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상에! …씨!… 가씨!”
“으음…….”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왠지 모르게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자신을 깨우고 있었다.
“루시아 아가씨!”
“……응?”
겨우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세인.”
“아가씨! 어쩌자고 여기서 주무셨어요! 세상에, 이 많은 걸 다 드시고!”
“윽!”
루시아의 담당 하녀인 세인이 잔소리를 시작하자 골이 울리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머리를 짚자, 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갑자기 밤에 와인을 찾으시더니…….”
툴툴거리는 세인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어제, 아버지에게 맞선을 보라는 말을 듣고 도저히 잠이 안 와 일기장을 보며 와인을 마셨었다.
그러다… 테라스에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제가 못 살아요. 곧 여름이라고 해도 아직 밤에는 쌀쌀해요. 이러다가 감기 걸리시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세인이 당장 목욕물을 준비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루시아는 멍하니 방을 둘러보다가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하아… 청승맞게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일기장을 보면서 과거가 생각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숙취의 여파 때문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루시아는 토할 것 같은 속을 억지로 잠재우며 세인을 따라 욕실에 들어섰다. 세인과 다른 하녀들이 욕조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아가씨, 아직 준비가 다 안 됐는데…….”
“세인, 나 추워.”
“테라스에서 주무시니 그러죠. 일단 얼추 준비가 됐으니 얼른 들어오세요.”
루시아는 하녀들에게 몸을 맡겨,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 온도 덕분에 몸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속은 괜찮으신가요? 여기 꿀물 준비해왔어요.”
“고마워. 세인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얘기는 몸부터 회복하고 해주세요.”
세인은 루시아를 흘겨보며 그녀의 몸을 주물렀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악력에 웅크려 자느라 뭉쳤던 근육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눈까지 감으며 피곤해 보이는 루시아를 보곤 세인이 물었다.
“아가씨, 정말 아무 일도 없으셨어요?”
“일이 있긴 무슨. 가끔 혼자 술 마시고픈 날이 있잖아.”
“그런 날이 있긴 하지만…….”
“마사지는 이제 안 해줘도 돼. 이만 나가 봐. 필요하면 그때 부를게.”
“……네, 필요한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세인이 나가고 미소를 띠던 루시아는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수증기 가득한 욕실 내부를 훑어봤다.
루시아는 잠시 자신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세인을 떠올렸다.
그녀와는 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다.
주종관계에 있지만, 소꿉친구처럼 나란히 자란 사이라 헤르윈과는 다른 의미로 친한 친구였다.
자신이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허울 없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비앙카의 사건 이후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버렸으니까.
가끔 세인이 서운한 기색을 보일 때면 미안하기도 했지만,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튀어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연기하곤 했다.
첨벙-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하자 루시아는 얼굴을 세수하며 복잡한 머리를 환기시켰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헤르윈에게 고백할 기회가 이제 딱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다려주신다곤 했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헤르윈의 마음을 자신과 똑같이 만들 수 있을까?
13년 동안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는데, 겨우 단 한 번의 기회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것도 잠시, 현실을 직시하자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버렸다.
“차라리, 아버지가 강제로라도 만남을 주선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루시아는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 깜짝 놀라며 볼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할 순 없어.”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한 사람은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순 없다.
루시아는 욕조에 머리끝까지 몸을 밀어 넣어,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 * *
“아가씨, 페네우스 공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헤르윈이?”
겨우 숙취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던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아론을 돌아봤다.
“어제 봤는데…무슨 일이지?”
“들어오시라 이를까요?”
“어? 어어! 당연하지. 응접실로 안내해줘. 곧 갈 테니까.”
아론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섰다. 루시아는 서둘러 제 상태를 살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숙취로 얼굴이 해쓱했고, 핏기가 하나도 없어 사람이 아파 보였다.
지금쯤 헤르윈이 응접실에 도착했을 텐데 단장할 시간이 촉박했다.
“어쩌지…….”
“아가씨, 일단 앉아 계세요. 저희가 빠르게 치장해드릴게요.”
루시아가 헤르윈을 좋아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하녀들이 서둘러 그녀를 꾸미기 시작했다. 화장대 거울로 바쁘게 움직이는 손이 보였다.
“간단한 피부화장으로 피곤함을 가리고, 입술에 혈기만 돌게 만들었어요. 이 정도면 괜찮으신가요?”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아, 하녀들의 치장이 끝났다. 확실히 처음의 모습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응, 고마워. 너희들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 정도쯤이야 쉽죠. 자, 얼른 이거 두르고 가세요.”
하녀들 손에는 숄이 들려있었다. 숄을 두른 루시아는 하녀들의 응원을 받으며 헤르윈이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를 만나기 직전은 미친 듯이 가슴이 떨렸다. 특히나 이제 그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날이 며칠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요동쳤다.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내 평소의 미소를 장착하며 문을 열었다.
“헤르윈.”
“왔어?”
헤르윈은 제집마냥 익숙하게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쩐지 어제보다도 한층 더 멋있어진 것 같아 심장이 멋대로 쿵쾅거렸다.
