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잘린 검날이 루시아에게 향한 순간부터 헤르윈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주변 풍경이 서서히 느려지며 모든 것이 정지 상태에 가까워졌고, 그와 동시에 매섭게 날아가던 검날도 허공에 멈췄다.
헤르윈은 자신이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루시아만을 응시했다.
머릿속으로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루시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루시아가 날아오는 검날을 그대로 맞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뒷일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푸른 벽안이 생생한 생기를 띄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도하던 헤르윈은 루시아가 제품에서 기절하자 다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루시아!”
미칠 것 같았다. 이러다가 돌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도저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오로지 루시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헤르윈은 서둘러 그녀를 안아 들고 빠르게 양호실로 뛰어갔다.
훈련장에 있던 학생들 모두 넋을 놓으며 헤르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페네우스 공자가 움직인 거 본 사람?”
“난 못 봤어.”
“눈 한 번 깜빡이니까 사라지던데?”
“……뭐야. 검사라더니 마법도 쓸 줄 알았던 거야?”
“게다가 분명 오러를 보였던 것 같은데.”
“그래, 그것도 전신에서 피어올랐어. 마스터 경지에 올라서야만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진짜 오러였을까? 말이 돼? 페네우스 공자는 고작 16살이라고!”
“허, 1학년에서 오러 각성자가 벌써 2명이나 나오다니.”
주변에서 헤르윈의 기이한 행동과 오러 각성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멍하니 있던 브라이언이 퍼뜩 정신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쫓아가자!”
“브라이언! 같이 가!”
브라이언은 서둘러 헤르윈의 뒤를 쫓았고, 그런 그의 뒤를 에단이 따랐다.
“자, 잠깐! 나도 같이 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아리스타도 희게 질린 얼굴로 검을 떨구며 달려갔다.
친구들이 헤르윈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고 크리스틴도 서둘러 짐을 꾸렸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려 하는데, 비앙카가 넋을 놓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비앙카! 뭐 해요! 저희도 얼른 가 봐야죠!”
크리스틴은 비앙카의 어깨를 흔들던 것도 잠시 그녀가 어딘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도 루시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크리스틴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먼저 자리를 떠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비앙카가 방금 전까지 루시아와 헤르윈이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 * *
새하얀 침대에 누워있던 루시아가 신음을 흘렸다.
“……음.”
감겼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맑은 벽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아……!”
흐릿한 시야 너머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헤르윈?”
“정신이 좀 들어?”
“어? 으응…….”
헤르윈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펴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루시아는 떨떠름했다.
분명 오늘 아침만 해도 헤르윈과 데면데면하고 냉기가 쌩쌩 돌았는데, 지금은 싸우기 전보다도 친근하게 구니 의아했다.
그가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꾼 것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루시아의 시야에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양호실? 내가 왜 양호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나?”
“무슨 일?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여기에…….”
얼떨떨하게 상체를 일으키던 루시아는 불현듯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헤르윈이 나타나서 구해줬었다.
그리고-
‘기절했던 건가?’
루시아의 볼이 달아올랐다. 칼에 맞은 것도 아니고, 상처 하나 입지 않았는데 겁에 질려 기절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지금 당장 양호 선생님을…….”
“아, 아니. 괜찮아. 아픈 곳은 없어. 그보다 나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거야?”
“3시간.”
“그렇구나, 3시간밖에… 뭐? 3시간?!”
고작 해봐야 1시간일 거라 생각한 루시아가 화들짝 놀랐다.
“난 몰라! 수업을 빠져버렸잖아! 지금 당장 교실로…….”
루시아가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헤르윈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다시 침대에 눕혔다.
“교수님께 말씀 드렸으니까 괜찮아.”
“하, 하지만…….”
“……너 오늘 죽을 뻔했어. 그런데 지금 수업이 대수야?”
헤르윈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나서야 루시아는 행동을 멈췄다.
헤르윈은 언성을 높이던 것도 잠시 루시아의 얼떨떨한 표정을 보고 말을 돌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제발 좀 쉬라고.”
“……응, 알겠어.”
“……하아, 화내려던 것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헤르윈이 흘러내린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한 차례 혼난 루시아의 얼굴은 시무룩해져 있었다.
“잠깐만… 그런데 아직 수업 안 끝나지 않았어?”
시무룩했던 루시아가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너 왜 여깄어? 수업 들으러 안 가?”
