 아렌 발테르. 유일하게 연하인 남자였다.
기대를 접고 아렌을 만났을 때 루시아는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 후배였군요. 몰랐습니다.’
‘하하, 그러세요? 저는 오며 가며 영애를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이거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는 거였는데 아쉽군요.’
아무래도 나이 차가 1살밖에 나지 않기도 하고, 대부분 귀족자제는 황실 아카데미에 입학하니 그가 직속 후배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번 상대는 앞서 두 사람보다 괜찮았다.
‘솔직히 맞선 제의가 들어왔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헤르윈 선배님이랑 영애께서 사귀는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 소문도 있었나요?’
‘소문보다도 추측이죠. 제가 보기에는 두 분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비밀연애라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쉽게도 페네우스 공자와는 그저 친구 사이입니다. 사귄 적은 없어요.’
아렌이 눈을 크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정말, 단 한 번도 말입니까?’
‘네, 단순히 친구 사이에요.’
‘아하… 그렇군요.’
그 이후로도 다른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루시아는 처음으로 이 사람이라면 배우자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를 주고받기로 약속하며 대화는 끝이 났다. 루시아는 가게 앞까지 자신을 에스코트 해주는 아렌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하루 즐거웠습니다, 영애.’
‘네, 저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루시아는 마차를 가져온다는 세인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수건을 발견했다.
바로 아렌의 이니셜이 적힌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주운 루시아는 아렌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마침 그는 저 멀리 귀퉁이를 돌고 있었다.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 루시아는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귀퉁이를 돌자 마차 앞에 있는 아렌을 발견했다. 그는 어떤 남자와 함께였다. 루시아는 그를 부르려 했다.
‘발테르 영……!’
‘아그네스 영애는 어땠어?’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먼저 들려왔다. 그것을 듣고 루시아는 멈칫했다.
‘네 말이 맞더군. 둘이 손도 잡은 적 없대.’
‘하하하! 역시나! 내기는 내가 이겼군.’
‘제길, 이렇게 되면 내 계획이 무산되는데 말이야.’
내기? 계획? 무산?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루시아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좀 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쉽겠네. 그 페네우스 공자의 여자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 말이. 헤르윈 선배님이랑 교제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김이 확 식어버렸어. 적어도 한 번쯤 사귀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난 네가 왜 둘이 사귀었을 거라 생각한 건지 모르겠어. 그보다 왜 그렇게 페네우스 공자를 집착하는 거야?’
에렌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루시아 앞에선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얼굴이었던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잘나서 한 번쯤 꺾어보고 싶은 상대랄까?’
‘뭐야, 그게.’
‘있어 그런 게. 아그네스 영애랑 약혼해서 우월감을 맛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 됐네.’
‘그럼, 이대로 끝낼 거야?’
에렌은 잠시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씩 웃었다.
‘생각 좀 해 보고. 아그네스라면 가문도 나쁘지 않고, 영애도 꽤나 미인이야. 배우자로 둬도 나쁠 건 없겠지. 그리고 벌써 내게 반은 넘어왔어. 맞장구 몇 번 쳐줬더니 쉽게 넘어와서 좀 실망했어. 여자라면 튕기는 맛이 있어야지.’
에렌의 진심을 알게 된 루시아는 입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분노에 차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생물을 보는 것 같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루시아는 걸음을 옮겨 제멋대로 지껄이는 에렌에게 다가갔다. 저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변하는 것은 꽤나 볼만했다.
‘참, 재밌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아, 아그네스 영애?’
‘웃는 얼굴 뒤로 이런 내면을 감추고 있었다니.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습니다, 영식.’
아렌은 루시아가 모든 것을 들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루시아는 그에게 주려고 챙겼던 손수건을 그의 발치에 떨어트렸다.
‘더 이상의 만남은 소용없을 것 같군요.’
루시아가 떠나려 하자 아렌이 뒤늦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세 치 혀를 놀렸다.
‘여, 영애.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오해입니다. 가끔 남자들은 서로 이런 농담을 하기도…….’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영식을 더 이상 만나고픈 생각이 없으니까요.’
단호히 그의 팔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루시아가 뒤를 돌아봤다.
‘감히 헤르윈을 뛰어넘고 싶어 하다니 오만한 건지 제 분수를 모르는 건지.’
창백하던 아렌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루시아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헤르윈의 발끝만큼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은데 괜한 기대감은 접어두렴, 아가야.’
‘지, 지금 뭐라고……!’
길길이 날뛰는 아렌을 뒤로하고 루시아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세 번의 맞선 다 대실패였다.
그리고 지금, 루시아는 마지막 맞선 상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동안 만나온 남자들 모두 마음에 들기는커녕 하나같이 최악이었다. 이쯤 되니 루시아의 심기는 불편하다 못해 인내심이 끊기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