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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37/129)
  • <37화>

     즐거우면서도 긴장감 가득한 식사를 마친 헤르윈과 루시아는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물론 루시아만의 데이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내게 된 두 사람은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구경하거나,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쇼핑을 즐겼다.

    “헤르윈, 이것 봐. 이것도 너랑 잘 어울리겠다. 이거 하나 살까?”

    헤르윈과 잘 어울리는 브로치를 발견한 루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헤르윈이 의아한 투로 대답했다.

    “어째 계속 내 물건만 사는 것 같다? 만년필이랑 넥타이도 사줬잖아.”

    헤르윈이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흔들자 루시아는 아차 싶었다.

    오랜만에 헤르윈과 함께하니 그만 저도 모르게 들뜨고 말았다. 잠시 당황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마차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곤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오늘 하루 내게 주기로 했잖아. 내가 뭘 해도 상관 안하기로 했을 텐데?”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정확히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루시아는 무작정 밀어붙였다.

    “그래! 어차피 네가 사는 것도 아니니까 부담스럽지도 않으면서. 여기요.”

    헤르윈이 다른 소리를 하기 전에 루시아는 서둘러 점원을 불렀다.

    “이거 주세요.”

    “네, 결제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헤르윈은 점원과 함께 멀어지는 루시아를 미처 잡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 물건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사는 건데 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

    헤르윈은 도통 루시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사준 것들이 전부 유용하게 쓸 것들이라 딱히 불만인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 부담스러운 것뿐.

    저 멀리 카운터에서 브로치를 포장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헤르윈은 우연히 옆에 있는 장식장을 발견했다.

    걸음을 멈춘 헤르윈은 결국 고개를 돌려, 장식장 안에 놓인 물건을 구경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헤르윈은 머뭇거리다가 영롱한 아쿠아마린이 박힌 한 쌍의 귀걸이를 가리켰다.

    “이것 좀 자세히 볼 수 있을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원이 귀걸이를 직접 보여주자 헤르윈은 잠시 그것을 들어, 저 멀리 있는 루시아에게 비춰 보았다.

    티 하나 없는, 맑은 하늘을 품은 듯한 아쿠아마린이 멀리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헤르윈이 씩 웃었다.

    “포장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그렇군요. 저쪽에서 계산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헤르윈을 담당한 점원이 다른 곳에서 새 아쿠아마린 귀걸이를 들고 와, 루시아를 담당한 점원 옆에서 포장하기 시작했다.

    모든 계산을 끝낸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헤르윈과 건너편에 있는 점원을 번갈아 봤다.

    “너도 뭐 샀어?”

    헤르윈은 루시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으며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눈망울이 깜빡이자 헤르윈은 괜히 심술이 솟았다.

    “뭐 샀는데? 누구 선물하려고?”

    “비밀.”

    “뭐? 그런 게 어딨어.”

    루시아가 알려달라고 칭얼거려도 헤르윈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귀걸이값을 치렀다.

    “뭘 샀냐니까?”

    “비밀이다. 너도 내 동의 없이 마음대로 물건을 샀으니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헤르윈이 혀까지 내밀며 약을 올리자 루시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순간 속에서 감정이 욱하고 올라왔다. 루시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네가 오늘 내 마음대로 하라며. 내가 뭐 이상한 물건을 산 것도 아니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헤르윈은 루시아가 또다시 캐묻기 전에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헤르윈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치사해. 아무것도 아니면 알려줘도 되잖아.”

    헤르윈은 루시아를 보며 그녀의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가 제가 산 것으로 바뀌는 상상을 했다.

    그것이 저를 바라보는 눈과 꽤나 잘 어울려 헤르윈은 피식 웃었다.

    “왜 대답 안 해?”

    헤르윈이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결국 보다 못한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헤르윈은 자신이 그녀를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나중에 알려줄게.”

    “……됐어. 하나도 안 궁금해.”

    결국 빈정 상한 루시아가 콧방귀를 뀌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바짝 따라잡은 헤르윈이 장난이라며 토라진 루시아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잔뜩 심통 나 있었다.

    ‘분명 여자 장신구였는데.’

    안에 든 물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리본의 색으로 선물을 구분하는 가게 특성상 그건 분명 여성용이 분명했다.

    ‘대체 누굴 주려고 그러는 거지?’

    북부에 계신 공작부인? 아니면, 다른 여자? 혹시… 아리스타?

    아리스타에게 수줍게 선물상자를 건네는 헤르윈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들떴던 기분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걸음을 멈춘 루시아를 따라 헤르윈도 멈춰 서서 그녀를 살폈다. 방금 전에 비해 그녀의 낯이 확연히 어두워졌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윈이 당황했다.

    “……혹시 화났어?”

    헤르윈의 말에 루시아는 아무런 말도 대꾸하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루시아 아그네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이지 않은가. 그런데 멋대로 상상하고, 저 혼자 토라져서는 중요한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거야?