“그깟 수업, 한두 번 빠진다고 문제 되지 않아.”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다가 성적에 지장 간다고.”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빠진……!”
헤르윈이 말을 미처 다 잇지 못했다. 그는 맑은 벽안과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다시 미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까야 일어나자마자 출석 걱정이나 했으니 화날만했다 쳐도, 지금은 왜 화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면 마치 자신이 걱정돼서 남은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제 추측이 맞나 싶어 물어보려던 것도 잠시, 뚱한 헤르윈의 표정에 루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착각이면 어떡해.’
괜히 기대했다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소란스러운 소음이 양호실에 섞여들었다. 루시아는 익숙한 목소리들을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윽고 가림막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루시아!”
“얘들아.”
“세상에, 깨어나셨군요. 어디 아픈 곳은 없나요?”
“네가 기절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브라이언과 에단, 그리고 크리스틴 모두 걱정을 한가득 떠안고 루시아의 상태를 살폈다.
루시아는 그들의 걱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던 도중 친구들 사이에 옅은 금발이 보였다.
바로 아리스타였다. 루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아리스타는 곧바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위험에 처해서……!”
루시아는 그녀가 사과하는 이유를 몰라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주변 분위기와 아리스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얼추 상황을 파악했다.
‘아리스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나?’
워낙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누구 때문에 그런 사단이 벌어진 건지는 몰랐다.
아리스타는 허리를 깊게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아 진심으로 사과했다.
루시아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이내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안 다쳤으니까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루시아가 별말 없이 용서하자 아리스타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일부러 그랬으면 나한테 사과하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치?”
아리스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어.”
감동과 죄책감, 그 외의 여러 감정이 아리스타 얼굴에 떠올랐다.
“저, 정말 미안해…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나는…….”
“어? 우, 울지 마! 나는 정말 괜찮다니까?”
루시아가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이미 감정이 북받쳐 오른 아리스타는 굵은 눈망울을 뚝뚝 떨궜다.
설마 그녀가 울 거라곤 생각 못한 루시아가 당황했다. 안절부절못하던 것도 잠시, 루시아는 어색하게 아리스타의 손을 토닥였다.
자신을 용서해준 루시아에게 크게 감동한 아리스타는 기사가 제 주인에게 맹세하듯 루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
“네게 평생 잘할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말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어색한 관계를 풀어내려는 그녀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래서 루시아는 흔쾌히 아리스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좋아.”
아리스타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기뻐하는 그녀를 보고 루시아는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대체 아리스타에게 무슨 짓을…….’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려 하다니. 사실 사죄는 그녀가 아닌 자신이 했어야만 했다.
‘미안해.’
용기가 없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아리스타가 루시아에게 평생 잘하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루시아 또한 그녀에게 속죄하리라 맹세했다.
초연한 루시아의 얼굴을 보던 헤르윈이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는? 같이 안 왔어?”
“응? 아아, 중간에 급한 볼일이 있다고 어딘가로 갔어. 곧 올 거야.”
“그래…….”
에단의 대답에 헤르윈은 미간을 좁혔다.
쾅-!
“내 동생 어딨어!”
문이 세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동생이 다치기라도 한 건가?”
당황한 친구들 가운데에 루시아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망했다.”
“루시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 남자가 루시아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누, 누구지?”
“루시아랑 닮은 것 같기는 한데…….”
루카스를 처음 보는 친구들은 당황을 금치 못하며 그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어떤 천하의 쳐 죽일 놈이 내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어!”
“누가 보면 네 동생 죽은 줄 알겠다.”
“어떤 놈이야! 당장 나와! 너야? 네 녀석이 내 동생을 이렇게 만들었어?”
루카스 옆에는 아레스도 함께였다. 루카스가 에단과 브라이언을 가리키자 두 사람은 기겁하며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양호실이 떠나가라 난동부리는 오빠가 루시아는 너무나도 창피했다.
“조용히 해!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결국, 참다못한 루시아가 루카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동생! 어디 다친 곳 없어? 네가 아프면 나는……!”
“내가 아프면 뭐. 나 다친 곳 하나도 없어.”
친구들의 걱정은 고마웠지만, 혈육의 걱정엔 짜증이 솟구쳤다.
특히 루카스가 자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잘 알기에 급 피곤해졌다.
루카스는 눈에 불을 켜며 기어코 루시아의 머리카락부터 손가락 발가락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