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29)

<38화>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요즘 제일 잘나가는 연극인가 봐. 보고 나니 왜 인기가 많은 건지 알겠더라.”

“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흔한 러브스토리라 흥미 없을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에 웃긴 요소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어.”

헤르윈이 좋은 취미를 하나 찾은 것 같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연극이 끝나니 이미 밤이었다. 바깥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루시아는 달빛에 반사되어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헤르윈의 뒤통수를 멀거니 쳐다봤다.

“우리 이제 저녁 먹으러…….”

“헤르윈.”

루시아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헤르윈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루시아가 뒤처진 걸 발견하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 따라오고 뭐 해?”

루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헤르윈의 얼굴을 응시했다. 달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조용히 자신의 핸드백에서 하루 종일 들고 다닌 작은 선물상자를 꺼냈다.

“이거.”

“……이게 뭔데?”

“좋아해, 헤르윈.”

선물을 받으려던 헤르윈의 손이 멈췄다.

고백한 지 일주일 언저리밖에 되지 않아 다음 고백은 적어도 2달은 지나고 나서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헤르윈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쳐다봤다.

어둠에 가려진 옅은 벽안이 부드럽게 휘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쩐지 평소의 고백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부디 나와 만나줄래?”

불과 1분 전만 해도 장난기 가득했던 헤르윈은 루시아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미안.”

“……이유를 물어도 될까?”

헤르윈은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겨우겨우 말을 내뱉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아리스타를 좋아한다고.”

“……….”

며칠 전에 고백을 거절했을 때 그렇게 말했었다. 루시아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애써 웃으면서 되물었다.

“만약 네가 아리스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를 받아줬을까?”

“그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세리안. 나는 너를 이성으로 본 적 없어…….’

어째서 지금 연극에서 들었던 대사가 떠오르는 걸까.

헤르윈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답을 얼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서글퍼졌다.

자신은 절대 그에게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루시아는 결국 시선을 내리며 눈물을 흘렸다.

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조용히 우는 모습이 그 어떠한 때보다 구슬펐다.

주변이 워낙 어두운 데다 루시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헤르윈은 그녀가 울고 있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평소에 고백을 거절했을 때와 달리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아 불편했다.

“하아, 설마 오늘 하루를 내달라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야?”

분위기를 풀기 위해 능청스럽게 물어도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루시아도 활짝 웃으며 경직된 상황을 풀려고 할 텐데.

의아하게 느끼던 찰나, 루시아가 들고 있던 선물상자를 그의 품에 억지로 넘겼다.

“아무래도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

먹먹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헤르윈은 루시아가 울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먼저 갈게.”

“잠깐, 루시아……!”

탁-!

헤르윈이 붙잡자 루시아는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녀에게 거절당하는 건 처음이라 헤르윈은 적잖아 충격이었다.

“미안.”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루시아는 결국 일그러진 얼굴로 헤르윈을 돌아봤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벽안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멀어지는 루시아를 멍하니 보던 헤르윈은 여기서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헤르윈은 다시 한 번 루시아를 붙잡았다.

“시간이 늦었어. 집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아.”

“그러지 말고 내 말 들어. 이런 어두운 밤에 어떻게 혼자 가겠…….”

“헤르윈!”

루시아가 크게 소리 지르며 헤르윈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마.”

깊은 절망에 빠진 눈을 보고 헤르윈은 더 이상 루시아를 붙잡을 수 없었다. 팔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자, 루시아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북부에 가기 전에 이런 일 만들어서 미안해. …나중에 우리 웃는 얼굴로 만나자.”

루시아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헤르윈은 루시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루시아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울고 있는 모습이 비쳐 보였다.

“이곳에 계셨군요, 도련님.”

얼마 있지 않아, 페네우스 가문의 문양을 단 마차가 헤르윈 옆에 멈춰 섰다.

제시간에 약속 장소까지 오지 않자 마부가 헤르윈을 찾아온 것이다.

“아그네스 영애께선 먼저 가셨나요?”

루시아의 이름을 듣고 헤르윈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마부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헤르윈이 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헤르윈은 멍하니 냉기만 가득한 마차 내부를 훑었다.

분명 연극을 볼 때만 해도 즐거웠는데… 지금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처럼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에 실어 두었던 짐이 흔들렸다. 흐트러진 쇼핑백 중, 하나를 발견한 헤르윈이 탄식을 흘렸다.

“……결국 못 줬네.”

루시아에게 주려고 산 아쿠아마린 귀걸이.

그녀가 자신에게 선물을 사 준 것에 대한 답례로 주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선물할 방도가 없다.

“나중엔 줘도 괜찮을까.”

모르겠다. 그저 사이좋게 지내고 싶을 뿐인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녀는 자신을 이성으로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헤르윈은 문득 마지막에 루시아가 준 선물을 떠올리며 제 손에 구겨진 선물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페네우스 가문의 문양과 자신의 이니셜이 수 놓인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손수건에서 저를 뿌리치고 울던 루시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마음이 먹먹해지며 어쩐지 숨쉬기 힘들었다.

단정하게 채웠던 단추를 풀어헤치며 헤르윈은 답답한 숨을 내뱉었다.

