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29)

<29화>

“허, 이렇게 큰 저택을 빌렸다고?”

“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네요…….”

“그치? 내가 이래서 어떻게든 헤르윈을 설득하려고 한 거야.”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직전 루시아와 친구들은 비앙카의 안내에 따라 미리 예약해 놨다던 저택을 구경하러 갔다.

각자 본가에 비하면 그리 크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 테르반 거리에 있는 저택 중에는 나름 큰 편에 속했다.

“괜찮으면 잠깐 들어가서 구경할래?”

“네? 그래도 되나요?”

“응, 허락받아놨어. 가끔 몇몇 사람들도 구경하러 오니까 괜찮아.”

비앙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저 멀리 보였다. 저택 상태가 전반적으로 양호했다.

“이 정도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겠어요.”

“그러게, 홀도 널찍하니 좋네.”

크리스틴과 아리스타가 저택 내부를 구경하자 루시아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비앙카가 루시아에게 슬쩍 다가갔다.

“헤르윈 선물은 샀어?”

“응, 당연히 샀지.”

“그래? 뭘 샀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들을까 싶어 비앙카가 목소리를 낮추자 루시아가 설풋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건 비밀!”

“뭐야, 나한테는 알려줄 수 있잖아.”

“하하, 나중에 확인해봐. 헤르윈에게 딱 어울리는 물건을 샀거든.”

“흐응,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한데?”

비앙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봤다. 잠시 말없이 눈을 맞추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헤르윈은 싫다고 했지만, 분명 최고의 생일이 될 거야. 많은 사람들이 헤르윈을 축하해주려고 하잖아.”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응시하던 비앙카가 씩 웃었다.

“네 말대로 근사한 하루일 텐데 헤르윈에게 고백할 생각은 없어?”

루시아가 몸을 파드득 떨며 뒤를 홱 돌았다.

루시아는 혹시 크리스틴과 아리스타가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은 다행히도 저 멀리 있었다.

“그걸 크게 말하면 어떡해.”

“두 사람은 멀리 있잖아. 진짜로 고백할 생각 없어? 헤르윈 생일파티라고는 해도 종업 파티를 겸하고 있어서 대부분 근사한 차림으로 올 거야. 그건 너랑 헤르윈도 마찬가지잖아?”

비앙카의 말대로 파티의 초점은 헤르윈의 생일에 맞춰져 있지만, 방학까지 얼마 남지 않아 종업 파티도 겸하고 있었다.

아마 파티를 즐기기 위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근사한 옷을 빼입고 나타날 것이다.

루시아 또한 헤르윈의 생일에 맞춰 연한 하늘빛 드레스를 준비했다.

“그런 좋은 날에 고백하지 않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 기껏 예쁘게 꾸몄는데 그냥 넘어가는 건 아쉽지.”

“그건…….”

“헤르윈 선물도 준비했겠다, 선물을 주면서 고백해. 이번엔 받아줄지도 몰라.”

“하지만, 헤르윈은 아리스타를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거지 아직 사귀는 건 아니야. 이대로 헤르윈을 포기할 셈이야?”

“……….”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비앙카의 말에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여전히 헤르윈에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비앙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루시아의 손을 잡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루시아, 내가 이번 파티를 총괄하거든?”

“총괄자라고? 그냥 애들을 도와주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내가 총괄자니까 너랑 헤르윈만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줄 수도 있어.”

“……어떻게?”

“이리 와 봐.”

비앙카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저택 뒤편에 위치한 정원이었다.

“한창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 내가 헤르윈을 여기로 유인할게. 너는 여기서 대기했다가 헤르윈에게 고백해.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내가 막아둘 테니까.”

“장소가 좋기는 한데… 너무 훤히 트여있는 것 아닌가?”

“파티가 무르익을 때면 날이 저물 테니 안에서 밖은 잘 안 보일 거야.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파티 총괄자라고. 여기에 출입금지라고 적어놓으면 애들이 여기까지 오지 않을 거고, 홀에는 커튼을 쳐놓으면 돼. 어때? 좋은 생각이지 않아?”

솔깃한 제안이긴 했다. 평소에 하던 고백과 달리, 사뭇 꾸민 모습으로 근사한 장소에서 선물까지 주면 분명 기억에 남을 고백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년에 하나뿐인 그의 생일날 고백해도 괜찮은 것인지 걱정됐다.

“곰곰이 잘 생각해봐. 일단은 여기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테니까.”

“응…알겠어.”

“루시아! 비앙카! 여기 있었군요. 저희 이제 슬슬 가요.”

루시아와 비앙카를 발견한 크리스틴이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어느덧 하늘에 뉘엿뉘엿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서둘러 비앙카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헤르윈의 생일까지 단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 * *

“후우…….”

루시아가 긴장 어린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거울 앞에 선 지도 벌써 30분은 된 것 같은데 그녀는 도통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루시아, 뭐해? 지금 안 가면 늦어!”

“어? 어어! 잠깐만!”

방 밖에선 노크 소리와 함께 아리스타가 얼른 가자며 재촉했다.

루시아는 허둥지둥 헤르윈의 선물과 핸드백을 챙겼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 다시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과한 건 아니겠지?”

거울에 비친 루시아는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곱게 땋아 작은 비즈들로 장식했고, 얼굴은 간단한 색조 화장으로 발랄한 분위기가 연출했다. 거기에 더해 여름에 걸맞게 시원하면서도 하늘하늘한 하늘색 드레스도 차려입으니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평소보다 더욱 힘주어 꾸며봤는데 너무 과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었다.

