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29)

<28화>

“일주일 뒤면 헤르윈 생일이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헤르윈, 너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이 형님이 다 사 줄게.”

크리스틴을 시작으로 헤르윈의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요? 교수님께 허락을 받아서 잠깐 반나절정도만 교실을 빌릴까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잖아.”

“맞아. 크리스틴 생일 때도 그렇게 했으니까.”

5월 중순에 생일이었던 크리스틴은 빈 교실을 하나 빌려 친구들의 축하를 받았었다.

친한 친구들만 모인 생일파티였기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지내며 주말에만 잠깐 외출이 가능하기에 아카데미 내에서 큰 파티를 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아, 잠깐 나 제안 하나만 해도 될까?”

가만히 있던 비앙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뭔데?”

“사실, 우리 말고 다른 애들도 헤르윈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고 했거든.”

“다른 애들?”

“응, 뭐… 흔히 헤르윈을 선망하는 애들 말이야.”

“아…….”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헤르윈의 눈치를 슬쩍 봤다, 그의 콧잔등이 찌푸려져 있었다.

“네가 싫어하는 거 아니까 나도 거절하려고 했는데 이미 저택을 빌렸더라고.”

“뭐? 저택?!”

“그래, 그것도 꽤나 큰 저택. 헤르윈 생일이 토요일이니까 외출할 수 있잖아. 그걸 노리고 저택에서 생일파티라도 열 생각인가 봐.”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에 친구들이 모두 입을 쩍 벌리며 얼떨떨해했다.

“우와, 헤르윈이 인기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에단이 감탄하자 헤르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생일파티를 애들이 준비해둔 저택에서…….”

“싫어.”

비앙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헤르윈이 끊어냈다.

“내가 언제 그런 거 해달라고 한 적 있어? 자기들끼리 멋대로 저지른 일인데 내가 갈 이유는 없어.”

“하지만, 모두 너를 생각해서 한 건데… 그리고 너한테 절대 잊지 못할 생일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그래도 싫어. 나는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이야.”

친구들은 조용히 헤르윈과 비앙카를 흘겨봤다.

확실히 비앙카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건 맞았다.

특히나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는 헤르윈의 입장에선 질색할 만한 제안이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비앙카의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미 저택을 빌렸다는 걸 보면 모든 대금을 치렀을 텐데 여기서 거절한다면 그들의 노력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헤르윈은 강경했다. 당사자가 싫다는데 제삼자가 나서서 말릴 수는 없었다.

“뭐, 어때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그때, 아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

“헤르윈, 다시 생각해 봐. 애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네 생일을 챙겨주고 싶어서 그랬다는데 뭐.”

아리스타의 설득에도 헤르윈은 여전히 인상을 피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돈을 다 지불했다잖아. 기껏 열심히 돈 모아서 이것저것 알아봤을 텐데 네가 안가면 어떡해.”

“그러게 누가 당사자 논의도 없이 마음대로 일을 꾸미래? 내가 걔네들 사정까지 봐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사람이 그렇게 야박하면 쓰나. 적어도 걔들은 호의로 시작한 일인데 우리도 성의는 보여줘야지. 안 그래? 루시아?”

가만히 있던 루시아가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보다가 헤르윈과 눈이 마주쳤다.

헤르윈은 루시아만큼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나도 아리스타랑 같은 생각이야.”

“……허?”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사람이 좀 많은 것뿐이지 모두 너를 축하하려고 모인 거니까…….”

“루시아, 내가 그런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도 잘 알잖아.”

“알지. 하지만, 이번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어. 그리고 애들이 이렇게 준비한 걸 보면 분명 다음에도 똑같은 일을 벌일걸?”

루시아의 말이 타당하다 느낀 헤르윈이 흠칫 떨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번만 참석하고, 다음부터는 하지 말라고 따끔히 말하는 게 어떨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아.”

“역시, 루시아! 나랑 통할 줄 알았다니까?”

아리스타가 눈을 반짝이며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부담스러우면 생일파티가 아니라 종업 파티라고 생각해. 기간도 딱 여름방학 시작하기 직전이니까. 비앙카, 이걸 주최한 애들이 총 몇 명 정도야?”

“꽤 많아. 한 10명? 참석하는 애들은 70명이 훌쩍 넘을 거야. 어쩌면 1학년 대부분이 모일 수도 있고.”

“……허, 팬클럽이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수가 많군.”

“이 정도면 학년 대다수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것 같군요.”

친구들의 속삭임에 헤르윈의 이마에 핏줄이 우뚝 섰다.

“헤르윈, 응? 한 번만 참자.”

“그래, 오랜만에 파티라니! 재밌을 것 같은데?”

루시아와 아리스타 모두 헤르윈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싫다고 말하려던 그는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음대로 해.”

“앗싸!”