    ‘누구에게 주는 선물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루시아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웠다. 그제야 안절부절못하는 헤르윈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그가 손수 무릎까지 굽혀서 저를 살피는 모습이 가라앉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 끌어올렸다.

    “사실 누구 주려고 산 거냐면…….”

    헤르윈이 서둘러 선물 주인을 밝히려 하자 루시아는 그 입을 막았다.

    “안 알려줘도 돼.”

    “어? 하지만…….”

    “네 말대로 정말 아무 일도 아닌데 내가 괜히 감정적으로 나간 것 같아. 미안해.”

    루시아가 작은 사과와 함께 어색하게 웃었다.

    헤르윈은 맑아진 벽안으로부터 그녀의 풀어진 마음을 알아채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우리 서두르자.”

    “응? 왜?”

    “연극을 예매해뒀거든. 좀 있으면 시작될 거야.”

    예상외의 말에 당황이라도 한 건지 헤르윈이 벙쪄있자, 루시아는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 얼른.”

    루시아가 이끌고 나서야 헤르윈은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루시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제 오른손에 들린 쇼핑백 중 하나를 살폈다.

    ‘나중에 말하자.’

    사실,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헤르윈은 오늘 중으로 꼭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루시아와 함께 번화가에서 제일 큰 극장으로 향했다.

    * * *

    하늘이 뉘엿뉘엿 저물고 주황빛 노을로 물들 때쯤, 두 사람은 무사히 극장으로 들어갔다.

    사실은 분리된 공간인 박스석으로 예매하려고 했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너무 과한 것 같아 일반 좌석으로 예매했다.

    그래도 앞좌석으로 예매하여 배우들의 얼굴과 무대가 훤히 잘 보였다.

    “연극은 처음이야.”

    “어? 정말?”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헤르윈을 돌아봤다. 그는 연극의 팸플릿을 보고 있었다.

    “보통 이런 곳은 가족이나 연인끼리 오잖아. 부모님은 북부에 계시고, 헨리는 아카데미에 있으니 올 일이 없지. 그리고 애들이랑 여기에 와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생각해보니 그렇네.”

    친구들끼리 모여 이것저것 많은 것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연극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게 의외였다.

    “궁금하네. ‘사랑의 이면’이라.”

    헤르윈이 연극 제목을 읊조렸다.

    ‘사랑의 이면’은 세 남녀의 얽히고 얽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곧이어 주변이 어두워지고,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연극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중간중간에 배우들이 애드립과 함께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아는 사람들을 따라 웃다가 옆을 훔쳐봤다. 헤르윈도 재밌는지 작게 웃고 있었다.

    이번 연극은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아, 신이시여. 어찌 제게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녀가 제 친구를 사랑한다니요.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남자주인공인 배우가 처절한 눈물 연기와 함께 신에 대한 원망을 쏟아부었다.

    바로 오랜 기간 짝사랑해온 여자가 제 절친한 친구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을 쳤다.

    괴로워하는 그와 달리, 무대 한편에서는 여자주인공이 또 다른 남자주인공과 행복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대조되어, 짝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심정이 더욱 처절하게 보였다.

    “왜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야! 내가 훨씬 네 곁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미안해, 세리안.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이성으로 본 적 없어…….”

    연극이 점점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갈수록, 배우들의 감정도 고조되었다.

    결국 여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르자 두 남자의 희비가 갈렸다.

    관객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해피엔딩으로 향하는 두 남녀를 쳐다봤지만, 오직 루시아만은 어둠 속으로 쓸쓸히 퇴장하는 또 다른 남자주인공을 쳐다봤다.

    ‘같은 사랑을 하는 것뿐인데 왜 다른 결말을 맞는 걸까.’

    두 남자의 희비가 갈리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여자주인공의 선택이다.

    루시아는 문득 코끝이 찡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모두들 행복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을 보며 웃고 있음에도 루시아만은 웃을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선택을 받지 못한 남자 주인공에게서 제 모습이 겹쳐 보였던 걸까.

    루시아는 다른 사람이 볼까 싶어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다행히 헤르윈은 연극에 빠져 눈치 못 챈 모양이었다.

    헤르윈이 좋아하는 걸 보면 분명 성공적인 데이트일 텐데 마음은 영 편하지 않았다.

    루시아는 결국 연극이 끝날 때까지 집중하지 못했다. 아니, 행복한 결말을 맞은 배우들이 헤르윈과 아리스타처럼 보여 집중할 수 없었다.

    짝짝짝짝-!

    주변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리곤 주위를 둘러봤다. 연극이 끝나, 모든 배우가 나와서 차례대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아는 덩달아 박수를 치며 감정을 이입했던 배우를 쳐다봤다. 그는 처절하게 보였던 감정이 연기라는 것을 증명하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치?”

    “응.”

    다른 사람들을 따라 헤르윈과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걸어가던 헤르윈은 가라앉은 루시아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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