루시아는 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너무 늦었나?”
“아니야. 내가 기별도 없이 왔는걸.”
“그러게. 어쩐 일이야? 우리 헤어진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됐잖아.”
루시아가 방긋 웃으며 맞은편에 앉자, 붉은 눈이 그녀를 훑었다.
“어제 깜빡하고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어서.”
“뭔데?”
“나 잠깐 한 달 정도 북부에 머무르게 됐어.”
루시아의 벽안이 흔들렸다. 그걸 보고 헤르윈은 차를 마셨다.
“어제 애들 다 있는 곳에서 말했어야 했는데 까먹었지 뭐야. 편지로 얘기해도 됐겠지만, 너한테는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차를 홀짝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 루시아의 마음을 흔들었다.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다른 애들과 달리 자신은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문득 아리스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한테는 얘기했어?”
“응, 어제 헤어지기 직전에 말했어. 다른 애들은 먼저 가버려서 못했지만.”
“……그렇구나.”
아리스타보다 특별하다니.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루시아는 괜히 기대했던 마음을 접었다.
“북부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건데?”
“이제 슬슬 가주 자리를 계승해야 하기도 하고, 최근 북부에 몬스터 수가 급증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응, 전에 네가 얘기해줬잖아.”
“그래. 몬스터가 늘어나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어렸을 적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처럼, 몬스터가 떼를 지어 움직이고 있는 흔적을 발견했대.”
몬스터 웨이브라면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은 시절의 일이다. 분명 헤르윈 일가가 아그네스에 1년 넘게 의탁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아버지께서 보내온 서신에 몬스터들의 부락지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 그래서 나도 아버지를 도와 몬스터 섬멸에 참여하려고.”
생각보다 심상찮은 일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헤르윈이 가야 한다는 사실이 루시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이제는 어리광부릴 나이가 아니었다.
루시아는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
“출발 날짜는 정해졌어?”
“일주일 뒤.”
고작 일주일. 그가 떠나기까지 겨우 7일밖에 남지 않았다니. 애써 밝게 지었던 루시아의 미소가 흐트러졌다.
눈을 일그러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루시아를 보고 헤르윈은 멈칫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루시아를 안심시키는 헤르윈의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안에 자리 잡은 그의 다정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볼 안을 깨물며 정신 차렸다.
“소탕 작전에 참여하는 거면 한 달 내에 못 올 수도 있겠네?”
“그건 그렇긴 한데… 꼭 제때 돌아올 거야.”
말은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 일이 늘 그렇듯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헤르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대로 가버리면 그에게 고백할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달이라는 공백이 생길 터. 과연 아버지가 가만히 기다려 주실까?
‘일이 어떻게 이렇게 흘러갈 수 있지?’
요한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일주일이란 제한시간이 덜컥 나타났다.
마치 헤르윈의 대한 마음을 포기하게끔 신이 손이라도 쓴 것만 같았다.
머리가 복잡하여 넋을 놓고 있을 때 문득 헤르윈의 손목으로 시선이 갔다.
그의 손목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물건이 있었다.
“그거 아직도 하고 있었어?”
“응? 아아, 이거 말이지.”
루시아의 중얼거림에 헤르윈이 제 소매를 내려다봤다.
“이제는 이게 없으면 조금 허전해.”
“하지만, 많이 낡았는데…….”
루시아가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커프스 버튼이었다.
16살의 가장 끔찍했던 날, 그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붉은 커프스 버튼.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러, 흠집도 많이 나 처음의 반짝거림이 없는데도 그는 잘 착용하고 다녔다.
“많이 낡긴 했지. 그래도 아직 쓸 만해. 네가 선물해준 거잖아.”
헤르윈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거기서 어릴 적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도 끔찍한 기억이었을 텐데. 저렇게 소중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고맙고도 못내 사랑스러웠다.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너 오늘따라 조금 이상하다? 어디 아프기라도…….”
어제와는 다르게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눈치챈 헤르윈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루시아에게 닿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르윈.”
“어?”
“가기 전에 하루. 딱 하루만 내게 줄 수 있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도 전에 루시아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 굳게 다짐한 듯 푸른 벽안이 강직한 형태를 띠었다.
늘 여리게만 보였던 루시아가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상관은 없는데…. 하루면, 하루 종일?”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윈은 자신의 일정을 되새겼다. 무언가 특별한 일은 없었다.
“좋아, 난 아무 때나 상관없어. 언제가 좋아?”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다음주 금요일 어때?”
“좋아. 그때 만나는 걸로 하자.”
헤르윈이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날 무엇을 할지 생각한 것 있냐고 물어봤다.
그는 이것이 데이트 신청임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북부로 가기 직전, 소꿉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입 안이 씁쓸해졌으나 들뜬 헤르윈의 기분을 망칠 순 없다.
루시아는 헤르윈의 말에 호응하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소꿉친구의 모습을 보였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야.’
루시아 혼자만의 결심이 그 어디에도 퍼지지 못하고 고요히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