‘나중에, 우리 웃는 얼굴로 만나자.’

마지막에 루시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웃는 얼굴로 만날 수 있는 거지? 루시아?”

그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 마차 내부에 흩어졌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싫어 헤르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꽉 쥐어진 왼손과 달리, 그의 오른손에는 루시아가 준 손수건이 구김 하나 없이 올려져 있었다.

* * *

헤르윈과 헤어진 루시아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두운 거리를 거닐었다.

마음에 큰 구멍이 난 것만 같다.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깊게 난 상처에서는 메꿀 수 없는 감정들이 솟아났다.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과 허탈함이 폭풍처럼 몰아쳐,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루시아는 힘겹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난 큰 구멍을 메꾸려 두 손을 얹어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답답했다. 분명 구멍이 났는데도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보아도 도저히 이 구멍이 메꿔지지 않았다.

“……아, 으아…….”

답답한 나머지 체한 것 같은 속. 울고 싶어도 울부짖지 못하는 목소리. 그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 없다.

“……씨!”

“끄윽, 흐으…….”

“아가씨!”

멀리서 들려오던 익숙한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시야를 가린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자 눈앞엔 한 쌍의 구두가 보였다.

“아가씨, 왜 여기서 이러고 계셔요.”

“……세인.”

세인은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루시아를 발견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주저앉은 루시아를 일으켜 세웠다.

“……혹시 잘 안되셨나요?”

대답 대신 루시아는 하염없이 울뿐이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잡으며 우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하여 덩달아 세인의 마음도 괴로워졌다.

“묻지 않을게요, 아가씨. 울지 마시고 일단 마차에 타요.”

세인의 부축에 루시아는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저택에 있어야 할 세인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루시아가 고백에 실패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갈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고백에 성공했을 경우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을 테니 돌아가라고 미리 언질해 놨다.

세인은 루시아가 말한 8시보다 20분 먼저 나와 마차를 대기시켜놓았다.

부디 루시아가 나타나지 않기를 빌고 또 빌면서.

정해둔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혹시 모르는 마음에 지금까지 기다렸던 건데 안타깝게도 루시아가 나타났다.

마차에 오르고,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세인은 묵묵히 루시아 곁을 지키며 그녀가 울 수 있게 어깨를 빌려줬다.

루시아는 힘없이 그녀에게 기대, 탈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밝은 모습으로 나갔던 루시아가 영혼 없는 인형처럼 나타나자 저택의 모든 사람이 침음을 흘렸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요한과 줄리안이 헐레벌떡 나타나 루시아를 살폈다.

“루시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제발 말이라도 해보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이 울고만 있으니 두 사람의 마음이 찢어졌다.

루시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끝났어요.”

“……어?”

“헤르윈에게 거절당했어요. 그러니 이제…모든 게 끝났어요.”

끝났다고 말하는 게 왜 자신의 인생 또한 끝났다고 말하는 것 같을까?

이러다가 루시아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은 듯한 루시아의 모습에, 요한의 벽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요한이 루시아에게 손을 뻗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맞선을 볼게요.”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멈췄다.

“군말 없이 따를 테니까. 오늘은 저 좀 내버려 두세요.”

루시아는 요한과 줄리안을 스쳐 지나가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갔다.

위태롭기 그지없었지만, 세인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루시아가 사라지고 줄리안이 울음을 터트리며 요한을 붙잡았다.

“여보,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이게 정말 루시아를 위하는 일이냐고요!”

“……제기랄.”

요한은 줄리안에게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입에 거친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 모든 사람이 당황했다.

요한은 우는 줄리안을 감싸 안으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 상황이 고통스럽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오늘 밤엔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았다.

* * *

넋이 나간 루시아가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환복을 도와주던 세인은 제 손등 위로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을 발견하곤 고개를 들었다.

“세인…….”

“네, 아가씨.”

“원래 사랑이란 게 이렇게 힘든 걸까?”

말랐다고 생각한 그녀의 눈물샘이 다시 차오르자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아 옆에 앉았다.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았어. 그저 헤르윈의 사랑 하나만 원한 것뿐인데…. 아니, 그것이 내게 과분한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루시아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세인은 조용히 루시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성장통이라고 생각하세요, 아가씨.”

“……….”

“누구나 성장을 하면서 고통을 겪습니다. 그것은 비단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랍니다. 분명 지금의 성장통을 무사히 극복하신다면 아가씨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는 차라리 안 겪는 게 나아.”

턱 끝까지 차오른 고통에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 이것이 성장통이라면 차라리 겪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세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고통스러우신 건 아가씨께서 페네우스 공자님께 진심이었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아가씨, 그래도 그동안 공자님을 좋아하셨던 것에는 후회가 없으시죠?”

침묵하던 루시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좋아하고, 제 마음을 어김없이 표현한 것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그럼 됐어요. 후회 없이 모든 것을 쏟아내셨으니 이번 성장통만 지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뻔한 말이겠지만,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루시아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눈을 감으면 자신을 거절하던 헤르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 다시 괴로워졌다.

언젠가 그를 떠올리고도 괴롭지 않을 날이 올까?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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