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29)

<33화>

“저깟 사람들 시선 따위 신경 안 써.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벌인 일이니까.”

“내가 벌인 일? 아까부터 다짜고짜 사람 붙잡고 이상한 말 하는데. 내가 대체 뭘 했다고 그래?”

“뭐긴 뭐야! 네가 지금 이 상황을 만들었잖아! 내가 똑똑히 봤어. 너랑 지금 여기 주최위원 애들이 정원에서 서성거리는 걸!”

비앙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폭죽 설치하는 대신 수정구를 수풀 사이에 숨긴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겨우 그걸로 지금 이 사단을…….”

“겨우 그거? 그럼 왜 아직도 불꽃놀이가 시작되지 않은 건데? 분명 사람들한테는 한다고 말했잖아. 사실, 불꽃놀이는 거짓말이고 루시아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이 사태를 만든 것 아냐?”

아리스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지르자 그녀가 한 말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잠잠하군요.”

“그러게요. 분명 불꽃놀이를 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루시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거니까요.”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의문스러운 점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론이 조금씩 바뀌려는 걸 본 비앙카가 입술을 짓이겼다.

“하, 루시아가 제멋대로 헤르윈한테 고백한 걸 왜 나한테 따져? 내가 언제 루시아한테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고백하라고 했어? 왜 애먼 사람을 잡는데!”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공개 고백이 아니지.”

아리스타가 버럭 화내는 것도 잠시 누군가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헤르윈이 어느새 홀로 들어선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줬다.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진 못했다.

헤르윈의 팔 주변으로 붉은 오라가 옅게나마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헤르윈! 들어봐! 비앙카가 지금 너랑 루시아를 골탕 먹이려고……!”

“헤르윈! 지금 저 여자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아리스타의 손아귀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비앙카가 그녀를 뿌리쳤다. 비앙카는 서둘러 헤르윈에게 다가갔다.

헤르윈은 서늘한 눈빛으로 비앙카를 내려다봤다.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에 비앙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너랑 루시아를 곤란하게 만들다니. 말이 안 되잖아. 나는 너희들의 친구인데. 그치?”

“……….”

“그래도 헤르윈, 좀 곤란하겠어. 설마 루시아가 너를 좋아했을 줄이야.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다니. 나도 깜짝 놀랐어. 루시아도 참 그렇지? 고백할 거면 사람들 없는 곳에서…….”

“말이 많네, 바앙카 로렌스.”

“……어?”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비앙카가 당황하며 입을 벌린 모습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태까지 그 긴 혀로 루시아를 농락해왔던 건가?”

“농락이라니…….”

비앙카가 떨리는 눈으로 주춤 물러섰다.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느닷없이 내 생일파티를 이 저택에서 하자고 제안한 것도 너였고, 내가 정원으로 가게끔 유도한 것도 너였잖아.”

“제안이라니! 나는 애들이 이미 저택을 잡아놨길래 그냥 말을 전달한 거야! 그리고, 네가 분명 사람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지만, 사람 없는 곳이라면 굳이 저 정원이 아니어도 여러 군데 있었을 텐데? 게다가 마치 짜고 치기라도 한 것처럼 루시아가 날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더군.”

“루시아도 너처럼 사람들을 피해서 간 거겠지!”

다급한 비앙카의 말에 헤르윈이 실소를 터트렸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우기는 애인데, 출입금지 팻말이 적힌 장소에 루시아가 함부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

헤르윈의 말대로 루시아는 출입금지 팻말이 적힌 곳에 들어갈 성정이 아니었다. 답답할 정도로 규율을 엄격히 지키는 애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비앙카가 예상치 못한 허를 찔릴 때, 헤르윈이 왼손에 쥐고 있던 걸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거.”

[그리고, 이거.]

“가제보 옆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더군.”

[가제보 옆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더군.]

헤르윈의 목소리가 루시아가 고백했을 때처럼 홀에 웅웅 울렸다.

그의 목소리가 저 수정구를 통해 홀로 전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아리스타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네가 이 모든 사태를 꾸민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헤르윈은 왼손을 부들부들 떨며 수정구를 꽉 쥐었다.

파악-!

수정구에 금이 가더니 헤르윈의 악력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의 왼손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오라와 사방으로 튄 수정구 파편에, 사람들은 하나둘 뒤로 물러섰다.

“내가 이번 일을 그냥 넘길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목을 죄어오는 살기에 비앙카의 낯이 창백해졌다.

헤르윈은 살기 가득한 눈빛을 그대로 주위에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건 비단 비앙카만의 일이 아니야. 나랑 루시아를 조롱했던 놈들 모두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일이 터진 직후, 제멋대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각오해.”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홀 전체를 감쌌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헤르윈이 주변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 크리스틴.”

“으, 응?”

“가서 루시아 좀 살펴줘.”

헤르윈의 차가웠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지금쯤 울고 있을 테니까.”