“와, 진짜?”

“그래, 단 이번 한 번뿐이야. 비앙카, 너도 그 녀석들에게 똑똑히 말해둬. 다음에 또 이런 짓을 벌인다면 그때는 가만 안 있는다고.”

“알겠어! 내가 똑똑히 전할게!”

“우리가 따로 도울 일은 없을까?”

“맞아요, 파티에 참석만 하긴 조금 그런데…….”

“내가 오늘 애들한테 물어볼게. 그러면 일거리를 줄 거야. 일단 일이 어느 정도 진전됐냐면…….”

비앙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서 일의 진척도를 얘기했다.

생일 당사자인 헤르윈이 들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그가 안중에도 없었다.

허탈해하며 의장 등받이에 등을 기대던 헤르윈은 순간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

루시아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그가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킨 것만 같아 마음에 걸렸다.

헤르윈은 착해빠진 제 소꿉친구를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일그러졌던 콧잔등이 펴진 것을 보고 루시아는 안도했다.

그런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비앙카였다.

두 소꿉친구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본 그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누군가 말을 건네자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 * *

헤르윈의 생일파티 날이 정해진 그다음 날, 토요일.

루시아는 여자인 친구들과 함께 헤르윈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외출권을 끊고 테르반 거리로 나왔다.

“흠, 대체 뭘 사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는 만년필 생각했는데 괜찮으려나?”

“오, 비앙카 센스 좋은데요?”

앞서 걷던 크리스틴과 비앙카가 헤르윈의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루시아 옆에 있던 아리스타가 루시아에게 물었다.

“루시아, 넌 헤르윈 선물로 생각해둔 거 있어?”

“음… 아직. 아리스타, 너는 뭐 하려고?”

“나는 연마제나 검 관리에 쓰는 도구를 살까 생각 중이야. 아무래도 검사는 검이 생명이니까.”

“그런 것도 있구나. 참신하다.”

“나야 뭐 검술친구니 이런 쪽으로밖에 생각이 안 나네.”

흔히 선물하는 책이나, 손수건, 만년필 같은 거랑 비교하면 눈에 확 띄는 선물이기는 했다.

특이하다면 특이하지만, 아리스타다웠다.

루시아는 잠시 아리스타의 선물을 받고 기뻐할 헤르윈을 떠올렸다.

제게는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다.

루시아는 제 감정이 질투에 잡아먹히기 전에 서둘러 머리를 내저었다.

‘더 이상 아리스타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잖아. 정신 차려, 루시아 아그네스.’

“루시아! 우리 저쪽으로 가자!”

아리스타가 활짝 웃으며 루시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얼굴을 굳혔던 루시아는 환하게 웃는 친구를 보고 덩달아 미소 지었다.

“응! 가자!”

루시아는 아리스타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루시아의 얼굴엔 그 어떤 망설임도 서려 있지 않았다.

* * *

“……….”

작은 가게 앞에 선 루시아는 창 너머로 보이는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각자 흩어진 친구들을 따라, 루시아도 혼자서 헤르윈의 선물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이 보석점을 발견했다.

딸랑-

“실례합니다…….”

루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안경을 콧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어… 저, 저기에 있는 물건 좀 볼 수 있을까요?”

루시아가 쭈뼛쭈뼛 유리창 앞에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커프스 버튼 말씀이시군요. 어떤 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여기 왼쪽에서 두 번째 물건이요.”

주인 할아버지는 진열된 커프스 버튼을 꺼냈다.

그것은 루비보다도 검붉고 강렬한 색감의 보석이 박힌 커프스 버튼이었다.

그것이 꼭 헤르윈의 눈과 쏙 빼닮아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혹 남자친구분께 선물하시려는 걸까요?”

“네, 네?”

루시아가 얼굴을 확 붉히자 주인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귀여운 아가씨께 선물 받는 분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저 그러니까…….”

“특별히 아가씨께 각인 서비스를 해드리겠습니다. 커프스 안쪽에 이니셜을 새겨 넣을 수 있는데 하시겠습니까?”

애인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루시아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새겨 넣을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헤르윈 페네… 아니, 루시아 아그네스로 해주세요.”

헤르윈 이름을 말하려던 루시아는 곧바로 제 이름으로 고쳤다.

“풀네임을 적기에는 버튼이 작기 때문에 이니셜로 작게 들어갑니다. 그래도 괜찮으시죠?”

“네, 괜찮아요.”

“예쁘게 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주인 할아버지는 커프스 버튼을 들고 안의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버튼이 나오길 기다리던 루시아는 손부채질로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식혔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보통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물건을 상대방에게 선물하는 것은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풀네임이 아니라 고작 이니셜이었다.

이 정도는 친구 사이에도 충분히 줄 수 있는 선물이라 여기며 루시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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