“루시아!”

“응! 나가!”

루시아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방 앞에는 아리스타와 크리스틴이 서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옅은 연둣빛 드레스를 차려입어 마치 숲의 요정처럼 보였고, 아리스타는 어쩐 일인지 드레스가 아닌 기사 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리스타에게 딱 어울리는 모습이라 딱히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루시아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여워.”

“루시아! 너무 예뻐요!”

아리스타가 넋을 놓으며 루시아를 바라봤고 크리스틴은 너무 예쁘다며 칭찬일색이었다.

“너무…과하지는 않아?”

“아니요! 너무 예쁜데요?”

“맞아, 이러다가 남자들이 죄다 너한테 반하겠어.”

크리스틴도 그렇고 아카데미 내 최고 미인이라 불리는 아리스타까지 칭찬해주자 루시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비앙카는?”

“파티 준비하느라 먼저 갔어요.”

“남자애들도 출발했다고 하니 우리만 가면 돼.”

루시아와 두 사람은 서둘러 기숙사를 나왔다.

토요일인 오늘. 평소 같았으면 한가할 아카데미 내에 꽤나 많은 학생이 돌아다녔다.

그들 모두 헤르윈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려는 것인지 남녀 할 거 없이 잔뜩 빼입은 채였다.

학생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런, 왠지 오늘부로 많은 커플이 탄생할 것 같은데?”

“어쩌면 파티에 참석하는 게 그런 목적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루시아는 두 사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의 추측대로 이미 몇몇 여학생과 남학생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남학생과 수줍게 답하는 여학생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낯선 두 사람에게서 루시아는 자신과 헤르윈을 투영했다.

제가 묻는 대답에 환하게 웃어주는 그의 모습이 환상임에도 근사하다 느껴졌다.

“루시아, 안 오고 뭐 해.”

멍하니 있던 루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아리스타와 크리스틴이 저 멀리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리니 저와 헤르윈의 모습이 보였던 자리에는 두 남녀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응! 가!”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생일 축하합니다, 페네우스 공자님.”

“선물을 준비했어요! 부디 받아주세요!”

“생일 축하한다, 헤르윈! 이야, 전에도 인기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거 상상 초월인데? 인기 많아서 좋겠다!”

헤르윈이 피곤한 기색으로 제 앞을 지나가는 많은 이들을 바라봤다.

이들은 모두 아카데미 동기들로, 헤르윈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파티를 즐기기 위해 참석한 이들이었다.

비앙카에게 참석명단을 받았을 때 만만치 않겠다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늦게 왔을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 굳게 다짐한 헤르윈의 옆으로 에단이 다가왔다.

“헤르윈, 네 선물로만 벌써 산 하나를 쌓았어. 나중에 저거 뜯어보는 것도 일이겠는데?”

에단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지금까지 받은 선물로 쌓은 산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뻐할 법한 개수였지만 헤르윈은 인상을 팍 구겼다.

“하아, 기숙사에 가고 싶다.”

“조금만 참아. 적어도 파티 주인공인데 춤 한번 춰야 하지 않겠어?”

“그래, 맞아. 저기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네가 춤추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브라이언이 능글맞게 다가왔다.

“어째 헤르윈보다 네가 더 즐거워 보인다?”

“후후, 아가씨들이 도저히 나를 가만두질 않네. 역시 이 몸의 인기란.”

“으웩, 느끼한 놈.”

에단이 브라이언의 잘난 척에 진저리쳤다. 평소와 같은 대화였지만, 그들 사이에 묘한 들뜸이 엿보였다.

헤르윈은 자신만 이 파티가 싫은 건가 싶어 한숨을 푹 쉬었다.

“왜 한숨을 쉬고 있어? 파티가 마음에 안 들어?”

“……비앙카.”

옅은 향수 냄새와 함께 비앙카가 손님 명단을 손에 쥐고 나타났다. 그녀를 보자마자 브라이언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오늘 힘 좀 썼는데?”

“훗, 어때? 예쁘지?”

비앙카가 브라이언의 말에 맞받아치며 붉은 기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비앙카 역시 상당한 미인인 만큼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매혹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남자들이 비앙카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비앙카, 네가 준 명단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래? 기껏해 봐야 10명밖에 안 늘었을 텐데?”

“뭐야, 더 는 것 맞잖아.”

“에이, 이 정도면 많은 축도 아니지. 그리고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아, 그러면 파티는 대체 언제 끝나?”

“음, 사람들이 얼추 다 모이면 본격적으로 파티를 시작할 거야. 1시간가량 댄스 타임을 가진 후엔 소소한 이벤트를 할 거니까… 끝나려면 적어도 3시간 뒤쯤?”

“안 돼 너무 길어. 당장 줄여.”

“뭐? 당연히 안 되지. 오늘을 위해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데.”

“파티가 3시간 뒤에 끝나면 10시잖아. 외출 가능한 시간이 9시까지인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늦게 들어가면 분명 아카데미에서 제재할걸?”

“그건 걱정마. 12시까지 들어가기로 아카데미랑 미리 이야기 맞춰놨어. 그래서 저기에 교수님들도 몇 분 계시잖아.”

비앙카가 가리킨 곳을 본 에단이 질색했다.

“켁, 진짜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사고라도 칠까 감시하러 오신 것 아니었어? 그런데…….”

브라이언이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참석했을 교수들의 손에는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

“……오랜만의 일탈이라 즐거우신가 보네.”

팡-!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고 떠드는 교수들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헤르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등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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