아리스타는 멍하니 헤르윈을 보다가 그의 왼손에서 피어오른 붉은 오라 사이로 피가 뚝뚝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왼손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게 부탁하는 그의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응, 나만 맡겨.”

“아, 알겠습니다!”

아리스타가 굳은 얼굴로 헤르윈을 스쳐 지나갔다. 크리스틴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얼어붙은 비앙카를 흘겨보다가, 결국 아리스타의 뒤를 쫓았다.

* * *

“흑, 흐윽, 루시아 이 바보 멍청이……!”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지저분한 창고로 도망친 루시아가 숨죽이며 울었다.

공들여 치장했던 화장은 눈물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다.

루시아는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저와 눈이 마주친 한 사람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일임을 깨달았다.

바로 비앙카. 그녀는 분명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저를 응원해준다는 그녀의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은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비앙카가 제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과, 그녀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헤르윈이 자신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당장 다시 돌아가서 자신이 벌인 일을 제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루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퍽퍽 때렸다.

“움직여! 제발 움직이란 말이야! 왜 너까지 내 말을 안 듣는 건데!”

아무도 듣지 못하는 절규가 작게 울려 퍼졌다. 눈앞이 다시 뿌예지자 루시아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루시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뿌연 시야 사이로 두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루시아, 괜찮아요?”

“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어?”

“크리스틴, 아리스타…….”

늘 환한 웃음으로 보는 사람들마저 행복을 느끼게 하던 루시아가,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깊은 절망이 내려앉은 것을 발견한 두 사람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크리스틴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없이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리스타는 루시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눈물로 얼룩진 하얀 볼을 쓸었다.

“괜찮아, 루시아. 우리가 옆에 있잖아.”

루시아는 숨이 턱 막혔다. 아리스타를 보자 비앙카의 꾀에 넘어가 그녀를 폄하하고,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던 제 행동이 불현듯 떠올랐다.

“미안해…….”

루시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정말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

크리스틴과 아리스타는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네가 미안할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

“루시아 울지 말아요…….”

“미안… 흐윽, 흐으으……!”

사과를 반복하던 루시아는 울음을 터트리며 아리스타 목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큰 폭죽 소리와 함께 하늘이 아름다운 불꽃들로 번쩍였다.

자신은 과연 무엇 때문에 우는 것일까?

많은 사람에게 제 마음을 조롱당해서? 비앙카에게 느끼는 배신감 때문에? 아리스타에 대한 죄책감? 그것도 아니라면 저로 인해 곤란해진 헤르윈에 대한 미안함?

무엇 때문에 우는 것인지 루시아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 * *

모두가 기대하고 들뜬 마음으로 참석했던 헤르윈의 생일파티는 좋지 않은 결말로 막을 내렸다.

헤르윈의 서늘한 협박으로 루시아에게 향한 조롱은 쏙 들어갔지만, 그날 있었던 일이 전교생에게 퍼져 나가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비앙카와 파티 주최위원 측에서 꾸민 음모라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사람들은 루시아가 헤르윈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루시아만 보면 사람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렸고, 그녀가 헤르윈과 있을 때면 웅성거림이 한층 더 커졌다.

그런데 헤르윈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파티 이후에 돌아온 월요일 날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며, 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보였다.

그건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루시아를 배려해주는 것인지 그날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척하며 평상시처럼 행동할 뿐.

그들의 배려가 감사하면서도 루시아는 불안했다.

과연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있어도 되는지 자꾸만 의심이 들었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던 도중 루시아는 우연히 다른 반 학생들과 헤르윈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아그네스 영애가 8살 때부터 너를 좋아해 왔다는 게 사실이야?”

“듣자 하니 고백도 꽤 여러 번 했다는 거 같던데?”

“솔직히 그렇게 오래 좋아한 거면 지금쯤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

“맞아, 아그네스 영애라면 여자친구로 괜찮지. 헤르윈 너도 잘 생각해봐.”

그들은 생일파티 때 있었던 일을 주제로 입을 놀렸다. 분위기가 점점 루시아를 받아줘야 한다는 식으로 흘러가자 인상을 찌푸렸던 헤르윈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내 마음이 아니라 너희들 바람이겠지.”

“아니, 짝사랑 기간이 길잖아. 게다가 고백도 여러 번 했다며.”

“그러니까 너희 말은 루시아가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오고 고백도 여러 번 했으니, 내가 그걸 ‘받아 줘야’한다는 말이잖아. 웃기지 마.”

“뭐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남학생들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내가 너희들 말에 못 이겨서 루시아 고백을 받아주면 그거야말로 기만 아닌가? 마음에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 말에 휘둘려 사귀어 주는 거니까.”

“아니, 그걸 그렇게 말하면…….”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마. 그리고 루시아는 네 녀석들이 멋대로 떠들어도 되는 대상이 아니야.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루시아를 조롱하기만 해봐. 그땐 가만 안 둬.”

루시아는 헤르윈의 그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

그가 여전히 제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우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제대로 봐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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